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과 조선천문학의 마지막 단계 by 迪倫

17-18세기 천문학의 글로벌 싱크를 쓰는 동안 땡스기빙 연휴가 지나가고 있어 몰아서 글을 올립니다. 어차피 이어지는 내용들이 너무 길어 자른거라 너무 띄엄띄엄하면 연결도 안되고하니 그냥 죽 이어 올립니다.

영조대의 달력 업그레이드 작업은 실은 숙종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효종대에 전격 실시된 시헌력은 하지만 아직 그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로컬라이즈를 100%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허원이라는 관상감 관원의 이름이 사서 여기 저기 등장합니다.

1713년 숙종 39년 5월 16일의 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유집일(兪集一)이 칙사(勅使)의 패문(牌文)315) 이 출래(出來)한 일로써 계문(啓聞)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흠차 정사 두등 시위 아제도 호렵 총관(欽差正使頭等侍衛阿齊圖護獵摠管) 목극등(穆克登)이 봉명(奉命)하여 앞으로 조선국(朝鮮國)에 가는데, 5월 초2일에 출발함. 조서(詔書) 1통, 어장(御杖) 1쌍, 흠차패(欽差牌)316) 2면(貳面), 회피 숙정패(回避肅靜牌) 4면(四面), 황산(黃傘) 2병(貳柄), 오관 사력(五官司曆) 【전례(前例)에 없던 것이다.】 육품 통관(六品通官) 3원(三員), 근역(跟役)318) 19명." 이라 하였다.

오! 목극등! 이 사람 이전에 등장한 적있습니다. 와유록의 처음 김지남편에서 그 한해 전인 1712년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를 세우고 국경을 확정지었던 청나라 관원이죠. (여기 클릭)

그런데 그가 이듬해 다시 전례에 없던 "오관사력"이라는 관원을 대동하고 조선에 옵니다. 오관사력은 청나라 흠천관 즉 천문을 맡은 관리입니다. 그리고, 이 오관사력의 이름은 하국주입니다. 이때 오관사력 하국주가 전례없이 따라온 것은 북극 고도를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양(漢陽)의 북극고(北極高)는 37도 39분 15초이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한인(漢人) 목극등(穆克登)이 오관사력(五官司曆)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실지로 측량한 것이다. " (출전 국조보감)

그런데 이때 조선측에서 오관사력을 담당한 관상감 관원이 있었습니다.

숙종 39년 숙종 39년 7월 숙종 39년 7월 30일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오관 사력(五官司曆)이 나왔을 때에 허원(許遠)이 의기(儀器)와 산법(算法)을 배웠는데, 그대로 의주에 따라가서 그 기술을 다 배우게 하였습니다. 의기(儀器)의 쓰임에는 의상지(儀象志)와 황적(黃赤)·정구(正球) 등의 책이 있으니, 산서(算書) 및 이들 책을 인포(印布)하게 하고, 의기(儀器)도 또한 만들게 하였는데, 사력(司曆)이 또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없는 서책(書冊)과 기계(器械)는 마땅히 돌아가 아뢰어 찾아 주겠다.’라고 하였으니, 훗날 사행(使行)에 허원(許遠)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허원은 아직 어떤 인물인지 찾지못했습니다. 잡과에 합격한 인원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없는데 응시기록에 이름이 다르거나 혹은 추천등의 별정으로 관상감 관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이곳이 워낙 전문기술직이라 그냥 음서로 들어오기에도 좀 그런데 게다가 이름이 남겨질 정도라면 아마 조금 다른 백그라운드와 이야기가 있지않을까 짐작합니다.

