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졸리는 눈, 네무리 교시로 살법첩(眠狂四郎殺法帖) by 迪倫

찌르릉...극장의 불이 꺼지고 화면 속 어두운 밤 갑자기 불꽃이 날리는 수리검이 어지러이 나무담벽에 날아와 박히고, 황급히 수리검을 피한 한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어디선가 검은 복장의 닌자 예닐곱이 나타나 그를 둘러싸자, 호리호리한 그 사나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누가 너희를 보냈느냐, 나로하여금 칼을 뽑지않도록 해라, 내가 칼을 뽑으면 너희는 모두 죽음이다. 그리고 휙. 휙.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닌자들이 쓰러뜨린 사나이가 무심한 표정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영화의 타이틀 "眠狂四郎殺法帖"이 붉은 글씨로 나타납니다.

자, 이번 시리즈의 문을 여는 열쇠, 영화 "네무리 교시로 삿포초"의 시작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1963년 하반기에 일본에서 개봉된 시대극입니다. 감독은 다나카 도쿠조(田中 徳三), 그리고, 주인공 "네무리 교시로(眠 狂四郎)역은 60년대 일본 영화계의 특급 배우였던 이치가와 라이조(八代目 市川 雷蔵, 1931 - 1969) 입니다.



영화의 원작은 소설가 시바타 렌자부로(柴田 錬三郎)가 주간신조(週刊新潮)에 1956년부터 연재를 하여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네무리 교시로" 시리즈를 각색한 것으로, 이전 1950년대에도 이미 3편의 영화가 제작되기는 했지만, 실은 제가 오늘 소개하는 이 1963년의 작품부터 1969년 주인공 이치가와 라이조가 세상을 갑작스레 뜬 1969년까지 무려 12편의 시리즈 영화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 이후에도 물론 영화가 한두편 더 나오고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치가와 라이조가 워낙 막강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보통 네무리 교시로라면 자동적으로 이치가와 라이조가 연결이 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 영화의 촬영 당시 왼쪽은 원작자 시바타 렌자부로, 가운데는 감독 다나카 도쿠조, 그리고 오른쪽 웃는 사람이 이치가와 라이조입니다.

어차피 워낙 오래된 영화인데다 딱히 한국에서 새삼스레 개봉될 영화도 아니고, 게다가 이 영화의 내용으로 앞으로 시리즈를 끌어나가려 하는 참이라 세세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그냥 다 얘기해드리겠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딱히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원작 소설은 분세이(文政) 12년 즉 19세기 전반기인 1829년 바쿠후 일본이 쇄국을 단행하고 있던 에도를 배경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나이의 이름은 네무리 교시로. 네무리(眠)는 잠, 졸음, 혹은 누에가 고치를 틀기전에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시로(狂四郎)는 미친사나이라고 해석할지, 아무튼 좀 이상한 이름이죠. 영어 제목은 Sleepy eyes of death 죽음의 졸리는 눈입니다. 이 이상한 이름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습격한 닌자 일당을 모두 베어넘긴 네무리 교시로는 선착장 객주집에 와서 기녀와 술을 마시는데 불쑥 소매치기 긴파치가 누군가 네무리 교시로를 찾더라며 그 사나이의 전갈을 가지고 옵니다. 그 사나이가 보내온 전갈에는 "내일 아침 9시 가메이도(亀戸) 청고사(清古寺) 와룡의 매화나무 아래에서, 진손(陳孫)"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한편, 이때 네무리 교시로를 습격한 6인의 닌자가 모두 당했다는 보고를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마에다 나리야스(前田斉泰)라고 하는 가가(加賀)번의 번주이자 바쿠후의 재상이었습니다. 닌자를 보내 네무리 교시로를 습격하게 한 것은 그의 실력을 테스트해본 것이었고, 교시로의 실력을 확인한 나리야스는 그의 수하에 있는 치사(千佐)를 보내 교시로를 유혹하여 편으로 만든 다음, 진손과 제니야 고헤 일당을 모두 처리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교시로를 찾아온 치사는 자신의 아버지는 가가번의 고위 관리였는데 제니야 고헤이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고, 가가번의 운명을 쥔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진손이라는 악한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그를 죽여서 자신을 지켜달라며 금 백냥을 내밉니다. 교시로는 왜 너를 키워준 번주 나리야스가 너를 지켜주지 않는가 하고 묻자, 치사는 번주가 자신의 몸을 요구하는 바람에 정절을 지키기 위해 그에세 부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교시로는 그러자 나는 금 필요없고 네 몸을 주면 하겠다는 둥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차갑게 거절합니다.

