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바다 - Thomas el Misteria by 迪倫

황금의 산을 지키는 엘 에스빠뇨르.편에서 우여곡절 끝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스페인령 필리핀 마닐라에 대해 설명을 할때 스페인 제국은 당시 카톨릭 신앙의 종주국이었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마카오와 스페인의 마닐라는 비슷할거라는 생각과 달리 실제 여러가지 차이점을 많이 보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카톨릭 신앙과 체제와의 관계입니다. 말을 거창하게 해서 그렇지, 정리해서 말하면 마카오의 공적 사적 사회 시스템은 일찍 이곳에 진출하여 같이 중국과 일본 선교 + 무역 패키지를 운영한 예수회와 분리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면, 마닐라는 모든 카톨릭 하위 기구들, 수도회들이 원하면 모두 들어와 있었고, 어느 하나를 특히 밀어준다고 할 수 없이 국가와 교회가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가 다른 조직들보다 좀더 마닐라 정부측의 에이전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예를 들어 일본에 16세기 후반부터 진출한 여러 기구들이 예수회의 경우 마카오의 전적인 재정지원을 받아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었던 반면, 다른 탁발수도회들 즉,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의 경우 기본적으로 신도들의 지원, 특히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후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원이 미치는 특정 다이묘의 세력권 내로 제한되는 경우가 많아, 예수회처럼 일본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활동도 하기 어려웠고 결국 17세기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모두 몰락하자 심각하게 활동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펴본 자료들로는 17세기로 넘어가면서 확실히 도미니코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마닐라의 스페인 왕실의 대리정부에 예수회처럼 개입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나중에 이야기하려는 타이완의 스페인 요새들도 거의 도미니코회가 주도하였습니다.

아래의 이미지는 "Historia de la provincia del Sancto Rosario de la Orden de Predicadores en Philippinas, Iapon y China"라는 책의 표지입니다. 책 제목은 직역하면 "필리핀, 일본 및 중국의 선교자 로사리오회 교구의 역사"인데, 첫 출간은 1640년입니다. 예, 바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당대의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의 로사리오 기도회의 선교 역사입니다만, 이게 스페인 마닐라 정부와 사회의 모든일에 다 관련되어 있어서, 뭐랄까 필리핀의 삼국사기 혹은 조선실록 비스므리한 위치에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히 이 책에는 마닐라 정부와 도미니코회가 같이 진행한 정책적, 선교적 활동들의 연대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마카오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과는 미묘하게 다른 시점들이 들어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 책에 한국인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아래의 이미지 두장에서 제가 빨간 라인으로 시작과 끝을 표시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17세기 스페인어를 막 읽을거라고 믿으시는 분들은 없겠죠. 실은 이 책이 상당히 중요한 책이라 현대 스페인어번역이나 영어 번역이 이미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본을 참고해서 제가 중역을 하겠습니다. 그리 길지않고 오늘 이야기는 이거만 하려고 하니 가능한 전체를 번역하겠습니다.

"이때(註: 1618년), 코레아 왕국에 대한 또다른 선교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 선교를 위해 그 왕국의 위대하고 고귀한 개종이 이루어진 것만 같이 보였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품성이 매우 선하며, 단순하여 이중적이거나 속임수를 쓰지않는다. 그 왕국은 대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데, 서로 너무나도 가깝게 붙어있어 매우 좁은 바다가 마치 좀 큰 강정도의 거리로만 떨어져있다. 그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지성과 능력을 갖추었으면서도 그 (중국인의) 이중성은 없다. 그들은 대부분 대지의 쟁기를 끄는 농부들이다. 그들은 일본인의 어떤 용감성은 가지고 있으나 그 (일본인의) 잔인함은 없다.

이 일은 1593년 타이코사마(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서양인들은 도요토미의 관직 타이코로 그를 불렀습니다)가 자신의 나라에 있는 여러 프린스(다이묘를 의미)들을 그들의 경비로 전쟁을 치르게해서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코레아 왕국에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을때 일어났다. 전쟁은 가장 잔혹하고 파괴적이었고, 일본 왕국은 코레아 노예로 가득차게 되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개종하여 마닐라로 오게되었다. 토마스라고 불리는 이 개종자의 아버지는 왕의 비서 자리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부와 고위직을 써서 그의 아들을 찾기위해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 아들은 그 고국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가 돌아가면 물려받게될 그 모든 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영혼에 더욱 헌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의 종교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귀국하지 않으려 했다.