허원의 이름은 실은 오관사력이 조선에 오기 이전에 이미 조정에 언급이 되었습니다.
국역비변사등록 57책 > 숙종 32년 1706년 04월22일(음) 기사에 보면:
또 아뢰기를 "역법(曆法)의 크고 작은 달이 황력(皇曆)과 우리 나라 달력이 서로 어긋나 틀린 곳이 많았습니다. 감관(監官) 허원(許遠)이 청나라에 들어갔을 때 여러 서책(書冊)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의 어려움이 다른 글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허원이 일(日)·월(月)·오성(五星)의 초면(初面)을 추보(推步)하는 법을 능히 배워가지고 나온 후에 본감(本監)에서 낱낱이 추산(推算)하여 이제야 비로소 해득(解得)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효종(孝宗) 때에 김상범(金尙范)이 시헌력(時憲曆)을 얻어가지고 왔고, 또 그 산법(算法)을 해득하였기 때문에 그때 상을 준 일이 있었으니, 지금 역시 이에 의하여 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김창집이 아뢰기를 "허원은 서책을 많이 무역해 왔고, 역법을 잘 해득(解得)했으니 상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는 무슨 상을 주었는가?"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가자(加資)였습니다. 상전(賞典)에는 혹 높은 품계로 부료(付料)하거나 혹은 정직(正職)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그는 일찍이 정직이 되었으니, 김상범의 전례에 의해 가자하여 격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에 의해서 가자함이 옳다." 하였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중략) "이번에 얻은 책자는 모두가 요긴하여 산역(算曆)하는 법이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수역 이후강(李後綱) 역시 마땅히 시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신의 장계로 보건대 이 책자는 저들이 아주 금지하는 물건인데, 구해 가지고 왔으니, 수역도 일체로 논상해야 한다." 하였다.

청에서 금지하는 역법 서적들을 들여와서 해법을 터득하여 달력의 조정 작업에 1차 성공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에도 허원은 지속적으로 오관사력 하국주를 의주에서 혹은 베이징에서 만나 역법 계산을 파악해서 훗날 영조가 예전에는 허원이 있었는데 하는 언급을 수차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무슨 계산법을 배워왔다는 것이길래 청에서는 노하우가 빠져나가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고 무려 100년에 걸려 이 시스템과 산정방식을 배웠다는 것일까요?

자, 이제부터 들려드리고 보여드리는 얘기들은 아마 생각도 못해보신 것들이 적지않으리라 생각합니다. 18세기 이후 우리는 '실학'이라는 학문의 사조가 조선에 일어나서 근대적 사고체계를 수용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앞선 지식을 일찍 눈뜬 실학자들이 예를 들어 홍대용 같은 사람이 베이징 천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보고 "전에 들으니 해 속에 세개의 검은 점이 있다고 했는데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이유입니까?" 하니 유송령(즉 아우그스투스 할러스타인)이 말하기를 "점은 점은 셋뿐 아니라 혹 하나나 둘이 있고 많을 적에는 여덟이 있는데 시방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때 입니다."하였다. (중략) 유송령이 말하기를 "그대가 묘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검은 점이 두루 박혔지만 해의 형태는 이미 둥근 것이고 주야로 돌아갈 적이면 구르기가 수레바퀴같은 까닭에 좌우에서 바로보매 이 면에 점이 있으면 혹 저 면에 없으며, 이 면이 적으면 혹 저 면에 많을 적이 있습니다" 같은 기본 대화를 늘어놓은 것을 조선의 선각자라고 칭하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관심이 많아 사료를 찾아보고 그 이면에 이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뭘했나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점점 "실학"이란게 실제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는 중입니다.

