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지 (太原誌) a.k.a. The Records of the Great Plain by 迪倫

반란자들의 섬, 이슬라 칼리포르니아.에서 한가지 뒤늦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원래의 에스플란디안 무공담의 칼리포르니아 여왕 칼리파이의 스토리는 실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와 아킬레우스의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두 세력간의 공성전이 이어지는데 한쪽을 도우러 참가한 여성전사 아마조나스이 여왕이 상대방 장수에게 전투에서 지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기본 스토리의 프로토타입입니다.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의 이야기는 여러군데 소개되어 있으니 찾아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일본에서 시작하여 스페인으로 갔다가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으로 가보았습니다. 이제 깃털 날개를 타고 다시 동아시아로 돌아오겠습니다.

창덕궁 안에 낙선재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낙선재(樂善齋)는 19세기 전반기의 헌종대에 지어진 건물인데 그 건물과 이어진 석복헌과 수강재와 뒤뜰, 한정당을 모두 포함하여,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소위 비운의 왕실 여인들이 기거하였던 어쩌면 조선 왕궁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실제 그 인물들이 실제 생활을 하였던 공간을 부르는 곳입니다. 실제 저도 부음 기사를 기억하는 덕혜옹주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 타계할때까지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낙선재 부속 건물 중의 하나인 석복헌의 다락에는 원래 각종 패물들이 보관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이 패물과 함께 18세기부터 궁중의 여성들이 읽던 한글 고소설들이 같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일부 파손되고 이후 1966-1967년 사이에 정병욱 선생이 발굴 해제작업을 통해 1969년 국어국문학지에 「낙선재문고 목록 및 해제」라는 논문으로 창작소설, 번역소설, 가사, 기행문, 역사서 등등 113종 2000여 책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소설류는 이중 83종인데 대부분 궁서체로 씌여진 장편 소설들로 홍루몽의 한국어 번역본같은 중국 청대 소설의 번역본과 조선 후기 창작 소설 등이 뒤섞여 있어, 일부 소설은 이게 조선 창작소설인지 알려지지 않은 중국소설 번역본인지, 아니면 중국소설을 저본으로 한 번안 소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이 소설들은 200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야 현대어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중에 국적 논란이 된 소설 하나가 번역되어 출판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책 "태원지"의 이야기입니다.

태원지는 처음에 중국소설의 번역본으로 알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중국역사회모본의 각종 책목록에 이 태원지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역사회모본(中國歷史繪模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762년 보통 영조의 딸인 화완옹주로 추정하는 완산 이씨가 만든 중국의 소설들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려 모은 일종의 중국 소설 일러스트집입니다. 이전 일지매편에서 소개를 드렸습니다. 여기 클릭

그런데 이후에 아니야 이 태원지는 중국소설인 것처럼 쓴 조선 소설이야 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요즘은 일단 대체로 삼국지연의 등의 영향을 받은 조선 창작 소설로 간주하는 분위기입니다.

태원지의 원작은 현재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 클릭)
그런데 흐음....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 오리자날 궁서체라는게... 한번 보시죠. 첫페이지입니다.


그런데 이 낙선재본 고소설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임치균 선생이 이 태원지를 현대어역본과 원문 교주본으로 각각 2010년에 출간하였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출간된 교주본을 제가 정리해서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현대어역본과 그래서 내용이 좀 틀릴 것입니다만, 아무튼 만약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있으셔서 책을 사시려면 저는 현대어역본을 추천드립니다. 왜냐하면 원문 교주본은 띄어쓰기와 가로쓰기를 하고 있지만 고소설 읽기에 훈련이 미리 좀 되지않으시다면 가독성이 여전히 떨어집니다. 위의 궁서체 원본과 같은 부분입니다만, 한번 읽어보시렵니까?


아무튼 전체 스토리는 250페이지짜리 책 한권이니 제가 다 소개해드릴 수는 없고 일부 요약을 해서 설명을 곁들여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화설, 때는 원나라 지정 을축년. 중국 금릉땅에 사는 임위는 후사가 없어 걱정이다가 아내와 의논을 합니다. 집이 빈궁하여 명산대찰에 찾아가 기도를 할 수도 없어 적벽강 아래에 낚시를 들고가 3일 밤낮으로 고기를 잡아 시장에 팔아 향촉을 사서 북고산에 올라가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꿈에 신선이 내려와 부부의 정성에 감동하였다며 인간 세상에 보지못한 환약을 하나씩 주어 부부가 먹고 꿈에서 깨니 태기가 있어 남아가 태어나니 그 이름은 임성이라하고 자를 덕재라고 하니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총명하며 위엄이 있으며 사람이 한번 보면 경동치 않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영웅이었습니다.

