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요스, 캡틴 차이나와 지룡! by 迪倫

명청교체기와 군담소설, 그리고, 정지룡.에서 등장시킨 정지룡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우선 2부 처음의 덴지쿠 도쿠베로 잠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새 잊어버리셨다면 여기 클릭)

덴지쿠 도쿠베가 스미노쿠라의 배를 타고 아마도 동남아시아로 추정되는 천축을 처음 다녀온게 1628년, 그런 다음 1630년에 다시 천축으로 항햐는데, 제가 "일본에 돌아온 후 1630년 11월 14일 이번에는 일본에 정착해서 살고있던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의 배를 타고 다시 출항하여 이듬해 1631년 2월 18일 중천국 마카타국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해 1632년 8월 18일 나가사키로 다시 돌아옵니다. "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이 부분의 원래의 원문에는 좀더 자세하게 "오란다의 요스야시키에 속한 배를 빌려타고 다시 (천축으로) 돌아갔다. 요스는 나가사키에 야시키가 있고 천석을 받았으며 또한 에도에도 요수야시키가 있다. 나가사키의 선장 비토토 이치자에몽은 오란다배를 '사오부네'라고 불렀다. 우리배는 승조원 384명, 나는 19살에 떠나 21살에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은 나중에 소개를 한다고 했었죠.
얀 요스텐 판 로데스타인(Jan Joosten van Lodensteyn 1556 - 1623) 은 1600년 일본에 처음으로 도착/표착한 리프데(Liefde)호의 멤버입니다. 잘 알려진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고 불린 윌리암 아담스와 동행이었던 사람인데, 일본에 정착하고 야요수(耶楊子)라는 이름과 사무라이 계급, 그리고 녹봉과 무역 허가증인 주인장을 받아 이후 몰려오는 유럽인들 중 특히 네덜란드의 VOC가 연착륙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도쿄역 근처의 야에스(八重洲)에 원래 그의 저택(야시키 屋敷)가 있어서 지명이 그렇게 지어졌다는 얘기도 전하는데, 나가사키와 에도에 무역사무소/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쿄역 인근의 기념물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VOC 심벌은 흐음... 이런 실수를.....왜냐하면 말이죠.....
실은 윌리엄 아담스와 얀 요스텐이 탄 리프데호는 VOC가 보낸 배가 아닙니다. 2년 뒤인 1602년 VOC를 구성할때 참가한 회사들 중 로테르담 베이스의 마헬한셰 콤파니(Magelhaensche Compagnie) 소속의 배입니다.

보통 인터넷의 간단 자료들을 검색하면 덴지쿠 도쿠베가 요스텐과 함께 인도를 갔다고 되어있는데, 실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우선 요스텐은 1623년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중국해에서 배가 침몰하여 죽었습니다. 덴지쿠가 두번째 천축에 갔다는 것은 1630년이죠. 기싱꿍도 아니고. 실은 덴지쿠의 기록에도 요스야시키 즉 요스 소속의 무역상단에서 배를 빌렸다고만 되어있지 요스와 같이 갔다고는 하지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초반만 해도 조완벽의 증언에서 "왜선은 소형선이어서 큰 바다에는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백금 80냥을 주고 당선(唐船)을 구입하는데"라고 한 것처럼 일본이 자체 배를 타고 원양으로 나가지 못해 네덜란드같은 유럽이나 중국의 배와 선원을 고용하고서야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얀 요스텐처럼 일본에서 무역허가증 주인장을 발급받은 외국인들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실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실질적인 동아시아 바다의 주역들입니다. 먼저 이 해역의 주역은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네덜란드도 아닌 중국 복건 뱃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동아시아의 바다로 들어온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저 이름을 알린 유명인은 캡틴 차이나 혹은 카피탄 시나(Kapitan Sina)라고 불리던 리단(李旦)이라는 주인선 무역상이 있습니다. 뭐 무역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해적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펴고 있었고 배를 타고 다른 나라, 특히 일본에 가서 무역을 하는 것은 법으로 엄금하는 일이었으니, 그냥 해적이기도 합니다.