자, 허원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 중에 아직 국역이 되지않은 승정원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대략 번역을 해보겠습니다:
숙종 35년 (1709년 康熙(淸/聖祖) 48년 숙종 35년 3월 23일
又所啓, 因觀象監草記, 本監官員許遠, 別爲入送, 而管運餉銀二百兩, 亦出給矣。
다시 고한바 관상감 기록에 의하면 본관의 관원 허원을 특별히 (청에) 들여 보내고 은 200냥을 출장비로 주었습니다.
所謂金水星年根未透處及日月蝕法, 可考諸冊, 幸得貿來, 而竝與中間通言人所給情債, 其數爲一百兩。
소위 금성수성 관련 데이터가 일식과 월식 구하는 법에 아직 미치지 못하여 여러 책자를 살펴보고 다행히 사서 구해왔으니 중간 상인들에게 지불한 돈이 100냥입니다.
欽天監人, 又送言以爲, 尙有他冊可買者, 欲買則當許賣云。
흠천관인이 또 언질을 보내와서 다른 책들도 사고 싶다면 팔겠다고 전했습니다.
故臣使之錄示其冊名, 則乃是戎軒指掌·儀象志·精儀賦·詳儀賦七十二候解說·流星攝要及日星定晷·日影輪圖兩器也。
그래서 신이 그 책이름들을 적고 계헌지장, 의상지, 정의부, 상의부 72후 해설, 유성섭요와 일성정구, 일영륜도 양 장치였습니다.
此皆我國所未見者, 故盡爲買之, 而此外天文大成·天元曆理等書, 亦頗要緊, 且日月蝕測候時, 所用遠鏡, 每每借來於閭家云。
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본적이 없지만 정말 사려고 하던 것들이고 이외에도 천문대성, 천원역리 등 또한 긴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일식 월식 측후에 원경이 쓰이는 바 그동안 매번 필요할 떄마다 여염에서 빌려왔었습니다.
故亦皆貿得以來, 餘銀尙爲四十兩五錢, 故歸時還置於管運餉矣。
그래서 또 모두 사가지고 왔습니다 남은 은이 40량 52전이라 귀국해서 반환하였습니다. (뒤에는 허원에게 상을 주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책과 성도, 천체 관측용 망원경을 구해오는 것은 영조대의 일회성의 해프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관상감에서 "講習" 즉 교육과 연구를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렇게 구입하여 들여온 서양 천문 서적은 거의 70종에 해당합니다. 이중에 17세기 중반의 알려진 개설서가 주종이라면 18세기에 들어온 서적류는 구체적인 일전표(日躔表 = 태양궤도 데이터 차트) 월전표(月躔表 = 달 궤도 데이터 표)등이 상당수에 해당합니다.

그 결과 관상감의 중인 관리들은 비록 시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유럽의 천문학자들의 자료를 놓고 조선의 관측 자료로 보정하여 시헌력을 만들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일식 월식은 적어도 3개월 전에 예측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다음은 영조대에 처음 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종대까지 계속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는 책의 첫부분 "상위고(象緯考)"의 일부입니다. 상위고는 대략 1770년대에 컴파일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칠정(七政) (註: 태양과 달, 오행성의 7개 별을 가르키는 말)
일천 반경(日天半徑 = 태양의 궤도 반경)과 지구의 반경의 비(比)는 가장 멀 때가 1대 20975이고, 중간 거리일 때가 1대 20626이고, 가장 가까울 때가 20277이다. 월천반경(月天半徑 = 달 궤도의 반경)과 지구의 반경의 비는 가장 멀 때가 1대 63.77이고, 중간 거리일 때가 1대 59.78이고, 가장 가까울 때가 55.79이다. 태양의 실제의 직경(直徑)은 지구의 직경의 96.6배이며, 달의 실제의 직경은 지구의 직경의 0.2726배 남짓하다. (註: 멀고 가까운 거리는 타원형 궤도의 근점과 원점을 이야기하는 것)
토성(土星)과 목성(木星)은 지구로부터 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지구의 반경과 본천(本天)의 반경의 비는, 토성이 1대 10953이고, 목성이 1대 5918이다. 화성(火星)은 가장 멀 때의 비가 1대 3123이고 중간 거리일 때의 비가 1대 1744이고, 가장 가까울 때의 비가 1대 410이며, 금성(金星)은 가장 멀 때의 비가 1대 1983이고, 중간 거리일 때의 비는 태양의 경우와 같고, 가장 가까울 때의 비가 1대 301이며, 수성(水星)은 가장 멀 때의 비가 1대 1633이고, 중간 거리일 때의 비는 태양의 경우와 같고, 가장 가까울 때의 비가 1대 651이다.