다음날 청고사를 찾은 교시로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진손을 만나게 됩니다. 중국인의 모습을 한 진손에게 당신은 당인(唐人 중국인)인가 묻자 그는 아니 하지만 13대 선조가 명에서 건너와 일본에 소림권법을 전수한 진겐힌(陳源品)이라며 그래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시로의 검과 맞대결을 하여 승부를 가리고 싶다고 하는 순간, 진손을 습격한 닌자 일당.

닌자들과 맞서 싸우며 진손은 교시로에게 매화나무의 쪽지를 보라고 하며 사라집니다. 매화 나무에 걸린 쪽지에는 "円月の砕ける波ぞ 佃島"(둥근달의 깨지는 파도 쓰쿠다섬)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이 적혀있습니다.

자신을 기다리는 치사에게 "당신은 아름다운 악마"라며 자신을 유혹하여 진손을 처리하게 하려던 음모를 폭로하며 면박을 주자 치사는 이제 탄로가 났으니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시로는 임무를 실패한 당신은 돌아가면 죽음뿐이다, 여기에 머물러라 합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당시 도쿄의 스미다강에 있었던 쓰쿠다섬으로 낚시를 갑니다.

예상대로 그곳에서 진손을 만나 교시로는 스미다 강 아래로 내려가는 비밀 터널을 따라 강 아래 비밀처소로 가는데, 그곳에서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제니야 고헤(銭屋五兵衛)라는 무역상인을 만납니다. 제니야는 자신은 나리야스를 위해 밀무역을 했는데 발각이 되자 자신을 가차없이 버린 나리야스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죽은 것으로 알리고 몸을 숨겼다가, 가가번을 멸망으로 이끌 나리야스의 서명이 들어간 밀무역 문서를 찾아 그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러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시로에게 자신과 손을 잡고 나리야스를 무너뜨리면 크게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밀무역의 문서는 태국에서 만든 푸른색의 옥으로 만든 작은 불상(벽옥불) 안에 숨겨져있고 이 위치를 아는 것은 제니야뿐입니다.

교시로는 무표정하게 어느쪽에도 가담하지않겠다고 그를 위협하는 제니야를 무시하고 이 비밀 처소를 벗어납니다. 교시로를 확보하지못하자 제니야는 숙소에 머무르던 치사를 납치해 갑니다.

