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고려와 오적, 서수라... by 迪倫

유피 타타르, 그리고, 몽골과 골위에서 말미에 언급한 북고려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슬슬 살펴보겠습니다. (시리즈의 글은 오늘 갑자기 올린 별편: 스모크드 레드 헤링 파스타의 다음이지만, 내용 상으로는 그 앞의 유피 타타르, 몽골과 골위에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드 헤링입니다. ㅋ)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열고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서둘러 1607년 전후 처음으로 조선 사신이 회답겸쇄환사로 다녀간 후 일단 다시 교린을 복원한 후 3년이 지난 시점.

1610년 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쓰시마번 소가문(宗家)의 가로(家老)이면서 바쿠후 쇼군의 막료(小姓 고쇼라고 읽는 비서직에 가깝습니다)라는 두가지 직책을 맡아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1603-1684, 柳川豊前守라고도 합니다)를 부르는데, 그 자리에 멀리 북쪽 에조치의 남단 오시마반도(渡島半島)에 자리를 잡고있던 마쓰마에번의 번주 마쓰마에 요시히로(松前慶広, 1548-1616)를 함께 부릅니다.

마쓰마에 요시히로는 1599년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조지도”를 바치고 도쿠가와 편에 가담한 후 원래의 성 가키자기蠣崎에서 마쓰마에로 개명을 하고 1604년에는 마쓰마에번의 에조치에 대한 에도 바쿠후의 특권인정을 받는 흑인제서(黒印制書)를 받아 다이묘가 되고 마쓰마에번의 초대 번주가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런데 왜 쓰시마의 조선관계에 정통한 야나가와와 북방 에조에 정통한 마쓰마에 요시히로를 같은 자리에 불렀을까요.
이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북고려(北高麗)오적(奥狄 오쿠에조 혹은 오쿠테키라고 읽습니다)의 정세를 두명에게 묻습니다. 방향이 전혀 반대인 두명에게 ??…
아래의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이 지도는 아마도 17세기 중후반의 샤쿠샤인의 반란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쓰마에 에조시마에즈 (松前夷人嶋絵図)라는 제목의 지도입니다.

아래의 확대한 두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마쓰마에의 서쪽에(그림의 아래) 北高麗之方角(북고려의 끝모서리)이라고 적혀있고, 또 하나는 마쓰마에의 북쪽에(그림의 왼쪽) 있는 섬 하나에 “唐フト嶋漢地支配外夷也” (가라후토섬은 중국이 지배하는 세력권 바깥의 오랑캐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가라후토 = 사할린)

여기서 북고려는 무엇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북고려를 일본어로 기타코마라고 읽어야하는지 아니면 호쿠코라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냥 북고려로 표기하겠습니다)

아무튼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조선 함경도의 북관(北關)을 넘어 북으로 계속 이어지는 지역을 북고려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조선에서는 야인(野人)이라고 부르던 여진족 지역입니다. 또는 야인 중 우량하이(兀良哈) 족의 이름이 전해진 오랑캐 지역이라고도 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이 오랑캐라는 말이 전해져서인지 오랑카이(おらんかい)라고 불렀는데, 17세기 중반인 1646년에 씌여진 마쓰마에번의 역사책이랄 수 있는 “신라의 기록(新羅之記錄)”에 이 북고려는 중국 동북부의 타타르와 비슷하며 오쿠에조와 가깝다는 내용으로 처음 북고려라는 표현이 등장한 다음부터 이후에는 북고려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또 오쿠에조 또는 오쿠테키라고 읽는 오적(奥狄) 지방은 지금의 사할린(일본에서 가라후토라고 합니다)과 아무르강 하구의 연해주지방을 의미합니다. 홋카이도는 대신 구치에조(口蝦夷)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세 일본에서는 이렇게 마쓰마에 즉 당시 에조치의 이북은 바로 조선 북쪽의 만주 동북지역(북고려)과 연해주 지방 – 사할린(오쿠에조) - 홋카이도(구치에조)가 서로 연달아 이어져있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뭐 지도 상으로는 맞긴한데 그보다 지리적으로 더 가깝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이런 인식이 있었기에 이 두명을 같은 자리에 불러 대외교역에 대한 정보를 들어보려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날 야나가와는 마쓰마에 요시히로에게 조선인삼을 선물하고 요시히로는 야나가와에게 해달의 모피를 교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실은 훗날 요시히로의 7대 후손 스케히로(松前 資広)가 직접 조선인에게 글을 청하고 선물을 주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룹니다)