태양의 본천이 멀어지고 가까와지는 이치를 밝히는 설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동심천설(不同心天說 = 타원형 궤도)이고, 하나는 본륜설(本輪說)이다. 부동심천설은 하늘이 지구 밖을 둘러 싸고 지구를 중심으로 삼는데, 태양의 본천도 지구 밖을 둘러 싸고 있으나 지구를 중심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양심차(兩心差)가 있어서 멀고 가까운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본륜설은 대개 이런 것이다. 태양의 본천과 지구의 중심은 같으나, 본천의 둘레에 또 하나의 본륜(本輪)이 있는데, 본륜의 중심은 본천의 둘레를 따라 동쪽을 향하여 움직이고, 태양은 본륜의 둘레에서 서쪽을 향하여 움직이며, 두 행도(行度)는 서로 같다. 〔본륜의 중심의 동행(東行)과 태양의 서행(西行)은 두 운동 사이에 역시 작은 차이가 있으나, 1년 동안 쌓여서 겨우 1분(分) 차이 나므로.,서로 같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태양이 본륜의 하반주(下半周)에 있어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가까와져서 비(卑)가 되면 본륜의 중심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평행[平行 평균 행도(平均行度)]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며, 태양이 본륜의 상반주(上半周)에 있어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져서 고(高)가 되면, 본륜의 중심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평행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이 본륜의 좌우(左右)에 있어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고비(高卑)가 중간에 맞으면 중거(中距)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행도가 평행과 같다. 양심차(兩心差)의 전수(全數)를 가지고 태양 행도의 빠르고 느린 것에 대하여 헤아려 보면, 오직 중거일 때가 실측(實測)과 맞으며, 최고(最高)일 때의 앞뒤의 두 상한(象限)에서는 속도가 느려서 맞지 않고, 최비(最卑)일 때의 앞뒤의 두 상한에서는 속도가 빨라서 맞지 않는다. 갈서니(噶西尼 = 조반니 카시니!)의 신법(新法)에서는 또 본천을 타원(橢圓)으로 하고 타원면적(橢圓面積)을 균분(均分)하여 나날의 평행의 도수로 삼는데, 이것은 곧 차각구각법(借角求角法 = 태양의 매일 위치를 구하는 방법)을 써서 먼저 평행으로 대배양심차각(對倍兩心差角)을 구하고. 또 평행으로 타원차각(橢圓差角)을 구하여 대배양심차각과 서로 가감하여 균수(均數)를 얻고, 또 균수로 평행에서 가감하여 실행(實行 실제의 행도)을 얻는 것이다.


일단 카시니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 지난번 포스팅에 소개한 데이터왕 조반니 카시니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조금만 더 보겠습니다:
서양(西洋) 사람 케플러[刻白爾]가 타원(橢圓)의 방법을 창안한 이후부터는 오로지 부동심천(不同心天)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동심천의 양심차(兩心差)와 달의 여러가지 행도(行度)는 모두 태양의 행도와 태양의 궤도에 따라 변동[消息]이 생긴다. 그러므로 태양행도[日行]에 빠르고 느림[盈縮]이 있으므로 달의 평행(平行)ㆍ최고행(最高行)ㆍ정교행(正交行)이 모두 이것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이것을 일평균(一平均) 이라고 한다.
(중략)
신법역서(新法曆書)에는, 서양 사람 다록모(多錄某 토레미 = Ptolemy)가 금성을 측정하여 얻은 결과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금성이 지평선 위에 있을 때, 태양이 지평선 아래 5도(度)에 있으면 곧 이를 볼 수 있고, 목성ㆍ수성이 지평선 위에 있을 때, 태양이 지평선 아래 10도에 있으면 이를 볼 수 있으며, 토성이 지평선 위에 있을 때, 태양이 지평선 아래 11도에 있으면 이를 볼 수 있고, 화성이 지평선 위에 있을 때, 태양이 지평선 아래 11도 30분에 있으면 이를 볼 수 있다.