임성에게는 집안 동생 임응이 있었는데 머리는 범같고 등은 곰같으며 팔은 원숭이같이 날래며 기상이 산을 뒤집을만 한데, 그가 형 임성을 어릴적부터 지극으로 따르며 자랐습니다. 하루는 달이 뜬 밤에 적벽강에 배를 띄운 두 사람. 서로 대장부 천하를 평정하자는 속내를 서로 얘기하고 대사를 의논하는데, 멀리 다가오는 작은 배에 탄 세명의 사람이 이들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청합니다. 복건을 쓴 도사풍의 사람은 자신을 양양사람 종황 자는 미백이며 다른 두사람은 기골이 장대한 두 사람은 무릉인 조정과 오군 사람 하승이라 소개합니다. 이렇게 마주한 두 크루들은 서로 길고 긴 랩 사설을 주고받은 다음 서로 그야말로 마음을 합하여 임성을 모시고 천하를 얻어보자는 대사를 꾀하게 됩니다. 대상인 양관을 만나 적극적인 경제적 후원을 받아 언젠가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시작합니다. 원 조정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수색하자 이들 수십인은 어찌할지 대책을 의논합니다. 거사를 일으키자는 의견에 군사 계략을 맡은 미백(종황)이 지금은 때가 아니라 잠시 기다리자 하니 조정이 왈 동방에 됴션이라는 나라가 있어 그야말로 아름다운 나라인데 배를 타고 그곳에 가서 마음에 품은 뜻을 펼치자 하여 다같이 배를 타고 동해바다로 떠납니다.

배가 출발하자 미백이 괘를 살피다 대경실색하며 아무래도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될 것 같다고 하며 배를 해안으로 붙이자고 하는데 그만 정말 대풍랑에 배가 마구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자, 배는 이제 먼 동해바다 저멀리 떠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리하여 임성과 그 일행의 대모험이 시작됩니다. 이제 조선판 오디세이가 시작됩니다. 다음편을 기다려주십시오.

한편. 이 이야기의 시대 배경인 "원나라 지정 을축년"은 예전 조선사람들에게는 들으면 딱 "파 파 어웨이 인더 갤럭시"라는 의미로 들렸을 겁니다. 지정 至正이라는 연호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때 연호로 1341 - 1370년입니다. 그런데 을축년은 1325년에 해당됩니다. 앞뒤가 안맞다는 얘기지요. 하하하.

아무튼 덧글 요전은 계속 받습니다.


** 우선 낙선재본에 대한 내용은 "한글 고소설의 탄생과 유통", 이윤석, 人文科學 제105집, 2015년 12월과 "조선조 궁중여성의 소설문화", 정창권, 여성문학연구 제11권 , 2004 를 참고하였습니다. 낙선재의 사진은 위키백과가 출전입니다. 태원지 이미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교주본만 사고 현대어역본은 저도 안가지고 있습니다.

"태원지" 임치균 번역/주석,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0은 교주본과 현대어역본이 각각 따로 출간되어있습니다. 태원지에 관련된 내용은 "태원지 연구", 임치균, 한국고전문학회, 고전문학연구 35권 2010. 그리고, "<태원지(太原誌)>의 서사적 특징과 왕조교체", 김용기, 한국고소설학회, 고소설연구제34권, "<태원지> 서사분석에 의한 국적 규명", 황미숙, 한국고전연구학회, 한국고전연구29권, 등입니다. 각각 중국소설/조선소설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국 청대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 창작물이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직접 읽어보시고 한번 궁리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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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남중생 2016/03/03 21:05 # 답글

    년도도 엉터리일 뿐더러, 원나라 때 "됴션"이라니... 그 당시에는 시대 고증 같은게 별로 안 중요했나봅니다.
  • 迪倫 2016/03/03 23:24 #

    시대고증이 안중요했다기 보다 이 소설을 읽는 18-19세기 조선인들은 척보면 알 수 있는 시간 오류를 시작부터 제시해서 이게 픽션이라는 걸 알리는 장치로 보입니다. 됴션은 실제 첫부분의 바다로 나가게되는 모티프로 제시되고 난 다음에는 더이상 나오지않는데 반대로 이게 조선의 창작소설이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가 아니라 18-19세기 개항전 근세 조선의 여러가지 생각/센티멘트 들이 혼합된 것이라 보입니다. 중국 즉 청은 이미 중화가 아니지만 아직 천명이 있고 조선 혹은 바다 너머 태원은 중국과 독자적인 세계의 중심 중화라는 자각같은 것인데 어찌보면 비슷한 시기 히라가 겐나이의 풍류시도켄전의 일본은 중국과 다르다는 자각과 맥락이 이어집니다. 나중에 다시 좀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 남중생 2016/03/16 00:14 #