다시 이전 포스팅에서 정약용이 한 말을 다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아무르강 하구 유역의 비아객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이어서 )대개 왜인(倭人)들이 이 지방을 가리켜 이르기를 ‘수길(秀吉)이 대발을 펴서 건너고자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허풍을 떨며 자랑하였다. (원주: 왜인(倭人)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수길(秀吉)이 조선을 쳐들어갔다. 이때 살마(薩摩)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일기(一岐)로 갈 수 없었고, 육오(陸奧)의 이북으로 길을 잡으려 하였는데, 한쪽에 수렁진 해로(海路)가 있어 4백 리의 거리를 대발을 펴고 병마(兵馬)를 건너려 하다가 빠질까 염려되어 그만두었다.’고 한다.) (중략) 하이(蝦夷)가 우리나라와 동떨어진 것이 비록 이와 같으나, 이미 일본과 서로 통래하고 또한 그 선박의 제작이 점점 편리해지고 있으니, 혹시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된다. 그러나 4백 리 수렁길의 이야기는 본래 왜인(倭人)이 우리를 속인 것이니 믿을 것이 못된다.

정약용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이 그때 육오 즉 도호쿠 지방의 이북 즉 하이(에조)를 통해 조선으로 침공하려고 고려를 했었을 정도다 라고 하는 내용을 그건 뻥이다 그정도로 가깝지는 않다 하고 단정을 짓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래도 경계는 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약용의 트랙백과 무관하게 원글인 이덕무의 이야기는 “임진년 난리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깊숙이 북관(北關)에 들어갔다가 송전(松前) 사람 세류도우수(世琉兜宇須)란 자를 사로잡았는데 그 사람은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머물러 산 지가 20년이나 되는 자였다. 청정(淸正)은 그를 얻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여 그를 향도(嚮導)로 삼고 후등차랑(後藤次郞)이라 개명(改名)해 주었다. 근세에 동래(東萊)에 사는 사람도 표류하여 하이(蝦夷)에 도착했다가 돌아왔으니 하이의 경계는 우리나라 북관(北關)과 서로 가깝다. 변방을 맡은 신하는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전 글 '에조의 땅..."에서 별도로 얘기하겠다던 e 항목의 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읽어보면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제주도에서 20년을 살았다는 세류도우스라는 마쓰마에 사람을 함경도에서 잡아 고토지로라고 이름을 고쳐 조선침략의 앞잡이로 삼았는데 결론은 홋카이도가 함경도와 가깝다라는 것인지 뭔지…. 게다가 이 이야기는 고대로 카피 페이스트되어 조선 후기 문집들 여러군데 등장합니다. (박연에 대한 윤행임의 석재고에도 이 이야기가 그대로 인용된 다음 외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 박연은 조선을 위해 일하고 세류도우수는 왜군의 길잡이가 되다니, 기이하구나 하는 이야기마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조선에 알려지기 전의 원래 일본측 이야기는 시간 상으로는 이어지지만 일련의 별개 사건들입니다. 김시덕 선생의 2010년 연구 “제주에 표착한 일본인 세류두우수는 누구인가 – 윤행임 석재고를 통해 보는, 조선시대의 일본 임진왜란 담론 수용양상 ”과 “제국주의 이전 시기 일본의 여행 담론 – 가토 기요마사의 오랑카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북고려”들이 이 이야기의 출전과 변형과정을 추적하여 고찰하고 있는데, 이 세류두우수의 이야기는 가토 기요마사와 관련된 각종 문헌에 17세기부터 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인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淸正高麗陣覺書)”에 의하면 원래 이야기는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거쳐 오랑카이와 싸운 뒤 거인장군 세루토스와 싸워 이를 포로로 잡고, 조선으로 귀환하는 중에 세이슈라는 곳에 이르러 후지산을 바라보고, 고토 지로라는 20년 전에 홋카이도 남단의 마쓰마에에서 이곳으로 표류해 온 일본인을 만나 길안내로 삼았다고 한다”입니다.(해당 논문 “제주에 표착한~”에 실린 내용을 약간 요약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원래 이야기는 함경도 이북의 오랑카이를 공격하였다가 세류토스라는 거인 장군과 싸워 그를 포로로 잡았다. 조선의 세이슈라는 곳에서 후지산을 바라보았다. 고토지로라는 마쓰마에 표착민을 안내로 삼았다 라는 별개의 에피소드들이 이어진 것입니다.

