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6년, 이선달의 북국 모험기 by 迪倫

매와 해달, 그리고 건너온 사람들(渡黨)에서 예고한 부산 싸나희의 에조치 모험담을 해설을 조금 곁들여 들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래의 글을 읽어봐주십시오:
이 선달(李先達)은 이름은 지항(志恒), 자(字)는 무경(茂卿)이다. 선조는 영천(永川) 출신의 학자로 동래부(東萊府)에 살아왔다. 을묘년(註: 아래 내용을 읽어주세요) 별시(別試)에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정사년 여름에 수문장(守門將)으로 천거를 받았었다. 병으로 취재(取才)에 응하지 못했고, 수어청(守禦廳)의 군관(軍官)에 속해 있다가, 이어 본청의 정식 장관(將官)으로 임명되어, 자급(資級) 6품(品)에 이르렀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상기(喪期)를 마쳤다. 그 뒤 병자년(註: 아래를 읽어주십시오) 봄에, 영해(寧海)에 왕래할 일이 있었던 차에, 부산포(釜山浦) 사람 공철(孔哲)ㆍ김백선(金白善)이, ‘읍에 사는 사람 김여방(金汝芳)과 어물(魚物) 흥판(興販 물건을 한 번에 많이 흥정하여 매매하는 일)을 같이 하는데,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을 다니려면 그곳을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서 말의 쌀과 돈 두 냥(兩)을 가지고 뱃머리에 이르러 노복과 말을 돌려보냈다.


오늘 주인공 이선달입니다. 이름을 지항이라고 하는 무관 이선달은 병자년 봄에 고향 부산에서 경북 지금 영덕군의 북부에 해당하는 영해도호부에 일이 있어 마침 동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는 공철과 김백선, 김여방 등의 배에 승선을 합니다. 그리고, 이리하여 1년에 가까운 멀고 먼 모험이 시작됩니다. 이 배가 문득 풍랑을 맞아 표류하다가 멀리 에조치의 북쪽까지 떠내려갑니다. 이곳에서 에조인 즉 아이누인들의 도움을 받아 남으로 내려가다가 마쓰마에번에서 파견한 관리를 만나 마쓰마에로 이송되고 이후 일본 혼슈와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험의 기록을 부산으로 다시 돌아온 이듬해 “표주록”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합니다.

그런데 먼저 확인을 하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위의 번역문은 고전번역원 제공 국역 표주록의 서문입니다. 기년인 병자년에는 고전번역원의 주로 “병자년(1756, 영조 32)”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실은 이제부터 들려드리는 이야기를 혹시 인터넷에서 검색하시면 대단히 많은 기사들이 “주선후기 영조시기 이지항”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 1756년의 기년은 근거가 없는 잘못된 기년입니다. 대신 이지항의 표주록을 연구한 허경진 선생과 이후 최근의 연구논문들에는 한갑자가 앞선 1696년 병자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은 표주록에 상응하는 일본측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일본측의 기록 “漂流朝鮮人李先達呈辭”은 元禄九年丙子(겐로쿠 9년 병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겐로쿠 9년이 1696년입니다. 또한, 위의 서문에 이지항이 무과에 급제한 을묘년을 “을묘(1735, 영조 11)”라고 하고 있지만, 이지항을 실제 무과 급제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면 숙종 1년 1675년 을묘 증광시에 급제한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이지항의 생년 역시 인조 25년 1647년입니다. 이야기의 시기인 1696년 현재 이지항은 49살입니다. 그러니, 영조대 1756년의 이지항으로 기록된 것은 미안하지만 모두 오류입니다.

자, 부산에서 영덕의 영해도호부로 출발한 바로 그날, 18세기로 넘어가기 직전 17세기말 숙종 22년 1696년 4월 13일로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선달의 글솜씨가 실은 상당히 괜찮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이선달의 생생한 증언을 그대로 옮기고 설명만 주(註)를 붙이겠습니다. 이미 밝힌대로 영조대의 기년은 혼동되니까 아예 제가 지워버리고 진행하겠습니다.

병자년 4월 13일
순풍을 타고 발선(發船)했다. 사공 김자복(金自福), 격군(格軍) 김귀동(金貴同)ㆍ김북실(金北實)ㆍ김한남(金漢男)은 다 울산(蔚山)의 서낭당[城隍堂] 마을에 사는 해부(海夫)들이었다. 여덟 사람은 한 배에 타고서 좌해(左海 동해)로 돌아 항해했다. 풍세(風勢)가 순하지 않기에 포(浦)마다 들러 정박했다.
迪倫註: 조선후기 동해안을 따라 포구와 포구를 오가며 상품을 사서 파는 형태의 상업이 성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 소개한 사공과 해부들 이외에 서문에 소개한 김백선은 첨지로 나이가 많고 왜어를 할 수 있었고, 공철(혹은 공중철)과 김여방은 둘다 하급 무관 비장인데 상업을 한다고 후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4월 28일
바람이 조금 순하게 불기에 행선(行船)하였다. 신시(申時)쯤에 횡풍(橫風 가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지고 부서져, 거의 빠지게 되었다. 노를 대신 질러 비록 물속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지만 횡풍으로 대해(大海)에 떠밀려 밤새도록 표류(漂流)했다.
迪倫註: 15일이 지날 무렵 심한 풍랑을 만납니다. 아래는 조선 후기 각종 군선과 일반선을 설명한 일러스트북인 “각선도본(各船圖本)”에 나오는 조선/조운선의 모습입니다. 조선/조운선은 기본적으로 상업용 화물선입니다. 이선달 일행의 배로 짐을 사서 싣고 팔고 사고 하려면 거의 유사한 형태의 배를 탔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각선도본은 한선(韓船) 연구의 베이스인 책입니다.