관상감 관원들의 기록은 지극히 객관적 팩트들만 다루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양 과학자들의 이름과 데이터가 그대로 활용되고 있구요.
아래의 이미지는 19세기 초반에 그동안 관상감에서 이루어진 천문학의 거의 최종버전 이론 및 계산을 종헙 정리한 "추보속해"(推步續解)라는 책의 일부분 이미지입니다. 제가 빨간색 박스로 표시한 단어 "第谷"(제곡)과 "奈端" (내단) 전후의 내용입니다:
"서양사람 제곡(第谷)은 365일 2421분 소여(小餘 = 나머지) 875로 정하였으니, 옛날은 늘리고 지금은 줄이는 방법은 믿을 만한 듯하다. 그러나 서양사람 내단(奈端)등이 측정한 것은 365일 2423분 소여 344201415로, 제곡이 정한 것보다 1만분의 1 유기가 많다."

서양사람 제곡은 티코 브라헤입니다. 그리고 내단은 혹시 짐작하시겠는지요, 바로 아이작 뉴턴입니다.

그리고, 이 서양 천문학에서 관측을 통해 도출한 데이터를 기초 상수로 잡아서 다시 조선에서 관측값을 보정하고 방정식으로 구하여 일월 오행성의 궤도를 예측하고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일들을 17세기 이후 계속 해왔다는 것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추보속해의 항성 즉 붙박이별들의 세차운동에 관련된 상수로 사용되는 위치값 데이터표입니다:

지난번 포스팅의 카시니의 연주세차표의 로컬 버전 정도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 시리즈의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과연 조선 후기 천리경이 천문관측에 사용되었을까요? 실은 기록이 없습니다.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에 천리경이 별을 관측하는데 필요하다 그래서 구입했다는 기록이 드문 드문있는 반면 실제 관측에 활용했다는 기록은 현재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 후기의 천문기기를 설명하는 책들에 혼천의 같은 기기는 설명이 있는데 반해 천리경 혹은 원경은 설명이 되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천리경은 쓰지않고 관상감에서 육안으로 이 모든 것을 어림잡고 있었을까요? 갈릴레오, 카시니, 케플러 같은 사람들의 데이터는 당시 천문학의 방향을 바꾼 천체 망원경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조선에서는 이 데이터를 기초로 보정값을 구하기 위해 역시 관측과 계산을 지속해왔구요. 추보속해같은 자료의 관측 상수값은 소수점 6-7자리도 많습니다.

실은 관상감의 원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부분적인 일간 보고서가 운좋게 살아남아있기는 합니다. 이 보고서 "성변등록"의 자료는 현재 남아있는 18세기 부분에는 천리경의 얘기가 없습니다만, 이런 조각 조각의 일부가 17세기 중반의 "재이고"(災異考)라고 하는 다른 문서에 인용되었습니다. 여기에 흥미롭게도 천문관측 그림이 남아있습니다.

재이고의 시기는 아직 천리경이 조선에 제대로 도입되기 전입니다. 하지만 이때도 이렇게 일식의 형상을 이미지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기고 있는데, 이후에 천리경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쓰지않고 있었을까요?

영조 46년인 1770년 4월 5일 승정원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上曰, 觀象監官員, 使之入來, 賤臣引入。上曰, 日中見黑子, 何如? 對曰, 遠鏡見之, 則初見太陽上面, 有五黑子, 終見太陽下面, 有七黑子, 其本方如此矣。
영조가 관상감 관원을 들어오라고 하자 입시하였다. 영조가 말하기를 해 속에 흑점이 보인다. 어떠한가? 대답하여 가로되 망원경으로 관측하니 처음에 태양 상부에 흑점 5개가 보였고 마지막에는 태양 아래부분에 7개가 보였습니다. 그 원래 방향이 이와 같습니다.