김시덕 선생의 연구는 이 세류토스/세류도우수/세류두우수는 한국어 절도사의 와전된 발음이고 함경도 북관에서 실제 가토 기요마사군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 잡힌 절도사는 한극함이라고 합니다. 한극함은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실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맹렬하게 저항한 조선군의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용맹을 부각하기위해 그를 신비한 거인장군 세류토스로 이야기가 와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정작 조선에서 적의 향도가 된 세류토스로 잘못알려진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서수라(西水羅)는 그동안 여러번 이 지명이 나오면 제가 별다른 설명없이 강조를 한 지역인데 함경북도의 최북단 지역입니다. 북한과 러시아, 동해가 맞물리는 지역인데 아래의 지도에 표시한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에 일본어로 세이슈우라(せいしう浦) / 세이슈(せいしう)라고 표기가 되었다가 점차 한자 제주 濟州 せいしう라는 표기가 붙었다가 그마저도 나중에 제주의 일본어 발음인 사이슈(さいしう)로 와전이 된 다음 이게 조선에 다시 전해지면서 이덕무 이하 여러 글들에 뜬금없이 제주에서 20년 살아온 마쓰마에 사람을 북관에서 잡아서 길안내를 시켰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서수라라고 해도 여기서 후지산이 보이지는 않겠죠. 일본에서도 이 이야기가 점차 사쓰마의 가이몬이라든가 호키의 다이켄이라든가 하는 주장이 있었고, 이야기가 북고려와 에조치가 인접하였다는 후대의 인식으로 인해 지금의 홋카이도 서쪽의 리시리섬의 리시리산이다 라는 주장이 최종적으로 강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냥 지도를 보시면 서수라-리시리도 가능할리가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보다 이게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는 거죠.

그리고, 이 후지산을 봤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가토 기요마사의 무공을 의미하는 “가등청정이 조선에서 후지산을 보다(加藤清正、朝鮮ヨリ富士ヲ望ム)”라는 클리셰가 되어서 근세와 근대의 일본에 유포됩니다. 이 클리셰는 일단 해변가에서 가등청정이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보고를 받고 바다 너머 산을 바라보는 구도로 되어있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김시덕 선생으로부터 받은 "에혼 조선군기"에 실린 이미지입니다. 제가 임의로 표시를 한 부분이 가토 기요마사와 고토지로와 후지산입니다. 혹시 구분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박스 안의 설명에는 “청정이 제주(濟州)에서 멀리 우리나라(일본)의 후지를 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토지로를 나타내는 사람의 모습이 일본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아래의 이미지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왼쪽은 에혼조선군기에 나오는 장면, 가운데는 에혼 다이코기의 장면 중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가토 기요마사 조선군기에 나오는 고토지로의 모습입니다.
왼쪽은 전형적인 에도 일본인의 모습이고, 가운데는 짐승가죽을 걸친 야만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의 모습은 뭔가 중국풍의 옷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오늘 얘기드린 북고려와 오쿠에조, 구치에조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인 에조니시키라고 불리던 비단옷을 묘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음편에서는 에조니시키(蝦夷錦)라는 근세 에도의 레어 엔 머스트 아이템을 통해 동북 아시아의 잘알려지지않은 교역 루트와 마쓰마에번의 전개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이번 포스팅에는 지난번에도 밝혔듯이 이웃 블로그이신 헤르모드 김시덕 선생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았습니다. 먼저 최근에 출판하신 "그림이 된 임진왜란"(학고재)와 이전의 "그들이 본 임진왜란"(학고재, 2012)에 위에서 언급한 논문의 세류두우수와 한극함에 대한 내용들이 보다 일반일들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그림들과 같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이미지 중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후지산을 보는 그림과 그 아래 제가 잘라서 붙인 고토지로의 그림들은 원래 "그림이 된 임진왜란"에 삽화로 실린 것으로 모두 김시덕 선생 소장의 원본책에서 얻은 사진들입니다. 고토지로를 표시한 에혼 조선군기(삽화 55), 에혼 다이코기(삽화56), 가토 기요마사 조선군기(삽화57)의 세 이미지를 마침 감사하게도 블로그에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고 이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여기 그 내용을 밝히고 감사를 다시 표시합니다.