리단은 복건성 천저우 출신입니다. 그런데, 또하나 특기할 점은 유럽인들이 그를 안드레아 디티스(Andrea Dittis)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으잉! 유럽계 이름과 카피탄 시나(캡틴 차이나)?

뭐 약간 이런 분위기인가요?!!

캡틴 차이나 혹은 카피탄 시나는 실은 이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도차이나 혹은 말레이반도의 거점 도시들, 인도네이사 향료섬들의 거점 항구, 그리고, 마카오와 마닐라, 바타비아처럼 유럽인들이 16세기 후반 자리를 잡은 곳들에는 항상 주로 복건 절강 출신의 중국인 화교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커뮤니티가 사는 중국인 구역을 파리안(parian)이라고 부르는 데, 이들은 이 곳들과 중국의 광저우, 천저우, 아모이(샤먼) 등을 왔다갔다 하면서 무역상과 중개상으로 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중국인 화교 커뮤니티의 지도자를 캡틴 차이나, 카피탄 시나라고 불렀습니다. 단지 리단은 아마도 처음으로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카운터파트 또는 적으로 인식된 캡틴 차이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단은 원래 스페인령 마닐라 외곽에 형성된 중국인 커뮤니티의 카피탄 시나였습니다. 이곳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남미의 은을 중국의 복건성 항구들 특히 아모이에서 실크로 바꿔 마닐라로 가져오고 스페인인들이 태평양 노선을 유지하도록 한 또하나의 중요한 플레이어들인 복건상인/해적의 두목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1603년 마닐라에서 패닉한 스페인인들이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1606년경 마닐라를 떠나 일본 규슈의 히라도로 거점을 옮깁니다. 당시는 히라도가 나가사키보다 더 큰 국제무역항이었고, 이곳에는 도진(唐人)들이 거의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그중에 리단과 같은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직접 주인장을 받아 직접 무역을 하기도 하고, 중국에 직접 액세스가 되지않던 유럽인들 특히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인들의 무역 중계 대리인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심지어, 1613년 잉글랜드 동인도회사(EIC)가 처음으로 일본으로 처음 왔을때 선장 존 사리스(John Saris)의 기록에는 히라도에서 아우다시(Audasee)라고 불리는 캡틴 차이나를 수소문해서 그의 건물들 중에 하나를 6개월에 95레알을 주고 임차하여 첫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일본 상관을 차리기도 합니다. 예, 이 아우다시가 바로 리단입니다. 그리고, 리단은 히라도를 관할하는 다이묘 마쓰우라, 복건성 관리들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의 라인이었고,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EIC가 복건성 아모이(현재의 샤먼 夏門)에 마카오와 광저우처럼 공식채널을 터주도록 주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리단이 마닐라에서 히라도로 자리를 옮기던 1600년대 초반 동아시아 바다에 '대.다.난.놈'들이 등장합니다. 홍모인들이라 불리던 네덜란드인들이 아예 여러 회사들을 VOC라는 연합회사로 통합해서 전쟁권까지 부여받고 마구잡이로 동아시아 바다에 뛰어든 것입니다. 1603년 말라카 해역에서 포르투갈인 선박을 나포하면서 첫선을 강력하게 보여준 VOC는 게다가 이미 일본에 정착하고 있던 네덜란드인 얀 요스텐과 멜키오르 반 산테보르트(역시 윌리엄 아담스, 얀요스텐과 같은 리프데호의 선원출신입니다. 사무라이 지위는 받지못했지만 주인선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이들이 이미 규슈, 에도 등에 자리를 잡고 일본의 최고위층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초창기인 1609년 이미 히라도에 발을 들입니다.(1603년의 포르투갈 선박 나포와 이후의 전개는 여기 클릭 예전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이후 VOC는 거의 20년간 향신료 제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분투하여 1619년 자카르타 즉 바타비아를 확보한 다음, 남중국해의 해적 네트워크에 어엿한 세력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동아시아 바다에 자리를 확보하고 나서보니 동남아의 향신료만으로는 일본에서 크게 장사가 안되기도 하였고, 먼저 자리를 펴고있던 포르투갈인들을 보니 역시 중국의 실크가 있어야 일본의 은을 차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당시 중국과 무역이 금지된 일본에 실크를 공급하는 것은 중국인들 당사자와 쓰시마를 통한 조선, 그리고 유럽계로는 유일한 예외가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이었습니다. 결론은! 마카오를 치자!