관상감 관원은 태연하게 대답을 하는데 이미 흑점의 이동 방향에 대해 알고 있는 뉘앙스입니다. 홍대용이 천주당에서 흑점에 대해 물었을때와 거의 동시대입니다만, 어쩌면 영조에게 입시하였던 관상감 관원은 예수회 천문학자 슈나이어의 Rosa Ursina, sive sol ex admirando facularum et macularum suarum phoenomeno varius 에실린 태양의 흑점 관측과 자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흑점은 실제 관상감에서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더이상 중요한 천변으로 간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19세기 후반 중인계급이 조선 전체에서 가장 유연하게 외부세력에 대응하고 서학쟁이가 되고 개화주의자가 되고 때로 친일관료가 되거나 한 이면에는 이런 양반님들과는 전혀 다른 정보 수용이 의 내력이 있었기 떄문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단 이야기를 자릅니다. 조선은 우리가 잘 몰랐던 성취가 있었던 반면에 "한계 역시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 한계에 대해 첫번째 질문 17-18세기 일본과 조선의 천문학은 어디가 더 우위였을까요로 돌아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정답은 어쩌면 생각하신 것과 같을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천문학 서적의 번역 작업이 많이 진행되어있습니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는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4498&nodeId=NODE04256745&medaId=MEDA04436147#none 에서 회원 자격에 따라 국역본을 볼 수 있습니다. 추보속해는 고전번역원에 국역본이 올라가 있습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j012&gunchaId=av001&muncheId=&finId=001&NodeId=&setid=528175&Pos=0&TotalCount=1&searchUrl=ok 위에 첨부한 이미지는 역시 고전번역원 DB 제공의 원문이미지입니다.
재이고의 이미지는 "17세기 재이고(災異考) 의 자연 기록과 그 의미", 경석현, 한국과학사학회지, 2015에서 부분 발췌했습니다.
마지막 Rosa Ursina 의 이미지는 http://galileo.rice.edu/sci/scheiner.html가 출전입니다.
홍대용의 대화 부분은 "연행사와 북경천주당"(신익철 편저, 보고사, 2013)에서 을병연행록 부분입니다.

**이런 추보속해나 상위고의 해석은 한학과 천문학을 같이 알아야 정확한 번역을 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오관사력을 다섯명의 사력으로 번역한다든지 하는 오류가 조금씩 눈에 띄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상당수가 국역되고 있어서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고천문학이라면 그냥 오성취루같은 얘기말고 정확히 조선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하고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졌는지 엄밀하게 연구결과들이 나온다면 더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조선이 혼자 뒤쳐진 낙제생도 아니었지만 혼자 지구를 이끌어나가는 선두주자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야 그때부터 정확히 앞길을 비춰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을 글을 읽고 같이 한번 생각해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땡스기빙 연휴가 끝나는 저녁이라 다음편은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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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6/11/28 11:27 # 답글

    간만에 내공 제대로 담으신 글 흥미진진하게 읽고 갑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허공담론이 많은 실학의 뺨을 사정없이 치는 천문 관련 기술전문직 선조들의 숨은(숨겨진) 노력이 놀랍네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다 잘 할 수는 없는 일 이었겠습니다만
    최소한 조선은 안돼 우린 안 돼 가 아니라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 가능할 것 같네요
  • 迪倫 2016/12/05 08:02 #

    사료가 이제서야 알려진 것들이 적지않고 아직도 많지않아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왠지 좀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같은게 들기도 합니다.
  • Nocchi 2016/11/28 11:45 # 답글