그 위의 지도 松前夷人嶋絵図는 일본 홋카이도 대학 북방관계 자료종합목록(http://www2.lib.hokudai.ac.jp/hoppodb/index.php?FF=1&idxname=0D&max=100)이 출전입니다. 그리고, 도쿠가와-야나가와-마쓰마에의 회동 이야기는 菊池勇夫 선생의 "北東アジアの中のアイヌ"(アイヌ文化振興・研究推進機構 平成13年度普及啓発セミナー, 2002)를 참고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요즘 정말 한국사회의 핫 이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함경도와 그 너머 여진 지역은 임진왜란에서도 약간 마이나한 주제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전쟁의 이야기는 이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제는 장사군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저는 아무래도 장삿군의 이야기가 더 편한 느낌이라 ^^

**여름 시즌이라 확실히 오프라인이 조금 여유가 생겼나봅니다. 제가 맹렬히 블로그를 할 정도니... 다음 주는 노동절 직전 여름 시즌의 마지막 주입니다. 계속 이정도로 가면 다음주에 거의 마무리 글들 올리는 쪽으로 해보겠습니다. 아니면 갑자기 바빠질 가능성도...
한주 건강하게들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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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자노프 2014/08/24 15:12 # 답글

    한국에서 한극함때문에 개고생-세로투스란 놈을 때려잡았다-세로우두스란 표류민이 임진왜란때 가토 길잡이를 했다 뭐 이런 식으로 변형되고 변형된 거군요... 히야...
  • 迪倫 2014/08/25 11:02 #

    조선 후기에 일본 문헌자료들이 조선에 많이 유입되면서 몇가지 정보들이 혼선이 생겨 이렇게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화한삼재도회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 빛의제일 2014/08/24 18:26 # 답글

    북유럽의 청어 이야기가 옛날 동북아로 이어지고, 지도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는 것이 되게 신기합니다.
    김수환무거북이와두루미 이어지듯이 말과 사람이 이어지면서 없던 일이 만들어지고 일을 만드는 것을 보니
    재미있다가도 살짝 섬찟하기도 합니다.

    김시덕 선생님 이번에 나온 책 샀는지라,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 헤르모드 2014/08/24 20:41 #

    감사합니다 호호호호
  • 迪倫 2014/08/25 11:04 #

    김선생님 책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청어로 다시 이야기가 스리슬쩍 돌아갈 예정이니 다시 기대해주십시요^^ (섬찟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제가 끼워맞춰 넣은 것이니...)
  • 耿君 2014/08/24 21:19 # 답글

    '오쿠테키'라고 하신 것은 狄을 음독으로 '테키'라고 읽는다면 奧도 음독으로 '오(おう)'라고 읽어서 '오테키'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만, 어떨는지요.
  • 迪倫 2014/08/25 11:15 #

    실은 어떻게 읽는 것인지 찾아보았는데 일본쪽 웹사이트 자료들에 奥狄(おくてき)라고 훈을 달아두었더군요. 특히 신라지기록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http://www.town.fukushima.hokkaido.jp/chiyohshi/mokuji/fukusima_2/2-1-1.html
    그래서 그 독법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오쿠에조는 김시덕 선생님 논문 속의 표기를 따랐구요.
  • 헤르모드 2014/08/24 21:36 # 답글

    개인적으로는 "북고려"를 "기타코마"라고 읽고 있습니다. 다른 맥락이지만, "오쿠코(고?)마"라는 도자기도 있는 듯 하더군요^^;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길안내를 하는 고토지로의 이미지 세 장 가운데 마지막 "희한한" 모습은, 네덜란드 풍이 가미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난화(蘭畵)" 계열? http://ja.ukiyo-e.org/image/metro/H029-009-006
  • 迪倫 2014/08/25 11:13 #

    '기타코마'로 저도 그럼 읽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저 그림이 화란풍이란 것은 상당히 신기하네요. 연결해주신 그림 속의 에조인 두명의 묘사는 확실히 어디선가 본 적있는 아키타난화풍인데, 위에 제가 인용한 인물의 옷은 http://digitalmuseum.web.fc2.com/area5/501/501_02.jpg 에서처럼 아래 주름잡힌 치마가 달린 전형적인 철릭풍의 에조니시키로 보여서 이야기를 그쪽으로 틀어가보려고 했습니다.

