에도의 森, 에도의 입(口) by 迪倫

향유고래를 따라 재팬그라운드로!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양키 포경선들은 1818년 재팬그라운드의 발견 이후 동북 아시아의 해역으로 와글 와글 모여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처음으로 일본 에도 바쿠후와 조우하게된 것은 앞의 '공중 지배자의 아들 편에서 얘기드린 1845년 봄, 선장 메르카토어 쿠퍼의 포경선 맨해튼호입니다.

메르카토어 쿠퍼 선장의 초상화입니다. 그림 속 창문 뒤의 장면을 잘보시면 그의 배 맨해튼호와 향유고래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배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의 바로 입구인 우라가 항구에까지 들어간 것은 실은 19세기 일본에 대해 조금만 알면 대단히 의외의 사실입니다. (아래 지도의 표시 지역이 가나가와현 우라가입니다. 도쿄만의 바로 입구입니다)

물론 에도 일본은 쇄국 기간에도 네덜란드와 교역을 계속해서 서양 사정에 밝았고 어쩌고는 개뿔. 실제 네덜란드 배들도 나가사키에서 대단히 엄격한 통제 속에 있었고, 그 외의 나라들은 혹시라도 기리시탄을 퍼뜨릴까 무조건 무응답 무허용 무관용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나 러시아의 접근 시도에 대해서는 파에턴호 사건이라든가 (여기 클릭 ) 레자노프의 도래(여기 클릭)를 참고하세요. 특히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 오게 된 계기인 락스만의 마쓰마에 접촉 시도의 경우를 보면 일단 무조건 나가사키로 가라고 해서 그곳에서 붙잡아두었다 거절하는 방식이 원래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한 에도 일본의 대책이었습니다.(이때만해도 조선이나 일본이나 그리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게다가 그 이전에는 다들 서양 국가의 공식적인 사절이거나 해군같은 국가 기관의 방문이었다면, 맨해튼호는 심지어 그냥 민간 부문의 접촉이었단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코 앞까지 들어오도록 허락을 한 것일까요?

메르카토어 쿠퍼 선장의 단 4일간이었지만 일본 방문은 미국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양키 포경선에 일본 근해에 접근해서 고래를 잡는 상황이 중요 미션이 되었는데, 태풍과 같은 만약의 사태와 생필품의 조달같은 문제들도 걸려있고, 그런데 그때까지 네덜란드를 제외한 그 어느 서양국가도 에도에는 그만큼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쿠퍼 선장의 경험은 1846년 4월 "China Repository"에 "Some account of Captain Mercator Cooper's visit to Japan in the whale ship Manhattan of Sag Harbor"라는 제목으로 그의 직접 육성과 함께 실렸습니다.