풍랑을 만나 가는 동안 증류수를 만들어 먹는다든지 물개가 배에 다가와 선원들이 잡으려는 것을 말리는 날짜의 기록들이 좀더 있는데, 풍랑을 만나고 9일째 즈음에는 흥미로운 대화가 진행이 됩니다.


9일째(5월 8일인 듯하나 미상)
초경(初更)쯤에 서북풍(西北風)이 크게 불어 우리는 큰 바다 복판에서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 어느 날에나 정박할 수가 있는가를 점쳐 보았더니, 풍뢰익괘(風雷益卦 64괘의 하나)를 얻었는데, 복덕이 괘신(卦身)에 닿고, 세효가 재효를 띠었다. 복서(卜書)에 ‘자효(子爻 즉 복덕효를 말함)가 왕성하고 재효가 분명하면, 모름지기 길(吉)하고 이익이 있으리라.’ 하였다고 달래니, 사람들이 다 답답한 근심을 조금 풀었다. 바람은 3경쯤에 이르러 그쳤다가, 동방이 밝아지며, 곧 이어 서풍이 불어왔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일본(日本) 지도를 본 일이 있었는데, 동쪽은 다 육지였다. 또 통신사(通信使)를 배행(陪行)하여 왕래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 중간에 대판성(大坂城)이 있어, 황제(皇帝)라는 자가 있고, 동북방 강호(江戶)라는 곳에는 관백(關白)이 있다. 대판성에서 육지로만 이어져 강호까지 가는 데는 16~17일이 걸린다.’ 하였다. 이제 우리는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일 것이니, 이는 하늘이 도운 요행이다.” 하니, 선인(船人)들은 다 말하기를, “끝내 육지를 못 만나니, 이건 틀림없이 허허(虛虛)한 큰 바다와 통해 있습니다.” 하고는, 다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밤 2경(更)쯤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파도가 치솟아 뱃전에 부딪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자, 모두들 다 엎드려 축수(祝手)하였는데, 꼭 죽는 것만 같았다. 5경이 되어서야 큰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가 다시 서풍이 불어, 인묘방(寅卯方 동북동쪽과 동쪽)으로 향해 갔다.
迪倫註: 이선달은 부산에서 통신사 일행이었던 이들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기초로 동으로 계속 가면 일본이 나와 살 수 있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시 3일 뒤, 마침내…

5월 12일
미시(未時)쯤에, 전로(前路)에 태산(泰山)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어 위에 쌓인 눈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배는 동요하여 안정되지 않고, 주림과 갈증으로 기력이 없어진데다가, 파도가 배를 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해져서 거의 뒤집혀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일시에 배를 움직이며, 작은 두 개의 통으로 물을 퍼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옷이 다 물에 젖어 추워 덜덜 떨었다. 겨우 물이 얕은 굽이진 곳을 찾아 정박하고는 비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아침에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중천(中天)에 솟아 있는데, 중턱 이상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고 그 아래로는 초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다만 산기슭 밑에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가 보일 뿐이었다. 가서 그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고기[魚]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고기는 거의 대구(大口)ㆍ청어(靑魚)였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기타 잡어(雜魚)는 건포를 만들려고 많이 매달아 놓았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잔뜩 마셔서 배를 북처럼 해가지고는 곤히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그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배에서 내려 비옷을 덮고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지냈다
迪倫註: 마침내 육지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동해 한가운데 꼭대기가 눈으로 뒤덮힌 높은 산이 있었나요? 후지산인가? 이 곳은 홋카이도 북단의 리시리도(利尻島)입니다. 리시리도는 이전 포스팅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서수라에서 후지산을 봤느니 어쩌느니 할때 후지산이 아니라 리시리산이라고 주장했다는 바로 그 섬입니다. 아래는 리시리섬의 모습입니다. (출처는 위키피디아)