    아무튼 제가 제대로 다루지못하거나 잘못 다룬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 헤르모드 2014/08/25 11:24 #

    에조니시키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인물의 얼굴이나 머리모양은 난화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요. 에도시대 사람들이 대충 상상하던 "이국" !? ㅎㅎ 에조니시키를 입은 정성공이나, 에조니시키를 입은 현해탄의 해적 등도 그려지고는 하니까, 확실히 딜런재 선생님의 관찰처럼 에조니시키는 "이국풍"을 만들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요소로 기능했겠습니다^^;;;
  • 迪倫 2014/08/25 12:00 #

    안그래도 니콜라스 비천의 책 북부와 동부 타타르에도 에조인을 묘사한 부분에 실크 스커트를 입고있더란 얘기도 나오고 해서 그렇게 짐작해보았습니다. 가능성이 있다하시니 그럼 밀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얼굴은 난화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뭔가 조선뿐이 아니라 그 너머의 미지의 이국으로 라는 이국의 정취를 나타내는데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 Nocchii 2014/08/26 06:54 # 답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 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이군요 ^^
  • 迪倫 2014/08/31 01:10 #

    제주도와는 무관한데 발음이 비슷하다보니 (세이슈-> 사이슈) 옮기고 옮기고에서 변형이 된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 이종혁 2014/08/26 19:26 # 삭제 답글

    홋카이도 위의 사할린...

    왠지 북국의 추위와 할아버지 세대의 강제노역으로 인한 비극의 이미지로 점철 되어 있지만

    정말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언젠가 가봐야 겠다는 미지의 세계로 다르게 그려집니다.

    추석연휴때 오키나와 아니면 홋카이도.. 둘중 바라보고 있는데

    왠지 기울고 있네요 ^^

    지난 주에 하노이에 휴가 다녀왔습니다.

    언젠가 월남의 동경이라고 불리웠던 통킹의 역사와 교역사와도 연결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 迪倫 2014/08/31 01:12 #

    추석때면 이제 며칠 남지않았는데 홋카이도로 가시나요?
    이종혁님 그야말로 종횡무진 하시는것 같습니다! 통킹은 아직 공부가 좀 모자라서.... 그런데 VOC와는 모르고 넘어갈 수는 없는 곳이긴 합니다. 언제 기회가 있겠죠^^

    추석 오키나와이든 홋카이도든 다녀오시면 재미있는 얘기 들려주세요^^
  • 리리안 2014/08/27 13:13 # 답글

    지명이 오해가 되서 뒤죽박죽이 되버렸군요^^;;
  • 迪倫 2014/08/31 01:14 #

    그랬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18세기에 일본 문헌들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많이 소개되면서 신공정벌이라든가 하는 일본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조선 유생들의 글들에 실려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그렇게 그런 얘기로 열폭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 밥과술 2014/08/30 10:03 # 답글

    오늘처럼 각나라의 정확한 발음이 문자에 고착되어 있던 시기와 달리 옛날에는 언어발음이 중구난방이었죠. 동네마다도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만주 몽고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한자를 가지고 이두방식의 표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두 언어만 건너가다보면 너무나 동떨어진 발음과 표기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에도 일본음식 오뎅, 샤부샤부 이런 것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표음문자처럼 표기된 중국어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또 한자발음으로 읽은 것을 한글로 표기를 하면 완전히 엉뚱한 단어들이 되지요.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한편으로는 언어학적인 원칙과 습관을 발견해 내는 것이 역사학에서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고언어연구와 역사학이 더 가까와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迪倫 2014/08/31 01:44 #