그날 밤 나리야스의 처소로 잠입한 교시로는 제니야가 살아있으며 그에게 밀무역 문서가 있다며 대신 그에게 제니야에게 잡혀간 치사를 구하라고 하지만 나리야스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뗍니다. 그리고, 다음날 의무적으로 각 번의 번주가 에도에 와서 있어야 하는 참근교대를 마치고 가가번으로 돌아가는 나리야스. 그는 심복에게 교시로 역시 처단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는 휘리릭 흘러갑니다.
비밀문서을 찾고 나리야스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뒤를 따른 제니야와 그에게 고용된 진손, 제니야가 납치한 치사를 찾으러 뒤를 따르는 교시로, 그리고, 나리야스의 명으로 교시로를 뒤쫓는 이가의 닌자들. 칼싸움들이 벌어지고, 와중에 치사를 구한 교시로는 치사 어머니의 오랜 지인이었던 노 가면을 만드는 아저씨의 집에 몸을 숨깁니다. 이곳에서 치사의 출생의 비밀을 듣게되는데, 치사는 실은 나리야스의 사생아였던 것! (왠지 막장 드라마...-_-;;) 그리고, 어머니는 죽지않고 여승이 되어 바닷가 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니야와 진손의 뒤를 밟은 교시로는 그의 부하같은 소매치기 긴파치를 시켜 제니야가 숨겨뒀던 벽옥불상을 훔쳐 손에 넣고, 그 안의 문서를 치사에게 주면서 모든 사실을 알려줍니다. 치사는 이를 가지고 나리야스에게 가서 당신이 나의 아버지인데 나를 이용하고 버리려고 하다니 이제 가가번의 운명을 살리고 싶으면 내게 무릎꿇고 빌어라 제니야에게 뺏은 재물은 돌려주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빌면서 모든 약속을 하는 나리야스를 바라보면 웃는듯 우는듯하는 치사.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바닷가 절로 간 치사를 기다리는 것은 그곳에서 막 살해당한 어머니. 숨겨둔 벽옥불을 찾아든 치사에게서 벽옥불을 되찾기위해 치사의 어머니를 먼저 죽인 제니야는 이때 권총으로 치사도 쏴서 죽입니다. 분노한 교시로는 제니야를 칼로 베고....

그동안 미뤄왔던 승부를 이제 결정내자는 진손과 바닷가로 나온 교시로는 진손과 맞붙고 합을 나누던 두 사람은 교시로가 진손의 옷을 베자, 진손이 졌다 다음 기회를 다시 기다려달라며 사라집니다.


벽옥불을 들고 절벽에 선 교시로는 이것이 보물인가, 고작 돌덩어리인데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란 없는 것인가 그러면서 절벽아래 파도에 벽옥불을 던져버리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좀 길어졌네요. 오늘은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다음편으로 넘기겠습니다.

영화 자체는 재미있다 없다...라고 하기 좀 난감한데 제작이 63년이니 그 기준으로 봐야겠지요....

이 영화 시리즈는 60년대에 찬바라 영화라고 하는 칼싸움 검객 영화의 빅 히트작품이었습니다. 약간 일본판 제임스본드같은 시리즈라고 할까요... 제가 소개드린 이 영화 한편 자체는 실은 처음에는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만, 이후 이 영화 시리즈에 원작 소설에 차용되었던 18-19세기 동아시아에 있었던 여러가지 실제 사건들이 소재로 사용되면서 그야말로 찬바라 검객영화의 대표작 시리즈로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드린 내용 중의 등장인물에서 진손, 제니야 고헤 두사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명이 다시 다음 문을 열어줄 열쇠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이 영화 시리즈의 특색은 영화의 주인공 네무리 교시로가 일반적인 정의의 사도 히어로가 아니라 그야말로 제맘대로 누구의 편도 들지않는 차가운 안티히어로라는 점입니다. 그가 시리즈 내내 보여주는 차가운 냉소와 허무주의가 이치가와 라이조가 보여주는 가부키 전통의 검술 장면과 어울려 상당히 '나쁜 남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이 캐릭터 역시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의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리하여.... 다음편에서는 먼저 도대체 찬바라 영화가 뭔지, 그리고, 이치가와 라이조라는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고현학: 찬바라와 다치마와리"로 이어집니다.

**포스터는 위키피디아가 출전이고, 촬영장 사진은 http://blogs.yahoo.co.jp/tiggogawa66/51367084.html, 그외 스틸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들입니다.
그리고, 맛보기로 당시의 극장 예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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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迪倫齋雜想 : 고현학: 찬바라와 다치마와리 2015-07-06 12:58:21 #

    ... 죽음의 졸리는 눈, 네무리 교시로 살법첩(眠狂四郎殺法帖)에서 이어서 갑니다. 다들 알다시피 고고학이라는 학문은 고대(古)를 연구하는(考)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면 현대를 연구하는 학문은 고현학(考現 ... more