실은 일본측 기록에는 리시리도 바로 서쪽의 레분도(礼文島)에 먼저 도착한 다음 리시리도를 거쳐 홋카이도 북쪽 소야(宗谷)로 건너간 것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다음날 (5/13로 추정)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迪倫註: 이리하여 현재 밝혀진 것으로는 레분도에서 처음으로 에조인/아이누인을 만나게 됩니다. 아래는 1904년 촬영으로 알려진 무장한 아이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연장을 살펴보니, 별로 창검(鎗劍)이나 예리한 칼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조그마한 칼 한 자루만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염막(鹽幕)과 같고, 은밀한 곳이란 없었다. 그들이 저장하고 있는 물건은 말린 물고기, 익힌 복어(鰒魚), 유피(油皮)의 옷들에 불과했고, 그 밖의 연장으로는 낫, 도끼, 반 발(1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 정도의 크기로 된 나무활[木弓], 사슴의 뿔로 만든 화살촉을 단 한 자[尺] 정도 길이의 나무화살 등뿐이었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남녀가 혹은 나무 껍질로 짠 누른 베의 긴 옷을 입었고, 혹은 곰 가죽과 여우 가죽 또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입었다. 그들의 머리털은 겨우 한 치[寸] 남짓하였고, 수염은 다 매었는데, 혹은 한 자[尺] 혹은 한 발이나 되었다. 귀에는 큰 은고리를 달았고, 몸에는 검은 털이 나 있었다. 눈자위는 모두 희고, 남녀가 신과 버선을 신지 않고 있었다. 형용(形容)은 남녀가 모두 같았는데,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이것으로 남녀를 분별할 뿐이었다. 60세 가량의 늙은이가 목에다 푸른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풀기를 청하여 그것을 보니, 수염이 매우 길어서 귀찮아, 주머니를 만들어 그 안에다 수염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잡아 재니, 한 발 반 남짓이나 되었다.
迪倫註: 에조인에 대한 묘사가 상세합니다. 처음에 패닉할 정도로 무서웠던 용모에 비해 실은 대단히 공손하여 놀란 느낌입니다. 실은 이들 에조인이 조선인들을 일본인들과 같은 사람들로 간주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17세기말에는 이미 상당 부분 야마토계 일본인들과 에조인들이 주종관계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글은 다시 이어져 레분도에서 리시리도로, 다시 홋카이도의 소야로 넘어가는 여정이 이어져 있습니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나는,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우리들은 다 굶주린 채로 그곳에서 잤다. 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갈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멀리 바라보니, 육지가 동북쪽에 뚜렷이 보였다. 선인들에게 청해 이르기를, “이곳에서는 밥을 주지 않고, 배에는 쌀이 떨어졌으니, 꼭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저곳으로 가 봐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돌아갈 길도 찾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하였다. 선인들은 내 말을 믿고, 일시에 배를 저어,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가 정박하였더니, 거기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땅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다만 제모곡(諸毛谷)이라 하였다.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시늉을 하니, 그들은 또 작은 그릇에 담은 어탕을 줄 뿐이었다. 순풍을 타고 30여 리를 옮아 가, 어느 한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 이름을 물으니 점모곡(占毛谷)이라 하였다. 그들의 말은 이같았으나, 그들이 무슨 말로 알아듣고 대답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청했더니, 삶아 먹도록 많이 주었다. 그곳에는 벚나무 껍질이 많이 있어서, 그것으로 횃불로 사용하니, 불꽃이 아주 밝았다. 산모퉁이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간에 긴 육지가 있는데 산이 창공에 솟아 있어, 그 지세는 큰 육지같이 보였다. 그곳을 가리켜 물었더니, 다만 지곡(至谷)이라고만 했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불과 30여 리밖에 되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건너갔는데, 종일토록 댈 수가 없었다. 바닷길의 원근(遠近)에 대한 짐작은 육로(陸路)와는 달랐다. 그곳에 배를 대니, 역시 앞에 나온 무리들과 같아서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물고기만 먹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서 먹던 토사자환(兎絲子丸) 반 제(劑)를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왔으나, 잊고 내 먹지를 않았는데, 그것을 꺼내어 선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물로 넘기니, 기갈(飢渴)증이 다소 풀렸다. 그대로 그곳에 유숙하였다. 지명을 물으니, 소유아(小有我)라고 하였다.
迪倫註: 소유야(小有我)가 지금의 소야(宗谷)입니다. 제모곡, 점모곡, 지곡은 레분도에서 리시리도 사이의 여정에 있던 아이누어 지명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로 기록상의 날짜는 분리되어있지만 내용상 5/13일의 내용이 이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미목(尾木)을 갖추고 건어(乾魚)를 얻고, 물을 길어 배에 싣고서 표류하여 온 방향으로 똑바로 가, 요행히 우리의 땅에 도달한다면 살 것이고, 바다에서 역풍(逆風)을 만나, 이리저리 표류하여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하게 될 것이다.”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굶주린 사람들을 데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한 큰 참나무를 찍어서 미목(尾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꽂을 구멍이 있는 널판을 견고하게 만들 생각이 나지 않아, 배로 가져 가게 하고는, 나는 혼자 뒤에 처져서는 사방을 둘러보고 왔더니, 시장기가 아주 심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곳곳에서 앉아 쉬었다. 마침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水麪] 같았다. 입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한 그릇을 주었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의이(薏苡 율무, 식용 또는 약용으로 포아풀과에 속하는 1년초)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 모양을 구해 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芭蕉)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堯老和那)라 했다. 곧 선인을 불러 그 풀뿌리를 보이고, 또 공중철(孔仲哲)을 불러 죽의 맛을 말해 주고, 한 그릇을 얻어서 두 사람에게 먹였더니, 모두 속이 편하고 배부르다고 말하였다. 다른 선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얻어먹고자 했다. 나는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여행용 그릇 일부를 주고, 그 풀뿌리를 가리키어 얻어와서는 죽을 쑤어 많이 먹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했다. 곧 선인 김한남이 그릇을 가지고 다른 선인들과 함께 일시에 가서 그릇을 주니, 그 무리들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여러 가지로 가리켜 얻겠다는 시늉을 지어 보이니, 비록 자세히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풀뿌리를 가리키면서 시끄럽게 지껄였기 때문에 헤아려 알아들었다. 선인들을 이끌고 산기슭으로 가는데, 1후(帿)의 거리쯤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함께 따라가 보니, 그 풀이 많이 있었다. 그것을 캐어다가 죽을 쑤어 각기 나누어 먹으니, 다 배부르고 속이 편하였다. 닷새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늘 많이 캐어다가 죽을 쑤어 포식했다. 배의 기구 만들기를 마치자, 생기(生氣)가 다소 돌았다. 한편으로는 풀뿌리를 캐고, 한편으로는 어물(魚物)의 남는 것을 구했다.