교구의 사제가 이는 (그 나라의) 개종을 시작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1618년 이해 6월 13일 세명의 선교사를 임명하여 코레아로 바로 가는 항로가 없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태워 보냈다. 나가사키에서 이들은 해협을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가시키의 수령인 대관(長崎代官) 4명 중의 하나가 이들의 성스러운 여정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어떤 이들에 의해 동요되어 이들의 선교 목적을 알아채고 이들을 억류시키고 더이상 가지못하도록 제지하였다. 이들은 이 수령 중의 키리시탄인 대관인 안토니오 토안(무라야마 도안 村山等安을 의미)의 아들 안드레 토쿠안(무라야마 도쿠안)의 힘을 빌어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결국 토마스는 그들과 헤어져서 갈 수 밖에 없었으나 그들에게 선편을 보내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코레아로) 갔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더 이상 토마스의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을 돌봐주던 안토니오 토안 다이칸도 실각하여, 코레아로 가려던 선교사 세명 중 두명은 다시 마닐라로 돌아갔으며, 일본에 남았던 나머지 한명 선교사 후앙 데 산토 도밍고 신부는 일본어를 배우며 박해받는 그곳 신자들을 도우다가 1618년 12월 오무라에 구금된 후 1619년 3월 '주께서 순교의 종려나무로 보상하여 주셨다'(순교하였다는 의미입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에 잡혔다 기리시탄이 되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필리핀으로 가서 1617년 마닐라의 로사리오 기도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청년이 그를 돌봐준 신부들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자신을 살린 그 신앙을 전하려고 저 험난한 남양 바다를 헤쳐 나가사키에서 역경을 무릅쓰고 기어이 조선으로 돌아왔더라는 실화입니다. 이건 소설 아닙니다.

실은 이 사건의 조선측 기록을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일단 실록, 승정원 일기 등에는 1618년 광해 10년에 일본에서 고위 관직자의 아들이 송환했다는 기록을 못찾았습니다. 하지만, 1617년에 제2차 회답및쇄환사 즉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조율하고 피로된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려는 조선사신이 거의 반년 넘게 일본에 체류하면서 이미 난리가 나고 강산이 변해버린 시간동안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을 찾아서 데려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완벽의 경우가 제1차 쇄환사였고 1617년이 그 다음번 두번쨰 쇄환사였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쇄환사가 아니라 통신사로 사신의 타이틀이 바뀌었습니다. 토마스가 1617년 연말의 귀국 일행에 포함되었는지 혹은 이듬해 다시 쓰시마를 통해 추가로 귀환하였는지 아직 그정도는 모르겠습니다.

이들을 억류했다는 나가사키 다이칸(長崎代官)은 아마도 이 당시 무라야마 도안과 경쟁관계로 충돌을 하던 한때 키리시탄이었던 스에쓰구 헤이조(末次平蔵)로 추정됩니다. '성스러운 여정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어떤 이들은 도미니코회쪽에서 갈등관계에 있엇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암시하는데, 스에쓰구도 원래는 기리시탄이었고, 그래서 포르투갈인들과 예수회측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수회측의 기록에는 토마스가 신부들을 조선에 불러들이기위해 국왕의 허락을 받으러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수회에서 방해를 했다기보다 스에쓰구가 이미 기리시탄과 손을 끊기로 하고 중지를 시켰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나가사키에는 에도 바쿠후가 보낸 수령인 2명의 나가사키 부교 아래에 상업과 민정을 맡은 4명의 현지인의 다이칸(代官)의 이중구조로 지배체제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 초창기 다이칸이었던 스에쓰구 헤이조에 대해서는 예전 포스팅 "마카오 포르투갈의 신용위기와 일본에서의 퇴출 - 1640년"에 일부 정황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의 일화는 실은 카톨릭 전래사쪽에서는 알려져있습니다. 심지어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에서도 이미 1957년에 이 자료가 영어로는 발표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게 약간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자랑은 조선 후기 양반 지식인들이 서학 서적을 공부하다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체적인 교회가 성립되어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식 입장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부터 17세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피로인들의 개종은 일본 사회 내에서 소진되어 조선사회의 교회 수립에는 영향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어서 만약 조선에도 '가쿠레 기리시탄'이 있었다면, 이 공식 입장에 미묘한 균열이 갑니다. 그래서, 16-17세기 조선인 카톨릭에 대한 연구가 국내 교회사가들은 약간 부정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보입니다. (게다가 교회사에도 다분히 민족주의적 경향도 없지않구요. 교회란 초국적이라 늘 역사 속에서 비국민적이라고 비난을 받던 조직인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실은 토마스는 더이상 조선에서 신앙생활을 펼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후대의 조선 천주교회와는 무관한 결국 일회성의 에피소드가 되고 마는 것이랄가요.