    언어학도 좀 알고 외국어를 좀 잘하고 그래서 발음상이나 어원상의 계통이나 흐름을 직관적으로 딱 집어낼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유럽언어는 그래도 이렇게 변화되어서 분리되어 나가는게 잘 밝혀져있는 편이던데, 동아시아 언어들 간에 일어나는 변형은 그것만으로도 연구주제가 되겠다 싶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근대이후에는 서양언어까지 들어와서 다시 동양 3국을 오고가면서 또다시 변형되어서 - 솔직히 재미있습니다! -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에는 정말 동의합니다!
  • 함부르거 2014/09/01 12:43 # 답글

    근세 이전 사람들의 지리감각은 오늘날과는 정말로 다른 거 같습니다. 몇백km 떨어져 있는데도 아주 가깝게 여긴다거나 몇십 km 정도의 거리도 아주 멀게 느낀다거나... 당장 우리보다 훨씬 넓은 일본 사람들도 정작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와서는 너무 넓어서 두렵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유럽에서도 시칠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한달음으로 여긴 로베르 기스칼 같은 사례도 있죠.

    이런 지리감각의 왜곡은 물리적 거리와 교통시간으로 따지는 거리를 혼동한 결과가 아닌가 싶긴 합니다. 정확한 계측보단 인간의 감각으로 거리를 느낀 결과겠죠. 배로 가면 육로보다 훨씬 빠른데 그걸 물리적 거리로 착각하는 일이 많았던 게 아닐까요. 근세 이전의 기록을 읽을 때는 이런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 迪倫 2014/09/03 23:28 #

    지도 제작이 아직 완벽하지않고 특히 항해의 경우 해류로 인한 이동시간의 증가나 단축이 유발하는 실제 거리와의 차이같은게 영향을 미쳐 지금 위성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거리감각같지만 반대로 옛날에는 이런 지리 정보가 실질적인 거리였다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그래서 말씀처럼 지금 옛날 사료를 볼때는 당시 감각을 기준으로 봐야 이해되겠죠.
  • 역사관심 2014/09/06 04:56 # 답글

    북고려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습니다. 역시 인식과 실제가 전근대에는 꽤나 큰 차이가 나는군요.
  • 迪倫 2014/09/07 22:13 #

    북고려는 한국쪽에서는 잘알기 어려웠던 일본의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서야 근세 일본 문헌을 전공한 김시덕 선생이 소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내용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일본에 대해 잘안다고 생각해도 정작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게 그쪽에서 우리와 우리 인근을 어떻게 보는지도 잘 모르는게 많다는 것과도 연결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문제는 전근대뿐 아니라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요...
  • 역사관심 2014/09/08 08:04 #

    김시덕 선생의 연구는 여러모로 정말 소중한 정보를 현 한국사회에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아무리 현대라 해도 인간의 인지심리라는게 자신에서부터 뻗어나가는 지라, 결국은 정도의 차일뿐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명량해전 하나를 보는 시각조차 현재의 두 사회는 천지차이니...
  • 남중생 2018/11/11 13:46 # 답글

    적륜 님,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겠으나 히데요시가 북방 해로로 조선을 침공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 기록이 원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유한의 해유록(1719년)입니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79A_0030_040_0010_2003_001_XML
    아메노모리 호슈와 감귤 먹는 이야기, 하이(에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흥미로운 기록입니다!

    ○ 왜인이 말하기를,
    “만약 육오(陸奧)로부터 바로 조선의 동북으로 오면 수로(水路)는 매우 가까우나 북쪽에 바람이 높고 바다에 섬들이 없으므로 배가 다니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수길(秀吉)이 조선을 침범할 적에 육오(陸奧)로부터 조선의 국경으로 나오려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구덩이가 3백 리나 되므로 대울타리[竹籬]를 펴고 군사와 말이 건너가려고 계획하였다가 마침내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족히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대개 지세를 논하면 가까운 지름길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예로부터 두 나라에서 한번도 길을 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험하고 어려움이 있는 때문이다.
  • 迪倫 2018/11/19 11:07 #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해유록을 확인 못했고 그 이후에 이 부분을 보았습니다. 저는 신유한이 어떤 소스를 통해 이 얘기를 전해들었는지 그게 궁금한데 아직 그까지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에조를 다음 시리즈에서 조금 더 다뤄보고 싶은데 그때 자료가 우연히 나와주면 좋겠다 생각 중입니다. ㅎㅎ
  • 남중생 2018/11/19 11:57 #

    우후후후후, 고래 이야기~ 기대가 만땅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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