    한편으로는 중국 천문 기관이나 북경 루트에 편중된 정보 유입은 점은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이 명치 유신 시절에 적극적으로 유럽 본토 사절단 교육단을 보내거나 교수를 초빙하던 것 과는 다르네요
    시대적 기술적인 한계가 있던 시절이긴 했지만
    물론 선조들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고 사회 문화 조건이 다르고 일장일단이 있을 것 이긴 합니다만
    (특히 실학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 놀랍습디만)
    북경 루트가 한 번 막히면 더이상 정보를 받아올 곳 또한 없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거주하는 통영에 새로 만든 국제음악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운영하는 대표를 독일의 음악계 전문가를 연봉 2억원 넘게 주고 초빙해서 쓰고 있죠
    만약에 한국인을 쓰면 훨씬 적은 돈으로 운영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외국의 A급 음악인들을 의욕적으로 초빙해서 훨씬 수준 높은 공연을 열어 주는 것은 만약 국내 공무원이 대표였다면 불가능하거나 힘든 일 이었겠죠
    서울 정도 가야 -훨씬 비싼 비용으로 들을 수 있는- 공연을 시골에서 편하게 듣고 있습니다
    ( .. 운영 적자는 시민의 세금이긴 하겠죠 ㅎㅎ;; )
    외국인 전문가 대표가 아니었다면 국제음악당 또한 진주 창원 마산 수준의 흔한 지역음악당 수준밖에 안 되었을 것 입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고 서양 입장에서도 어떤 전문 영역에 타국인을 초빙 해 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일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
  • 迪倫 2016/12/05 08:06 #

    확실히 정보의 흐름이 편중되거나 제한적인 경우 상황이 변할때 그 타격이 역사에 오래 가게되는것 같습니다.

    통영의 국제음악당은 어떤지 전혀 몰랐습니다만, 참 놀라운 결정과 운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걸 예산과 효용으로 따지면 결국 21세기의 우리가 지금 뒤돌아본 19세기 후반기의 조선이 왜소하고 지리멸렬해진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결과로 이어지게 될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인가 봅니다. 전세계가 지금은 빗장을 그러매는 추세인걸 보면 ........
  • 함부르거 2016/11/28 11:53 # 답글

    그동안 사학자들의 연구가 미진했던 게 이해가 되네요. 천문학 하는 사람은 한문을 모르고 사학하는 사람은 천문학을 모르니 한문으로 된 천문학 서적이 해석이 됐겠습니까. ^^;;; 고전번역원이 요즘 큰 일 하네요.
  • 역사관심 2016/11/29 08:49 #

    동감합니다. 고전번역쪽은 진짜 한국학이나 사학쪽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밀어줘야 하는 핵심영역인듯.
  • Fedaykin 2016/11/28 13:53 # 답글

    허허허...뉴턴의 이론이 18세기에 동쪽 끝까지 전해진거군요. 정말 글로벌 싱크가 대단하네요.
    저런 부분이 민간에 퍼지지 않은게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선 정보력이 나름 대단했었군요.
  • 迪倫 2016/12/05 07:52 #

    처음으로 상시적인 인적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된 18세기는 최근 상당히 주목받는 주제입니다. 각 지역 국가별로 18세기 학회도 결성되어 서로 학술교류를 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민간에 퍼지지않은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 해보려 합니다.
  • 빛의제일 2016/11/28 23:55 # 답글

    '목극동'을 딱 보고 이 아저씨 어디서 봤더라 했는데, 바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와유록도 다시 들으니 반갑고 이런 재미난 포스트들을 종이책으로 읽고 싶다 생각하는 구형 인간이 저입니다. ^^;;
    고등학교 때 과학 선택과목이 지구과학이었는데, 딱 입시용으로만 공부한 것을 반성하게 하는 포스트입니다. 포스트를 다 읽고 나니 '성취, 한계, 앞길'을 곱씹게 됩니다.
  • 迪倫 2016/12/05 07:53 #

    목극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연구가 있으면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 조청관계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을텐데 싶습니다. 아무튼 블로그를 오래한 편이니 이래저래 돌려막기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 남중생 2016/11/29 00:39 # 답글

    실학 담론의 해체는 이미 사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러면서도 "연행사와 북경 천주당"같은 sourcebook은 참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 迪倫 2016/12/05 07:55 #

    예, 실제로 실학 담론의 해체는 대두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문제제기의 레벨 정도인것 같습니다. 좀더 면밀한 연구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연행사와 북경 천주당은 정말 좋은 책이라는데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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