덧글

  • 2015/07/05 16: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7/06 13:1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남중생 2015/07/06 00:25 # 답글

    밀무역 문서가 태국 불상에 숨겨져있다는 설정은 좀 흥미롭네요. "쇠사슬을 끊어라"(1971)라는 만주웨스턴 영화가 있는데, 장르가 말그대로 만주웨스턴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마적, 일본군 등의 인물군상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 이름이 적힌 문서(아마 상해임시정부 요원 명단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가 티벳 불상에 숨겨져있어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걸 찾아서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에도시대의 태국 불상(물론 VOC를 통해서 태국과의 직간접 교류는 있었겠지만)과 마찬가지로 "쇠사슬을 끊어라"의 티벳불상도 뜬금없다는 평을 듣곤 하던데, 제작연대도 비슷한 만큼 어떤 관련이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아, 참고로 "쇠사슬을 끊어라"는 김지운 감독의 2008년도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원작이라고 여겨지는 영화입니다.
  • 남중생 2015/07/06 00:24 #

    흠, 심지어 트레일러의 영어 자막에서는 부제가 "The Chinese Jade"라고 뜨네요. 기기묘묘
  • 迪倫 2015/07/06 13:16 #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만주웨스턴은 이번에 무리지만 에도의 태국불상은 리스트에 있습니다^^
  • 빛의제일 2015/07/06 00:21 # 답글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인지요? 어떤 사람들이 나올까 기대됩니다.
  • 迪倫 2015/07/06 13:19 #

    쓰잘데없는 고현학으로 이번 시리즈는 채워볼 예정입니다 ㅋㅋㅋㅋ
  • 이종혁 2015/07/06 23:16 # 삭제 답글

    이런.. 오마쥬 일까요? ^^

    시험 때마다 신작이 출시되어 학생들의 성적을 갉아 먹었던 추억의 게임,"사무라이 쇼다운"의 캐릭터

    센료 쿄시로가 떠오릅니다. 게임에서도 생업이 가부키 배우로 나와서 흥미 로웠습니다.

    캐릭터 구성원도 실존했던 칼잡이나 신화를 많이 써먹기도 했지만 (카구레 키리스탄의 아마쿠사 라던지)
  • 迪倫 2015/07/07 07:33 #

    오, 그런 캐릭터가 있었군요... 제가 게임에 약해서...
    교시로라는 이름은 다분히 네무리 교시로를 염두에 둔것으로 보입니다. 네무리 교시로라는 캐릭터가 워낙 대표적인 것이라서요. 가쿠레 기리시탄은 흐흐흐 순서 기다리고 대기 중입니다.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올 예정입니다. ^^
  • 밥과술 2015/07/07 17:53 # 답글

    컴백포스팅은 영화로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본 영화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가겠습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나카무라 다마오입니다. 저는 이 배우가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 엄앵란씨하고 닮았는지 신기합니다. 두분다 만년에 에, 이사람이 젊어서는 미인이었단 말이야? 하고 젊은이들이 신기해할만큼 후덕한 할머니 인상이지요. 껄껄껄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예능프로그램 여러곳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사람다 유명한 남편덕에 속을 많이 썩여가며 살아왔지요. 한쪽은 신성일, 한쪽은 가츠 신타로 입니다. 사업으로 재산날려먹고 바람피우고 감옥가고(한사람은 수뢰 한사람은 마약)... 사고뭉치 스타를 남편으로 두고 살며 해탈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주는 두 할머니 화이팅입니다. (가츠신타로는 외팔이와 맹인의 맹인(자토이치)역으로 아주 유명한데 지금은 고인입니다)
  • 迪倫 2015/07/09 12:05 #

    오! 안그래도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생각했는데, 엄앵란씨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앓이를 하였다니 참.... 요즘 예능에 출연하시는 것은 저는 잘 몰랐습니다만, 이 당시 영화에서는 참 고운 분이셨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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