迪倫註: 요로화나는 아이누인들이 오래 식용으로 사용해온 오오바유리(オオウバユリ, 大姥百合, Cardiocrinum cordatum var. glehnii )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구근의 사진입니다. 곡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참 난감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보니, 평원(平原)과 광야(廣野)는 옥토(沃土) 아님이 없었고, 흐르는 냇물, 두터운 둑이 다 논으로 만들 수가 있었는데, 한 자[尺]도 갈지 않았다. 면죽(綿竹)이 우거지고 갖가지 풀과 큰 나무 숲에 살쾡이[狸]ㆍ수달[獺]ㆍ담비[貂]ㆍ토끼ㆍ여우ㆍ곰 등의 짐승이 무수히 있었다. 육지에는 길이라곤 없고, 또 죽은 사람을 묻은 묘도 없었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으니,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또 어떤 곳에 이르니, 마침 날씨는 바람이 불고 추웠는데, 하나는 곰 가죽의 털옷을 입었고, 하나는 여우 가죽을 입었으며, 둘은 담비 가죽의 털옷을 입은 네 사람이 바다와 하수(河水)가 통하는 어구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7~8발[把]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의 실[木皮絲]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松魚)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雜魚)가 무수했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중에서 한 자[尺]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의 유의(襦衣)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꾸고자 하는 것인줄 알고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迪倫註: 이 부분의 묘사는 마치 유럽인이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서 기록한 것들과 너무 유사합니다. 문명 대 자연의 대조는 어쩌면 더 오래된 패러다임일지도 모릅니다. 바다와 강의 접점에서 한자가 넘는 송어를 잡고 있는데, 이 송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별도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다음날(다음날이라는 기록이 위의 5월 13일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그 이후의 며칠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5월 중순의 기록으로 보면 됩니다)
떼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우리 옷과 바꾸자고 하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선인들은 혹은 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하였는데 나도 가지고 있던 옷을 다 주고, 담비 갖옷 아홉 가지와 가려서 바꾸었다. 갓끈에 단 수정(水晶) 하나 하나와 바꾸기를 청하기에, 나는 수정 두 알씩을 가지고, 담비 가죽 두석 장과 바꾸었더니, 그 가죽의 수는 60장이나 되었다. 또 허리에 두른 옥(玉)을 가리키면서, 붉은 가죽 일곱 장과 바꾸기를 청하고, 또 여우 가죽 열다섯 장을 가지고는 의복과 바꾸기를 청하기에, 가죽의 품질이 크고 두터워, 북피(北皮 함경북도 지방에서 나는 가죽)의 모양과 같아서 나는 허리에 찬 옥을 끌러 주고, 또 우리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식기와 물에 젖은 면포(綿布) 홑이불 여섯 벌, 보자기 두 장을 다 주고 바꾸었는데, 수달피 석 장을 더 가져왔다. 그 물건은 아주 커서, 한 장으로 털부채를 만들면 네 자루쯤 만들 수가 있다 하였다.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石]이 넘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船頭)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남을 향해 가라는 것인데 실로 갈 길을 몰라, 마음이 답답하고 낙심을 하고 있을 즈음에, 갑자기 북풍이 불어 왔다. 달리 시험해 볼 방도가 없고, 다만 서쪽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쪽은 무변대해(無邊大海)이고 동쪽으로는 육지여서 동편만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떠났다. 순풍을 만날 것 같으면, 배의 기구가 다 갖추어져서 돛을 가득 달아 빨리 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하고 노를 저어 가다가,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인가를 찾아 들어가 보면 다 역시 그들 무리였다. 하루도 머무름이 없이 장장(長長)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迪倫註: 에조인들이 일러준 ‘마즈마이’라는 지명은 짐작하듯이 “마쓰마에”(松前)입니다. 홋카이도의 서쪽 해안을 타고 항해를 계속하여....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갔지만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도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즈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여전히 동쪽의 육지를 따라 남쪽을 향해서 육지가 끊어질 때까지 갈 생각으로 갔다. 배가 몹시 고프고 목이 마르면, 혹 하륙(下陸)하여 전에 죽을 쑤어 먹던 풀뿌리를 찾았으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물만 먹어서 치근(齒根)이 솟아 나오고, 아파서 다들 고통을 느꼈다.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아주 같지 않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우리 배의 김백선(金白善)이라는 자는 일본어를 조금 알아 그들과 말을 통해 보았더니, 간혹 아는 말도 있었고, 비록 피차간 완전히 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남촌부(南村府)의 왜인들이었고, 금(金)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가옥(假屋)을 크게 짓고, 50여 명의 왜인을 거느리고, 거기서 앞으로 며칠 가야 하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중의 장왜(將倭)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근방에 표류하여 굶주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들을 보내어 찾아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백미(白米) 서 말[斗], 잎담배 다섯 뭉치, 장ㆍ소금 등을 전해 주었다. 또 봉한 편지를 전해 주기에 뜯어 보니, 모두 일본 언해(諺解)여서 그 사연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글월의 밑에 다만 한자(漢字)로 ‘송전인 신곡 십랑병위(松前人新谷十郞兵衞)’라고만 씌어져 있었다. 심중은 다소 기쁘고 마치 꿈을 꾸다가 놀란 듯하였다.
곧 두 왜인과 같이 배를 타고 한편으로는 밥을 짓고 소금과 장으로 국을 끓여, 그릇에 가득가득 담아 나누어 주었더니, 일행은 다 먹고는 곤해서 누워 있었다. 50여 리를 가니, 날이 저물어 포구에 정박했다. 거기에는 인가 일곱 채가 시냇가에 벌여 있었다. 배에서 내려 왜인들과 같이 그 무리들의 집에서 잤다. 나는 조용히 김백선을 시켜서 그 국명(國名)과 지명(地名)을 상세히 묻게 했더니 그가 말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종이에 붓으로 일본 글자로 써서 묻게 했더니, 국명은 ‘하이(蝦夷)’이고, 지명은 ‘계서우(溪西隅)’라고 했다. 우리는 5월 초 9일부터 밥을 먹지 못했다가, 29일에서야 비로소 밥맛을 보았으니, 배가 고파도 밥을 맛보지 못하기를 28일까지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迪倫註: 일본측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5월 20일로 추정됩니다. 이곳은 일본측 기록에 羽保呂(우보려)라고 되어있는데 지금의 羽幌(하포로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장소를 담당한 마쓰마에번의 관리 "신다니주로베(新谷十郞兵衞)"를 만나 이제 마쓰마에로 넘어갑니다.)