1622년 바타비아에서는 코르넬리스 레이어센(Cornelis Reiersen) 제독이 이끄는 정예부대를 보내 허술한 무역거점 정도의 방비만 있던 마카오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맙-소-사-. 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하고, 아무튼 바타비아는 그러자 마카오말고 아예 복건성으로 바로 가서 쇼부를 보자! 이듬해 1623년 페스카도레스 섬에 자리를 잡고 바로 건너편 아모이항을 공격합니다. 페스카도레스 섬은 지금 펑후(澎湖 중국이 아니라 타이완 중화민국령입니다)인데, 당시 명나라는 여기까지를 자신들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이 1623년의 아모이 공격은 본격 전쟁이라기보다 행패를 부려 마카오처럼 자리를 잡겠다는 전략이었다는거죠. 펑후라면 위치 상으로 중국과의 무역뿐 아니라, 포르투갈의 마카오-히라도 라인과 스페인의 아카풀코-마닐라 라인의 주요 트래픽 포인트에서 두 라인의 목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구 말입니다.

그런데, 맙-소-사-. VOC는 이번에도 명나라군에게 밀려버립니다.

바타비아에서는 원래 중국을 상대로 전쟁하려던게 아니었으니, 이대로 상황이 악화되면 더 곤란해진다 판단하고 레이어슨 제독을 전격 경질하고 레이던대학 법학박사 출신의 마르텐 송크(Maarten Sonck, 1590 - 1625)를 다시 감독으로 아니 책임자로 보냅니다. 마르텐 송크는 아모이의 복건순무(福建巡撫) 상주작(商周祚)와 협상을 하고 펑후에서 물러나 그 너머의 일라 포르모사로 물러나기로 합의합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일라 포르모사(Ila Formosa)라고 부르던 섬이 동아시아 해역사에 본격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섬이 바로 덴지쿠 도쿠베가 "다쿠산쿠"라고 기록하였고, 에도시대에 다카사고高砂라고 불린 타이완섬입니다.

그런데, 이 마르텐 송크와 상주작의 협상을 중간에 중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위에 소개한 리단입니다. 리단뿐 아니라 당시의 복건계 해적/상인들은 이때 타이완을 일본 복건을 오가는 항로의 중간에 이미 일종의 스테이션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지도를 보시면 타이완과 일본 규슈 사이에 섬들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 보이시죠. 그리고, 복건의 어부나 농민들도 이미 건너와 자리잡은 인구가 있었습니다.

리단은 일종의 해적 콘소시엄을 이끌고 있었고, 이들은 이 해역에서 전투적 상황이 가급적 벌어지지 않는 것을 원했고, VOC라는 새로운 플레이어를 자신들이 활용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죠.

리단은 1624년까지의 이 협상을 중재하던 일환으로 마르텐 송크에게 유럽어가 가능한 수하의 중간급 해적 선장을 통역으로 붙여보냅니다. 이 통역의 이름은 니콜라스 이콴! (약간 무간도 방식으로 VOC의 내부사정을 빼내는 역할 비스므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협상이 끝나 지금 타이난 안핑에 요새를 만들고 포트 제일란디아를 세운 다음 1625년 리단은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의 해적 비즈니스는 VOC를 등에 업은 양아들 이콴이 물려(?)받습니다. 바로 앞서 소개한 "캄보야에 왔을때 서신을 전해 받았는데, 그의 보스와 다른 상인들이 모두 일본을 휩쓴 역병과 이어진 기근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기독교 정신을 버리고 이들의 부를 모두 독차지해버렸다."던 바로 그 니콜라스 이콴, 정지룡입니다. (그러고보니 G-드래곤?)