하지만, 왜 마닐라에서 굳이 조선을 타겟으로 이런 순교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시도를 했는지는, 실은 다음에 이야기할 스페인령 마닐라의 대중국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납득이 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프닝들이 결국 스페인의 타이완 점거로 이어집니다. 다음편에서 스페인의 대중국 그리고, 대일본 정책과 사건들을 살펴보고, 그 다음편에는 지옥의 묵시록풍의 "이슬라 에르모사, 신의 분노"편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런데, 마무리 전에 잠시만.

1617년 마닐라의 도미니코회 소속 로사리오 기도회 수도원 건물, 거의 10여년만에 저 바다 끝에 있는 조선에서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조선사신들이 일본에서 수소문하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들. 아마 일본에 끌려갈때는 소년이었을 청년이 이제 저 먼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로사리 묵주를 손에 쥐고 저 먼 북쪽 바다 너머를 멀리 멀리 내려다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한번 해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제가 처음 이 토마스의 일을 알게된 것은 고노이 타카시 선생의 2000년 1월 252호 한일 주교 교류회 강의 자료 http://samok.cbck.or.kr/content/PrintArticle.asp?idx=2536 에서 였습니다. 다만 이게 원래 일본에서 그 전해 열렸던 한일 주교교류회의 강연원고 번역본이라 자세한 내용이 더 없어 그 이후 틈틈이 원 자료와 연구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소개한 원전 자료인 Historia de la provincia del Sancto Rosario de la Orden de Predicadores en Philippinas, Iapon y China의 출전은 http://www.univie.ac.at/Geschichte/China-Bibliographie/blog/2010/05/04/aduarte-historia/ 에서 1640년 초판 디지털 버전입니다. 이 부분의 영어 번역은 구글북에서 "The Philippine Islands, 1493-1898: Relating to China and the Chinese,volume 18"이 출전입니다.그리고, 전체적인 설명은 "Macao as the non-entry point to China: The case of the Spanish Dominican missionaries (1587-1632)". José Eugenio Borao. National Taiwan University. 2009를 참고하였습니다.

**오타 등은 내일 수정하겠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의 덧글에 아직 답을 드리지 못했는데, 며칠내로 다시 얘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제 그만 내일을 위해 자러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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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5/10/15 13:17 # 답글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 적륜님 덕분에 놀라운 사실 또 하나 알고 가는군요
    400여년 전의 일 이지만 마치 지금 일어나는 갈등관계 또는 감동 처럼 다가옵니다
    저도 20년 넘는 냉담자 이지만 카톨릭 아니 본질적으로 믿음 신앙 이라는 게 묘한 감동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왕의 비서 , 승지의 아들이라면 상당한 고관이고 뭔가 기록이 있을 만 도 한 데
    전혀 없는 걸 보면 그것 또한 역사의 미스테리 급 이네요
    국내에 들어와서 모든 걸 숨겨버렸다던지 아니면 일본에 정착 해 버렸다던지
    오늘 글 도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현실이라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迪倫 2015/10/19 11:15 #

    당시 예수회쪽의 기록에도 보면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조선에 돌아가서는 어쩌면 광해군-인조반정의 정쟁에 집안이 휩쓸렸을 수도 있구요, 오랜 기간 일본과 마닐라에서 살았던 토마스가 유교 조선에서 뭔가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게 현실이고, 때로 현실의 신앙이라는 것은 믿어지지않는 일들을 해내기도 합니다.
  • Fedaykin 2015/10/15 13:27 # 답글

    허...굉장한 소재네요. 자발적 포교를 자랑하는 천주교 입장에선 좀 거시기 하겠지만...창작물의 소재로도 훌륭하게 쓰일 수 있을것 같습니다.
  • 迪倫 2015/10/19 11:17 #