그가 직접 일본인들에게서 들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 한 부분에 에도의 거버너라고 알고 있었던 일본인 고위 관리 일행이 말하기를 "그가 에도 바다가에 머무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황제(emperor라고 되어있지만 교토의 텐노가 아니라 에도의 쇼군을 말합니다)가 그가 이방인을 구해주는 착한 마음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좋은 마음으로 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라고 전합니다만, 그러나 "다음에는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오지 마라"라고 단호한 입장을 전합니다.
그래서 쿠퍼 선장이 아니, 표류하는 일본인을 또 구하게되면 어찌할까요 하니 돌아온 대답은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보다는 일본인이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않는 쪽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맨해튼호가 우라가에 입항하자 쿠퍼 선장은 처음 현지의 통역사에게서 배를 절대 떠나서는 안된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이 통역사는 네덜란드어를 배웠고 영어를 몇마디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다만 영어가 결국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에 그림까지 그렸는데, 배에서 내리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전하자 그 통역사가 목에 칼을 들이댄 그림을 그렸다는 손짓발짓까지 동원하였는데 배에서 내리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전하자 그 통역사가 목에 칼을 긋는 시늉을 했다는 얘기가 적혀있습니다.(제가 영어 원문을 완전히 오역을 했는데 마침 이웃의 남중생님이 살짝 알려주셔서 늦었지만 수정을 합니다. 남중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으로 일본에 들른 포경선 맨해튼호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대접을 받고 돌아간지 불과 3년 뒤인 1848년 에조치(지금의 홋카이도) 인근에서 역시 양키포경선 플리머스호에서 조그만 나룻배로 한 사람이 일본으로 잠입하다가 붙잡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선장을 설득해서 자기는 자신의 동족들이 사는 일본에 가야겠다며 배를 이탈한 지금의 오레건주 출신의 라날드 맥도날드라는 포경선원이었습니다. '동족의 나라 일본'? 이게 뭔 씨나락 까먹는..?
라날드 맥도날드는 실은 미국인과 북미 원주민 치누크부족 사이의 혼혈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대학교육까지 받은 백인이어서 어려서는 백인들의 정식 기숙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혈통의 한계와 성격들이 결국 그를 당시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던 포경선을 타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당시 북미원주민들에게 퍼져있었던 북미원주민들이 동북 아시아에서 건너왔고 일본인들이 그들과 같은 공통 조상을 가진 '형제'들이라는 소문에 혹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흔히 19세기에 보이는 선교를 위한 아시아 지역 잠입같은 것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배에서 이탈하여 나룻배를 타고 이지항씨와 같은 코스로 리시리섬에 상륙했더니, 아이누인들이 그를 발견합니다.
물론 에도시대 아이누인들이 그를 오오, 가무이! 우리 형제님이시여! 했을리는 없죠. 그냥 잡아다 마쓰마에에 넘겨, 취조하고 나가사키에 보내서 감금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대가 자꾸 이양선들이 출몰하는데, 일본은 원래 조선과 달리 해양 루트의 남만인 기리시탄에 대한 경계가 강박증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잡아다 놓은 처치곤란의 이 이방인에게 나가사키의 오란다 통사 (네덜란드어 통역사)들 중에 뽑아 영어를 배우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들 맥도날드씨의 제자 중의 반장은 라날드가 “오란다어와 영어 사전을 늘 끼고 다닌다”라고 묘사하였던 모리야먀 에이노스케(森山 栄之助, 1820-1872)라는 대대로 오란다 통사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은 3년 전 쿠퍼 선장에게 칼로 목을 자르는 시늉으로 대답을 했던 현지의 통역사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모리야마 에이노스케는 라날드 맥도날드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한편으로 라날드가 일본의 강박증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코치를 해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라날드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게되자 취조에서 절대 모르는 척 통역을 한다든지 해서 무사히 그가 지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라날드 맥도날드는 이후 1849년에 다른 미국인 표류자들 15명과 함께(그러니까 양키 포경선의 활약이 피크로 치닿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미국 해군 함선에 인도되어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제 일본이 태평양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해졌습니다. 중국을 오가는 미국 상선과 재팬 그라운드에서 조업하는 포경선들의 이해관계가 엮여 일본을 평화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무력으로라도 개국을 해야겠다고 다가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 "흑선도래"입니다. 흑선이 우라가항에 도착하자, 일본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개국을 하고 이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중반까지의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트에 올라탑니다.

그런데, 1854년 페리제독 일행과 담판을 짓기위해 나온 일본측의 실질적인 '입(口)'는 다름아닌 모리야마 에이노스케였습니다. 결국 양쪽이 다들 모리야마의 입에 귀를 귀울여야만 하였던 것이지요.