새벽에 발선(發船)했다. 약 70~80리쯤 가니, 해안에 초가(草家)가 많이 있었다. 포구에 정박하니, 시내가 계서우(溪西隅)에서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들어가니, 30여 칸의 초가에는 각각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복과 기명(器皿), 기타 집물(什物)을 늘어놓은 모양은 부산(釜山)의 관왜(館倭)의 거처와 같았다. 그중의 우두머리 왜인[頭倭] 한 사람이 맞아들여 대좌(對坐)하고서는, 생선과 술로 대접을 잘하였다. 속으로 기뻐하고 이제는 살 길을 얻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 왜인이 한 장의 글을 써 보이기를, “나는 송전(松前) 봉행(奉行)의 사람으로 이름을 신곡 십랑병위(新谷十郞兵衞)라 합니다. 모집한 군인을 이끌고 송전 태수(松前太守)의 명을 받아, 여기에 집을 짓고 머물면서 금을 캐고 있은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 3년 만에 한 번씩 송전부(松前府)에 세금으로 황금(黃金) 50냥(兩)을 바칩니다.”하고, 다시 글을 써서 보이기를, “처음 정박했던 곳은 어디었습니까?”하기에, 나는 글로 써서 대답하기를,“처음 정박했던 곳은, 산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는 듯하고, 바다를 자꾸 건너도 독산(獨山)만이 해중(海中)에 솟아 있었는데, 그 끝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람은 제모곡(諸毛谷)이라 했습니다.”
하였다.
제모곡이라는 지명을 김백선으로 하여금 직접 발음해서 들려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치하하기를, “하이(蝦夷)의 지경입니다. 여기서 2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송전에서는 합계 3천 6백 리나 됩니다. 이 나라는 사방이 다 바다이고, 우리나라의 아주 먼 북방의 지역입니다. 해포(海浦)가 서로 이어져 있고, 땅의 넓이는 어느 곳은 4백여 리가 되고, 어느 곳은 7백여 리가 됩니다. 길이는 3천 7백~3천 8백 리나, 혹 4천여 리도 됩니다. 살고 있는 무리들에게는 원래 다스리는 왕이 없고, 또 태수(太守)도 없습니다. 문자(文字)를 모르고 농경(農耕)도 하지 않으며 다만 해산물을 업(業)으로 삼고, 어탕(魚湯)만을 먹어 농사 짓는 이치를 모릅니다. 산에 올라 여우나 곰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서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아무렇게나 짜 옷을 지어 입습니다. 일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이 없고, 다만 송전부(松前府)에 익힌 전복[熟鰒]을 매년 만여 동(同 양의 단위. 조기ㆍ비웃 등은 2천 마리를 1동으로 함)만을 바치고 있습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각 마을마다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 송전 태수의 앞에 나가 배알합니다. 그러나 언어가 같지 않고 금수와 같아서, 일이 있으면 송전은 하이어(蝦夷語) 통사(通事)를 별도로 두어, 그 말을 익히게 하며, 매년 한 번씩 송전에서 시자(侍者)를 보내어 그들의 나쁜 바가 있는가를 살피어 다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또 그들은 마을 안에 나이가 많은 자를 그 수장(首長)으로 정해서는 마을 안에 나쁜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잡아내어, 그들끼리 그의 죄악의 경중을 논해서 손바닥 모양으로 만든 쇠매[鐵鞭]로 등을 서너 번 때리고 그치고, 더욱 죄악이 중한 자면 다섯 번을 때리고 그칩니다. 그 밖에 아주 심한 자면, 송전 태수의 앞으로 잡아다 놓고 죄를 논하여 알리고 참수(斬首)케 합니다. 그 무리들의 성질은 본래 억세고 포악하여, 신이나 버선을 신지 않은 채 산곡(山谷)이나 우거진 숲속을 돌아다닐 수가 있으며, 가시덩굴을 밟고 넘어 높은 언덕 위에서 여우나 곰을 달려가 쏘아 잡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서 바다에서 큰 고래를 찔러 잡고, 눈과 추위를 참아 습한 땅 위에서 자도 병에 걸리지 않으니, 실로 금수와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옛날 남방 사람의 상선(商船)이 그곳에 표류되었는데, 이 무리들은 선인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어, 송전에서는 그 모살(謀殺)했던 무리들을 적발해서 부모ㆍ처자ㆍ족당(族黨)들을 불에 태워 죽였는데, 근래에는 사람 죽이는 짓은 없어진 듯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그곳으로 표류했다가 빠져 나올 수가 있었으니, 복 받은 분이라 할 만합니다. 또 들으니, 당신께서 처음 정박했던 곳의 외방(外方)에 별도로 갈악도(羯惡島)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땅인지 모르지만, 그곳의 사람은 키가 8~9척(尺)이나 되고, 얼굴ㆍ눈ㆍ입ㆍ코가 모두 하이족(族)과 같고, 모발(毛髮)은 길지 않고 그 색깔은 다 붉으며, 창으로 찌르기를 잘 합니다. 혹간 하이족(族)이나 일본인이 그곳으로 표류를 하면, 다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고 가끔 살아 도망쳐 온 자들이 전해 줍니다. 만일 며칠만 더 표류했더라면, 더욱 무섭고 위험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면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도운 것이어서, 그대는 꼭 장수(長壽)할 분입니다.” 하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술과 밥을 후하게 먹여 주었다.