정지룡은 1612년 이미 그의 아버지 정소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서적과 중국의 약재를 바치고 중국의 정세를 알렸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아버지와 삼촌이 모두 마카오와 히라도를 왕래하던 해적/무역업자 집안의 사람입니다. 니콜라스 비천이 정리하여 소개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의 명청교체기의 역사에는 이코안(Icoan)이 가난으로 마카오에 갔다가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이때 대부가 되었던 포르투갈 부호가 죽으면서 유산을 그에게 남겨 이를 바탕으로 무역상으로 성공했다고 합니다. 다만 왜 이 사람은 다들 죽으면서 유산과 해적선단을 넘겨주는 것이죠? 이정도면 보험 조사단이 개입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만...

마카오에서 성장하여 포르투갈어를 배워 능숙했고 스페인어와 네덜란드어도 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감각이 좋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1622년 무렵 그동안의 소규모 패밀리 비즈니스에서 리단의 해적선단 콘소시움에 가담하여 동남아-복건-히라도 무역에 집중하면서 실적을 인정받고 리단의 오른팔이 되어 VOC에 통역으로 들어가 신임을 얻고, 162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히라도-포르모사-아모이-동남아 라인에서 거의 독점적 위치를 장악합니다. 아예 VOC의 깃발을 걸고 마닐라로 향하는 중국 상선을 무차별로 포획하는 해적 대리점을 했다고 할정도이더군요.

그런데, VOC와 이콴의 밀월은 역시 배신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콴이라는 사나이는 어쩌면 끊임없는 배신의 연속으로 일생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콴과 VOC와 타이완 이야기를 이어가려면 먼저 또다른 플레이어 하나를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캡틴 차이나 리단이 마닐라에서 히라도로 옮긴 것이 1603년의 중국인 학살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에스파냐 시뇨르들의 이야기를 먼저 좀 하겠습니다. 이야기 중에 아마도 처음 들어보시는 마닐라를 다녀온 조선인 청년의 짧은 사연도 등장할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부터 이어지는 글들은 몇개의 논문과 서적을 종합한 것들입니다.
"War, trade and piracy in the China Seas (1622-1683) ", Cheng Weichung, Leiden university press. 2012. 이 책은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를 거의 집대성한 책입니다. 특히 앞부분 이콴 관련 이야기들은 상당히 흥미있습니다. 게다가 라이던 대학에서 고맙게도 책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클릭)
"The rise and fall of the Spanish and Dutch colonies on Taiwan, 162401662", Tonio Andreade, Emory Univ., 2004
"How Taiwan became Chinese: Dutch, Spanish, and Han colonization in the seventeenth century", Tonio Andread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8 토니오 안드레아드 선생의 글은 타이완의 유럽 식민지 부분에 대해 아주 상세한 정보를 전해줍니다. 다음 편에 주로 소개를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An overview of the Spaniards in Taiwan (1626-1642)", Jose Eugenio Borao, National Taiwan Univ. 2007
"Macao as the non-entry point to China: the case of the Spanish Dominican missionaries (1578-1632)", Jose Eugenio Borao, National Taiwan Univ.2009 호세 보라오 선생은 역시 타이완의 유럽 역사를 지역적 시각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Pulling the Spanish out of the 'Christian Century': Re-evaluating Spanish–Japanese relations during the seventeenth century.", Thomas W. Barker. 2009 베이커 선생은 흥미롭게도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Sino-Japanese trade in the early Tokugawa period: Kango, Copper, and Shipai", Yun Tang, Univ of British Columbia, 1995 탕 선생의 경우 소흘히 다뤄졌던 중국 상인들의 역할과 활동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History of the Two Tartar Conquerors of China", Père Pierre Joseph d'Orléans 이 책은 위에 니콜라스 비천의 자료를 저본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기록한 명청교체기 역사라고 한 그 책입니다. 원래 저본은 17세기이지만, 프랑스의 도를레앙이 종합 정리한 것을 다시 런던 하클루트 소사이어티에서 19세기 중엽 영역한 책입니다. 저는 2005년 Adamant media corp.에서 Elibron classic series의 하나로 출간한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글이라 지금 보면 엉성하지만 이전 포스팅 시리즈 중에서 16세기 경제사 잡담의 후반부17세기 경제사 잡담의 전반부를 한번 읽어보시면 내용이 좀 쉽게 따라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일부러 출전들을 가급적 꼭 기록하려는 것은 저도 다른 글들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읽을때 도대체 어디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 도무지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 글을 읽고 흥미를 느껴 더 자세히 알아보고싶다면 적어도 가이드라인을 제공해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생각 나지않는 출전들이 좀더 있는 것 같은데, 글을 쓰면서 추가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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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닐라 지사 페르난도 데 실바(Fernando de Silva)는 이슬라 에르모사에 교두보를 확보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1624년의 VOC의 타이완 입성은 여기를 클릭해서 다시 한번 리마인드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1626년 2월 2척의 배를 타고 스페인 군인들과 마르티네스 신부를 포함한 도미니코회 소속 선교사 5명이 ... more