당시 미국측 기록에 스케치로 남은 왼쪽의 사람이 당시 수석 통역사였던 모리야마 에이노스케입니다. 이때부터 모리야마의 활약은 밎어지지 않을 정도로 슈퍼파워입니다. 1854년 바로 뒤이어 러시아와의 화친조약 체결 담당, 1856년 영국 공사 타운젠드 해리스의 통역, 1857년 일미수호조약의 체결 담당, 1862년 영국 공사 올코크와 유럽 순방, 런던에서 영국 외무상과 조약 협의, 이후에는 영국 공사 파크스의 통역 등을 맡았다가 메이지 유신이 난 후 공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근대 일본의 거의 모든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이루어졌다고 해야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의 경력은 양키 포경선의 활동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었죠. 이 모든게 향유고래때문이었다고 하면 너무 나가는 걸까요 하하하

그렇게 정작 일본은 개국을 하였는데, 실은 미국의 양키 포경선은 1860년 경부터 급작스레 소멸하다시피 합니다. 예, 아시는 분들도 이미 있지만 향유고래 기름을 대체할 바로 초울트라 자원 석유가 펜실베니아에서 상용화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61년 배니티페어 잡지에서는 향유고래들이 펜실베니아 석유 발견을 자축하는 파티 장면을 익살스레 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래의 수난은 실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게 꽤나 그동안에 댓글에서 여러분들이 언급하신 내용들과 상충하다시피 하는 내용입니다. 진실을 알고 싶은가...랄지.. 다음편에서는 현대 포경의 시작, 노르웨이의 森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출전 참고도서는 제가 나중에 다시 보충하겠습니다. 일단 올려두고 오타 수정하고 보완하겠습니다.

**제목의 森은 원래 일본에서 고래 잡이 작살 모리 '銛'자를 화한삼재도회와 이후 조선에서 같은 일본어 발음인 森자로 쓴 것을 이용하여 모리야마의 이름 森山을 나타낸 것입니다.






덧글

  • 울산왜성 2019/03/20 00:34 # 답글

    고래로 인한 개항을 기념하기 위해 현대 일본인은 고래고기를 즐깁니다?
  • 밥과술 2019/03/20 01:00 # 답글

    흥미있게 읽고 새로운 것 많이 배우고 갑니다. 고래들의 파티 장면 정말 재미있네요.
    옛날에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오란다 상인들이 일본사람들한테 서양사람들은 다 오란다 말을 한다고 속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처음 접하고 놀랐다는 이야기였지요. 출전은 기억이 안나는데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래 이야기가 근대 역사와 만나니까 참 묘하고 그래서 더욱 끌려들어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9/03/21 02:0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3/21 04:2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3/21 07: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남중생 2019/03/21 02:15 # 답글

    아아... 에도의 입(口)은 과연 어떤 입인가... 한참 고대를 했더니, 개항의 입이면서도 통역의 입이기도 했군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통역관을 설관(舌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던데, 바짝 날이 선 혓바닥(銛)을 노련하게 다루어 19세기의 거친 풍랑을 헤쳐나간 모리나가 씨가 참 대단합니다.

    (적륜님께서 언급하신 "일단 무조건 나가사키로 가라고 해서 그곳에서 붙잡아두었다 거절하는 방식"은 일본 학계에서 "쇄국조법관"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관련해서 제가 번역했던 글을 링크합니다.)
    http://inuitshut.egloos.com/1939627
  • 빛의제일 2019/04/09 00:07 # 답글

    포스트 올리신 후, 늦게 온 주제에 뻔뻔스럽게 다음 포스트를 기다립니다.
    "고래의 수난은 실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구절에 아니 왜??? 그래서 어떻게 여기서 다음 내용이 커엌 모드가 됩니다.
  • 빛의제일 2019/06/23 22:23 # 답글

    여기는 오늘부터 하지라서 그런지 제대로 여름이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적륜님 여름 잘 보내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와서(새 포스트를 바라는 뻔뻔하고 시꺼먼 마음과 함께)
    인사드립니다.
  • 역사관심 2019/07/13 22:53 # 답글

    요즘 바쁘게 지내시나 봅니다. 저 역시 7월은 바빠서 말이나 되어야 다시 제대로 블로그를 쓸것 같은데... 언젠가 올라올 뉴 포스팅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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