迪倫註: 하포로는 나중에 다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마쓰마에번의 영역 너머 에조치에 존재하던 일본인들의 임시 체류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이 지역들은 영토의 개념이라기보다 점으로 이어진 곳입니다. 후반부에 신다니주로베가 설명한 하이족보다 더 흉악하다는 갈악도는 唐渡之嶋(가라토노시마) 즉 나중의 가라후토 또는 지금 사할린을 의미합니다. 사할린 남부에는 아직도 아무르강 하류의 청나라와 커넥션이 있는 길리악족이나 사할린 아이누족이 남에서 올라가고 있던 일본 세력과 무관하게 아직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중간의 일부 기록은 생략합니다. 바로 7월 1일 마쓰마에로 출발한 날 일기의 일부만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7월 1일
발선(發船)하여 일시에 송전 태수를 알현하기 위해 돌아갔다. 나는 배에 있는 동안, 글을 써 보여주며 내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말과 물정을 하이어 통사에게 물었다. “하이족들이 ‘마즈마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오?” “송전(마쯔마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앙그랍에는 무엇이오?” “평안(平安)이라는 말입니다.” “‘빌기의’는 무엇이오?”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악기’는 무엇이오?” “물[水]입니다.” “‘아비’는 무엇이오?” “불[火]입니다.” 이 말들을 왜어와 견주어 보니, 아주 딴판으로 달랐다.
오랫동안 표류하는 배에서 지내고, 또 들판에서 잠을 자면서 뜨거운 열에 삶아지고 장기(瘴氣)의 엄습을 받았고, 기갈(飢渴)증으로 몸이 상해진데다가, 밤이면 모기에게 물리고, 또 벼룩과 이에 뜯기는 괴로움을 당해서 기력이 다 빠졌다. 밤에는 해양(海洋)의 중류(中流)에서 가면(假眠)하고 낮에 순풍을 만나면, 해안(海岸)을 따라 항해하고, 만일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포구(浦口)에 배를 정박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박하는 곳에 비록 인가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 하이의 무리들이어서 그 집의 습기(濕氣)와 몰려드는 벼룩 때문에 배 위만 못하였다. 나흘을 가서는 역풍(逆風)을 만나 포구에 정박하여 머물렀다. 장사하는 왜의 배가 먼저 그곳에 와 있었다. 상왜(商倭) 30여 인 중의 두왜(頭倭) 한 사람이 와서 굴금선(堀金船 금을 캐는 배, 즉 필자 등 일행이 타고 있는 배를 말함)을 맞이하는데, 여러 왜인이 상선의 두왜를 향하여, 모두 마루[床] 밑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고 그들의 사정을 고했다. 오직 십랑병위(十郞兵衞)만이 마루에 올라가 같이 읍(揖)하였다. 같이 앉기를 청해서는 공손히 술과 생선을 내어 와 후히 대접하였다. 글로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영목호차병위(鈴木戶次兵衞)’라 했다. 십랑병위가 나의 시(詩) 짓는 재주를 말하니, 그 왜인이 시 지어 주기를 아주 간절하게 청하였다. 곧 칠언소시(七言小詩)를 지어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를 올리고는 재삼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것은 왜인들이 시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역풍이 연달아 불므로 그곳에서 머문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어느 날 밤에는 배 위에서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지난날과 같이 내 집에 있으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로하느라고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내는데, 평소와 꼭 같게 느껴졌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다음날에는 순풍을 만나서 해안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사흘이 지난 뒤, 한 큰 바다를 건너서 한 곳에 이르렀는데, 석장포(石將浦)라 불렀고, 그 바다는 하이국(蝦夷國)과 분계(分界)가 되는 바다였다.
迪倫註: 석장포(石將浦)를 이지항은 하이국과 마쓰마에번의 분계가 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석장포는 발음으로 유추하여 당시의 샤코탄(尺丹, 지금의 積丹)으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이시카리(石狩)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습니다. 저는 이시카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한표를 던졌습니다.
7월 23일
송전부(松前府)의 북쪽 백여 리 밖에 도달했다. 지명은 ‘예사치(曳沙峙)’라 했다. 그곳 큰 마을 중에는 수변장(守邊將) 한 사람이 있는데, 큰 관사(官舍)를 짓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존중을 받았다. 백성이 5백여 호 거주하는데, 시장에는 물산(物產)을 벌여 놓았고 남녀의 의복은 극히 화려하고 묘했으며, 인물들은 영리하고 여자들은 아름다웠다. 구경꾼들이 양쪽 길가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서 다 좋아했다. 변장(邊將)은 풍성하게 차려 놓고 나를 맞아 공손히 절하였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과 기이(奇異)한 찬을 시회(蒔 초두변+繪)의 소반에다 낭자하게 벌여 놓고 화자배(花磁盃)로 제백주(諸白酒)를 잔질하며 무수히 마셨다. (후략)