덧글

  • 이종혁 2015/10/11 18:14 # 삭제 답글

    왠지 의천도룡기를 먼저 보고 그들의 선대이야기 사조영웅전 그리고 화산논검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미리 다루셨던 이전회들을 다시 짚고 그 재미를 되새김질하는 순환이 새롭습니다. ^^

    정성공의 선대와 그의 일생을 이끈 사조 그리고 무간도 못지 않은 느와르가 상상의 나래를 칩니다.
  • 迪倫 2015/10/12 13:58 #

    블로그를 한지 시간이 좀 오래되니 이야기들이 거기에서 거기를 도는 느낌입니다 -_-;;

    예전 포스팅은 다시 보니 정말 엉성하네요... 그냥 감안해주십시오 ㅠㅠ
  • 밥과술 2015/10/11 19:48 # 답글

    바쁜 시간에 새글이 올라와 들어와보니 글은 대단히 재미있는데, 정신적 여유가 없으니 세부사항이 펄로우가 잘 안됩니다ㅠㅠ 오늘은 출석부 도장삼아 덧글 남기고 나중에 정독하도록 하겠습니다~
  • 迪倫 2015/10/12 13:59 #

    앗, 바쁘실텐데, 천천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좀 정리를 잘해서 쓰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ㅠㅠ
  • 빛의제일 2015/10/11 20:27 # 답글

    요즘도 언급하신 곳들을 왔다갔다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그 옛날에 대단하다 싶습니다.
    VOC는 만사형통, 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포스트처럼 줄줄이 지는 일도 있으니 역시 사람의 일이구나 싶습니다.

    또 다른 플레이어 & 조선인 청년! 대환영입니다. ^^
  • 迪倫 2015/10/12 14:00 #

    VOC가 줄줄이 지는 것뿐 아니라 사기도 당하고... 타이완에서는 거의 지못미 수준입니다.

    이야기가 아무튼 자꾸 늘어지고 있어 어째야하나 고민 중입니다.
  • 함부르거 2015/10/12 13:52 # 답글

    녹정기에 보면 정성공이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탈환한 게 무슨 대단한 민족적 업적인 것처럼 나옵니다만, 현실은 VOC를 등에 업고 성장한 정지룡의 아들이 VOC의 마지막 거점까지 털어먹은 사건이었군요. ^^;;;;; 김용 소설은 다채로운 역사적 사건들이 풍부하지만 중화주의 뽕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 주의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
  • 迪倫 2015/10/12 14:02 #

    정성공은 현대 중국이 너무 심하게 활용(?)하는 느낌입니다. 영화 정성공을 보았는데, 아, 이렇게 극이 연결이 안될 정도로 무리한 민족주의가 전면에 나오니 참 곤란하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VOC의 타이완 거점은 중국측 설명과 좀 많이 다릅니다. 아무튼 다다음편 정도에 다시 타이완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십시오.
  • Nocchi 2015/10/12 14:13 # 답글

    VOC 가 이렇게 지못미! 사방에서 깨진 역사 라니 놀랍네요
    그런데 '돈 앞에 중국인' 이라고 생각 해 보니 이해 못할 것도 아닌 듯 싶습니다
  • 迪倫 2015/10/19 11:03 #

    VOC가 의외로 찐따짓을 적지않게 했더군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본 역사학계의 영향으로 좀 더 과대평가한 측면도 있기는 합니다.

    17세기의 중국이나 스페인은 19세기의 허약한 후진국들이 아니기도 했구요. 이어지는 이야기들 기대해주싮오. 유럽인들의 허우적대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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