    그래서 일본 포로 조선인 신자들에 대해서 약간 주저하는 경향은 있습니다. 하지만 잘알려진 순교자들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이 이야기 자체는 뭔가 더많은 상상을 해볼 수 있게 해주는 사연이기도 합니다.
  • mori 2015/10/15 14:00 # 답글

    우와... 정말 놀라운 이야기에요. 그나저나 교회 입장에서는 저런 이유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군요 ㅠ 아무래도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래는 다른 곳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왔어서 그런 것 같아요. 조선 쪽에도 자료가 있다면 좋을텐데 워낙 ㅠㅠ 다음편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흥미진진합니다!!

    그나저나 17세기 스페인어는 라틴어와 정말 매우매우 유사하네요!

  • 迪倫 2015/10/19 11:20 #

    라틴어를 잘하시니 혹시 제가 잘못 쓰거나 빠뜨린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저는 영어본을 번역하고 참고 논문에 실린 내용을 약간 추가했는데, 원문을 제대로 읽었던게 아니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좀 있습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자생적 교회의 탄생을 너무 강조해버려 이런 사례들을 기존 입장 내에서 처리하기가 어려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선쪽 자료보다 일본 쓰시마의 문서를 혹시 찾으면 나오지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만....제 능력 밖의 일이라. 누군가 언젠가 연구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ㅠㅠ
  • 밥과술 2015/10/15 18:07 # 답글

    저는 파란만장한 조선인의 일생도 재미있지만,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된 한국인의 이미지가 흥미깊습니다. 팔랑귀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떤 근거로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迪倫 2015/10/19 11:27 #

    일단 이 일이 있었던 1616년에서 불과 몇년 전에 일본에서 다카야마 우콘이라는 거물급 기리시탄 다이묘와 상당수의 기리시탄들이 추방을 당해 마닐라의 일본인 마을에 정착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많았고 이들 중 몇몇은 사제는 없었지만 수사나 부제와 같은 정도로 임명을 받아 다시 일본으로 밀입국하여 기리시탄들을 돌보다 순교를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지혜와 용맹이 뒤떨어지지않지만 순결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는 1차적으로는 이들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기리시탄이 되어 마닐라로 온 조선사람들과의 접촉이라고 보입니다.
  • 빛의제일 2015/10/17 02:22 # 답글

    이야 놀랍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아이고... 싶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믿음의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까 생각하는 냉담자입니다.

    저는 迪倫님께서 17세기 스페인어도 하시구나, 못하시는 외국어가 있으려나 생각했습니다. ^^;;
  • 迪倫 2015/10/19 11:30 #

    미 노 아블라 에스파뇰....ㅠㅠ

    외국어 여러개 막 쏼라 쏼라 하시는 분들 정말 부럽습니다. 영어야 생계용으로 하지않으면 안되고.... 나머지는 한다고 하기에는 실은 너무 어설픈 정도입니다. 속지마세요....

    이어지는 이야기들 기대해주십시오.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 함부르거 2015/10/19 18:39 # 답글

    임진왜란 때 조선 땅을 밟은 세스페데스 같은 선교사도 있었죠. 위에 말씀하신대로 한국 교회에선 무시하고 있고, 사실 한국교회사에 끼친 영향이 없기도 하지요.
  • 迪倫 2015/10/20 02:40 #

    세스페데스 신부는 침략군에 따라왔다는 극단적인 상황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 수용할 수 없는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때를 조선 선교의 기원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에 대해 대단히 곤란해 하더군요.

    제 생각도 결국 교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 남중생 2015/11/06 17:31 # 답글

    확실히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 이래로 주장되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교회가 성립되었다"라는 설에는 미씽링크가 상당히 많습니다. 일단 "교회전통"으로 이어지지를 못한다는게 크지요... 하지만 포스팅에서 언급하셨다시피 보편적인(가톨릭) 세계교회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아아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독특한, 위대한...)"같은 식의 국가교회, 민족교회를 주장하는것 역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 迪倫 2015/11/07 15:02 #

    그렇죠 소위 보편 교회인데 말입니다. 저는 교회전통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서 조선인 기리시탄이 조선 교회사의 일부라고 하기에는 무리라고 보는 편입니다. 대신 동아시아 또는 세계 교회사에는 당연히 독자적인 한 챕터를 차지해야하는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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