迪倫註: 일행이 이제 도착한 곳은 지금의 에사시(江差)입니다. 에사시는 근세 마쓰마에에 대단히 중요한 지역입니다. 나중에 별도로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7월 27일 일행은 마쓰마에 도착하여 7월 28일 번주를 만나고 한시를 잘 짓는 이선달은 특히 번주의 각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한달 뒤인 8월 말일 마쓰마에를 떠나 쓰가루, 난부, 센다이, 오슈, 아오모리 등을 거쳐 9월 27일 에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해를 넘겨 3월 5일 부산포에 도착하면서 왜관을 통해 부산진에 도착,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이 기록은 끝이 납니다.

제가 일단 전 내용을 전제하기는 무리라서 에조치에서 에조인들과 조우한 것은 거의 전체를 인용하고 대신 마쓰마에에서부터는 생략하고 일정만을 소개하였습니다. 오늘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래도 찬찬히 이선달의 글을 읽어보면 문명인과 비문명인에 대한 구분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눈에 보이는 문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나누는 정에 대해서도 소흘히 하지않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양 수어청에서 근무하는 중앙 공무원 양반에 속하지만 왜관이 있는 부산 출신이라서인지 상당히 오픈 마인드로 에조인과 일본인, 심지어 동행의 선원들과도 격의없이 교류를 하는 모습도 보이구요.

이렇게 18세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에조치의 모습을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히지않은 외부인의 모습으로 들여다 본것도 상당히 신선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제발 연대라도 틀리지않고 소개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살짝 미처 소개못하고 넘어간 동시기 17세기 후반의 일본의 지리지 하나를 짧게라도 소개하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슬슬 마무리도 해야겠구요.

**표주록의 원문과 번역은 고전번역원 DB에서 "표주록"으로 검색하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해설의 지명 부분은 中村和之 선생의 "李志恒『漂舟録』にみえる「石将浦」について" (帯広百年記念館紀要第25号, 2007)을 전적으로 참고하였고, 허경진 선생의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다양한 층위(層位)와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필요성"(2014) 중에서 "Ⅳ. 예기치 못한 이국 체험기 표류기(漂流記)" 부분 역시 참고하였습니다. 이지항의 표주록을 바탕으로 실은 동화책 "별난 양반 이선달 표류기 1: 아이누족을 만나다"(웅진주니어, 2011)라는 책이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표주록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전혀 다르게 구성한 내용이긴 합니다, 그래도, 영조대라고 틀린 연대를 반복한 것은 조금 걸리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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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occhi 2014/10/04 16:50 # 답글

    와 넋 놓고 읽었습니다
    묘사 수준이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조금만 더 하면 송강 정철 같은 문학 작가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필력으로 외국의 풍물을 기록해 두었으니 가치 있는 역사적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담고 있는 내용까지 범상치 않구요

    "곧 칠언소시(七言小詩)를 지어 주었더니, 그 왜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를 올리고는 재삼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이것은 왜인들이 시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이건 좀 가식적인 겸손인 듯 하네요 ㅋㅋ
  • 迪倫 2014/10/11 19:13 #

    재미있지요! 저도 이 표주록을 읽고는 이 재미있는 얘기가 왜이리 안알려졌을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지항은 뒷부분에서 마쓰마에 번주가 극진히 대접할 정도로 문장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극구 사양을 했는대도 에도까지 이지항은 가마를 타고 갔을 정도입니다. ^^
  • 행인1 2014/10/04 22:58 # 답글

    1. 난파되어서 난생처음도 아니고 미지의 세계에 표류해서 일단 구조는 받았는데 '곡식'이 없어 구근 캐먹고 난리도 아니군요.

    2. 아이누인들의 생활을 묘사한데 언급하신대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생활을 묘사한걸 연상시켜 흥미롭습니다. 이 선달이 지식인 계층이었다면 아마 유럽의 선교사들이 쓰던 '그리스도의 가르침'같은 표현도 나오지 않았을런지...
  • 迪倫 2014/10/11 19:15 #

    1. 완전 로빈슨 표류기풍인데 다행히 인원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해피엔딩이었다고 합니다.

    2. 그런데 이지항은 상당한 지식인이기는 했는데도 일방적인 우월감같은 것은 안보이더군요. 오히려 아이누인들에게 정이 들었다고 할 정도이니..
  • 빛의제일 2014/10/04 23:23 # 답글

    제 머리 속에 모습과 풍경을 떠올리며 글을 읽으니 영화 한 편 본 것 같습니다.
    참으로 경황 없을 상황이었지만 나중에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내공과, 오픈 마인드라고 표현하신 그 마음을 본받아야겠다 생각합니다.

    한 번 밑으로 주욱 읽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찬찬히 읽다가 청어가 떠올라, 저 바다 어딘가에서 헤엄치겠지 생각했습니다. ^^;;
  • 迪倫 2014/10/11 19:17 #

    재미있죠^^ 어린이용으로 이 내용을 차용한 동화가 있더군요.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아마 상당히 각색은 좀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대로 시기를 잡은 것은 문화컨텐츠같은데서 나온 소스가 틀렸으니 어쩔 수 없기는 해도. 아이들에게 오리지널 이야기를 한번 들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청어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흐흐흐흐
  • 불별 2014/10/05 00:45 # 답글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

    한국인의 '정' 이 무엇일까 생각이 복잡하였는데 이 구절을 읽으니 약간 감이 오는 듯 합니다. 오늘도 좋은 글 소개 정말 감사드립니다!
  • 迪倫 2014/10/11 19:18 #

    저도 그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소개하지 못한 마쓰마에에서도 그렇고 참 겸손하고 따뜻한 성정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 까날 2014/10/05 02:29 # 답글

    리시리와 레분은 봄 여름으로 꽃이 아름다운 곳입니다.그런데, 부산과 영덕을 오가던 배가 표류해서 거기까지 가다니 보고도 못 믿겠습니다.
  • 迪倫 2014/10/11 19:20 #

    아, 한번 가보고 싶은 곳들입니다. 꽃이 만발한 사이로 흰 눈이 덮인 리시리산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겠네요.