    "일본은 중국과 다르다는 자각"은 저도 서유기를 번역하면서 눈여겨 보고 있는 점이라서 격히 공감됩니다!!
  • 迪倫 2016/03/16 10:27 #

    보통 순헌철 고종이전 최악의 상황으로 보는 19세기 전기의 조선도 최근에 좀 다시 들려다볼 것들이 보입니다. 이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는 자각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전체의 격동으로 눈을 좀 크게 볼 필요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 중입니다...
  • 함부르거 2016/03/03 21:29 # 답글

    펜테실레이아 전승에는 아이들에겐 말할 수 없는 후덜덜한 이야기도 있지요. 어린 시절(10세 정도?) 읽었던 버전에는 좀 순화되어 있긴 했습니다만... ^^;;;

    요즘도 무협지가 계속 창작되고 있는 걸 보면 중국을 배경으로 소설 쓰는 건 유구한 전통인 것 같습니다. ^^;;

  • 迪倫 2016/03/03 23:29 #

    펜테실레이아 이야기는 좀 ㅎㄷ ㄷ하죠. 뭐 그래서 일단 스킵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얼개는 칼리피아 여왕 이야기의 원형 모티프입니다.

    고소설의 경우 중국을 무대로 잡으면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기 좋은 점도 있고 당시에는 뭐랄까 요즘 뉴욕을 무대로 소설을 쓰면 뭔가 세련된 그런 느낌도 주고 뭐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원지는 실은 이야기가 이제 중국과 거의 무관해집니다. 그게 이 소설의 특색이랄까요.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mori 2016/03/04 01:47 # 답글

    오리지널 궁서체의 포스가 대단하군요;;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만 인쇄된 것을 봐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중국 소설인양 쓰인 조선의 창작물이라는 모티브 자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덕궁은 몇 번 갔는데 낙선재는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웬지 건물만 봐도 좀 슬픈, 그런 곳이었습니다.
  • 迪倫 2016/03/04 05:28 #

    궁서체의 첫인상은 몽골문자나 만주문자 같지않은가요? 한글의 폰트가 생각보다 다른 영향도 있겠다 싶더군요.

    낙선재는 현대사에 비친 모습이 떨어진 해가 슬프게 늘어지는 그런 인상이라... 망해버린 왕조의 늙은 궁녀가 다락에 보관된 고소설을 느릿느릿 낭독하는 그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 밥과술 2016/03/05 10:10 # 답글

    궁서체 원문 읽어보려고 해답보아가며 시도하였는데도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이걸 꼼꼼히 읽어서 현대편으로 옮겨주신 연구자분들께 경의흘 표합니다. 다음편에 어디로 튈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迪倫 2016/03/06 11:48 #

    저도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ㅠㅠ 현재 이 낙선재 문고 소설의 8권까지 번역본과 원문 교주본이 나와있습니다. 아직 발간은 안되었지만 학계에 알려진 것은 완전 대해 막장드라마 같은 것도 있고 앞으로 추가 번역을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단 이 태원지 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빛의제일 2016/03/06 16:26 # 답글

    궁서체 원문 아름답습니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
    조금이라도 태원지 이야기를 더 해주시지, 다음편을 기대하라고 하시니 저는 얼른 지갑 속의 동전을 챙겨야겠습니다. ^^;;
    (언제나 그렇듯이 뻘글인데, 여기인가 김시덕님 블로그인가에서 귀가 펄렁거려 <교린제성>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책이 현대한국어번역본, 일역본, 원문 사진으로 되어 있어, 3분의 1만 읽으면 되는 이런 좋은 책도 있구나 기뻐하며 읽은 기억이 납니다. ^^;;)
  • 迪倫 2016/03/08 00:33 #

    하하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읽어내려가지가 않더군요.
    다음편부터 본격적으로 내용을 소개드리겠습니다만 이 긴 이야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소개할까 고민 중입니다. ㅠㅠ
  • 찬별 2016/04/12 17:45 # 답글

    대학다닐 때 춘향전 원본 궁서체를 오기로 한 번 다 읽었던 적이 있었어요. 지금 다시 보니 어떻게 읽었나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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