    부산-영덕 항로에서 그곳까지 떠밀려간것은 정말 믿기어려운 모험담이죠!
  • 헤르모드 2014/10/07 00:35 # 답글

    드디어 이 글을 올리셨군요 ;)
  • 迪倫 2014/10/11 19:21 #

    안그래도 어떻게 소개를 할까 고심하다가 가감없이 가능한 원글을 그대로 소개를 하는게 제일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문순득과 함께 언젠가 다시 한번 엮어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
  • 역사관심 2014/10/24 06:00 # 답글

    뒤늦게 잘 읽고 갑니다. 밸리발행된 글들을 위주로 읽다보니 깜빡깜빡 뒤늦게 읽어서 댓글 달 타이밍도 놓치곤 합니다 ^^;
    리시리도라는 섬은 그야말로 환상적이군요. 저런 섬이 있었다니...

    이선달 이야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정말 재밌네요. 이런 아이들용책까지 나와 있어 놀랐습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01122939
  • 迪倫 2014/10/24 12:40 #

    아동용으로 나온 책은 1권은 홋카이도로 표류했던 이선달의 이야기, 2권은 마닐라와 마카오로 표류했던 문순득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것입니다. 다만 설정을 세계여행을 가는 선비로 잡아서 원 소스의 이야기가 약간 각색되어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영조대라고 기년을 잘못 소개한 문화컨텐츠 자료를 사용했는지....비록 창작물이라고 해도 영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문순득 이야기는 이지항만큼 경이로운 표류기입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자세히 소개해보고 싶은 기록입니다.
  • newbie 2014/12/10 00:27 # 삭제 답글

    이런 기록도 전해오고 있었군요. 아이누인과 접촉했던 기록이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오랜만에 들러서 또 한번 정말 잘 보고 갑니다.
    문순득 씨의 대모험 이야기도 꼭 한번 다뤄 주세요.
  • 迪倫 2014/12/10 10:30 #

    newbie님 안녕하세요. 제 기억으로라면 한참만이시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항이 원래 글솜씨가 좋아 대단히 생생한 기록을 남겨놔서 저도 처음 읽었을때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을 정도입니다.

    문순득의 기록은 몇가지 공부를 좀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 시리즈에는 무리이겠지만, 언젠가 소개를 꼭 해보고 싶은 내용입니다.
  • 내 안에 있을까 2014/12/12 19:01 # 삭제 답글

    어렸을 때 다음 페이지가 못견디게 궁금해서 신나게 읽으면서도 읽을 부분이 적어지고 있음에 안타까웠던 아이 마음처럼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압적이지 않은 열린 마음이 느껴져서 더 좋은 글이네요. 그를 여정을 따라서 여행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 迪倫 2014/12/17 10:53 #

    하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죠, 이지항의 글 중에 은근히 오픈 마인드가 느껴져서 원문 그대로 꼭 소개해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이대로 여행을 하시게 되면 꼭 어떠했는지 알려주십시오!!
  • 빛의제일 2015/08/15 02:42 # 답글

    김시덕 선생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읽다가 '배시황전', '이지황'이 나오니
    여기서 읽었던 관련 내용들이 떠오르고 괜히 먼 친척어른을 다시 만난 듯이 반갑습니다. ^^
    김시덕 선생님 책 읽다가, 문순득 책 읽어야겠다 싶어, 사재기 하고 읽지 않아 집안에서 행불된 책을 찾고
    관련정보를 구글링하니 이 포스트가 나옵니다. ^^

    "반갑고 고맙습니다."를 말을 남기려다가 글이 길어졌습니다. :)
  • 迪倫 2019/09/17 11:50 #

    문순득의 글도 언제 다뤄보려했는데 이렇게 시간만 흐르고 기회가 점점 옅어져 가고 있습니다 ㅠㅠ

    다시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 델타 2019/04/03 02:49 # 삭제 답글

    상당히 흥미롭네요 잘읽었습니다
  • 迪倫 2019/09/17 11:48 #

    정말 옛날에 쓴 글인데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체꿀리 2019/09/09 04:59 # 삭제 답글

    우연히 검색하다 와서 단숨에 읽어버렸네요. 표류에서 살아남아 귀한 경험을 하고 그 생생한 기록이 수백년 후까지 전해오다니, 참 경이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낯선 민족을 만난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까도 생각해보고, 일년만에 돌아온 이들을 보고 가족들의 반가움은 얼마나 컸을까도 생각해보네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迪倫 2019/09/17 11:49 #

    워낙 원래 글이 생생하고 열린 마음의 글이어서 소개를 하는 저도 재미가 있었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morg 2019/09/24 20:04 # 삭제 답글

    오랜만에 모노노케 히메 다시 보고 -> 아이누 나무위키 봤다가 여기까지 와서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ㅎㅎ
  • 迪倫 2019/11/10 11:41 #

    오래전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루시우 2020/01/25 19:42 # 삭제 답글

    일본 유학 중 친해진 친구가 조상이 아이누였다고 하는 걸 듣고 찾아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매우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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