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거중기와 기기도설. by 迪倫

鏡 (下): 어리쇠(於里衰)에서 이어서 예고한 광학장치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요즘 연일 계속되는 미동부지역 폭설로 삽질을 너무 많이 해서 지치기도 하고 잠시만 번외편 한편 때리고 가실께요~

실은 개인적으로 근세 시기 유럽 문화가 동아시아에 전래되고 해석되고 수용되는 일련의 과정들에 관심이 좀 많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제국주의적 서세동점 이전에 있었던 이런 인터액션은 좀 확대해서 생각을 이어가면 자본주의와 근대의 형성과 전개같은 주제에 흥미있는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뭐 그렇기도 하고 실제로 '호오'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좀 많구요. (물론 저는 후자쪽입니다만...) 지금 쓰고있는 광학장치나 예전의 자명종 시리즈 모두 관련된 자료들에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미처 포스팅으로 쓰지못한 내용들이 적지않습니다.

그래서 광학장치의 후반부에는 더이상 조선을 다루지 않게 될 것도 같고 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것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상당히 유명한 "정약용의 거중기"를 한번 다뤄보겠습니다. (오늘 얘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이미지는 클릭하면 좀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나온다는 정약용의 "거중기(擧重器)"의 모습입니다.


워낙 실학 = 거중기 라고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얘기라서 다 알고있는 것이지만 다음 백과사전의 설명을 다시 발췌해서 적어보겠습니다. 원 출전은 브리태니커 사전이라고 합니다:
움직 도르래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이용한 도구.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만든 것이 유명하다. 정약용의 〈기중도설 起重圖說〉에 그림과 함께 설명이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는 이 장치를 1792년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정약용이 이를 만들게 된 것은 그의 창의적 발명이 아니라 정조가 그에게 왕실에 있던 서양과 중국의 기술서적을 주어 연구하게 한 결과였다. 1627년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테렌즈[鄧玉函] 등이 지은 〈기기도설 奇器圖說〉이 참고가 되었다.


자, 아마 거의 대부분 거중기에 대해 아는게 여기까지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아는게 원래 딱 여기까지뿐이었습니다.

아, 찾아보니 남대문 복원 공사를 전통방식으로 한다고 2010년에 거중기를 동원한 "쇼"를 한번 한적이 있더군요. 그런데 2013년 12월 4일자 인터넷 중앙일보에 이를 비판한 기사(링크 클릭)가 실렸는데, 그 중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날 회의에선 “전통 방식대로 거중기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도 나왔다. 회의록에는 ‘운반·조립·쌓기는 현대식 도구를 사용한다’고 명기돼 있다. 한 참석자는 “거중기는 수원 화성 공사 때도 실험적으로 1대만 만들었고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거중기는 문헌기록상에만 있을 뿐 제작·사용 방법 등이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우선 제가 기기도설에서 다른 것을 찾느라 뒤져보는데 거중기처럼 생긴 장치가 보이지않았습니다. 그런데, 게다가 어느 "전문가분"께서는 조선시대에도 1대 실험용으로 문헌기록에만 있고 쓰인적도 없다고 일갈하고 있으셨다는군요.

우선 정약용이 원래 뭐라고 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의 여유당전서 제1집 제5권 설(說) 중에 실린 "기중도설(起重圖說)"부터 읽어봅시다. 이 "기중도설"은 기본적으로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입니다. 9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도설'이라는 제목답게 도면이 이 안에 6개 들어있습니다. 아마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해서 좀 길어도 전체를 개제합니다. (번역은 고전번역원이 출처입니다, 이미지는 국립중앙도서관제공 디지털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괄호 안의 내용은 원주입니다)


성(城)은 돌로 쌓는 것이기에 돌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돌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돌을 캐내고 운반하는 데 진실로 힘이 들고 경비가 많이 듭니다. 그것은, 무거워 밑으로 떨어지려는 성질을 가진 돌을, 억지로 들어서 높게 올리려는 때문입니다.

옛날 주(周) 나라가 강성했을 때 무왕(武王)이 구정(九鼎)을 낙읍(雒邑)에다 옮기고, 선왕(宣王)이 석고(石鼓)를 봉상(鳳翔)에다 세웠습니다. 이 두 물건은 비할 데 없이 무거운 것들인데, 무왕이나 선왕의 어질고 또 슬기로움으로써 어찌 백성의 어깨에 땀이 배게 하고, 백성의 종지뼈가 끊어지도록 하고, 구부(九府)의 재물을 다 소비해가면서 그러한 일을 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무거운 솥[鼎]을 움직이는데 그 힘을 헤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아마 꼭 그러하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옛 성인(聖人)들은 소리개의 꼬리를 보고 배를 만들었고, 쑥대[蓬]가 날고 송곳[觿] 자루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수레를 만들었으니, 그것을 볼 때, 반드시 기구를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토록 하여 뒷세상까지 그 은혜로움을 남겼을 터이나,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응소(應劭)가, “태산(泰山)에 무제(武帝) 때의 돌이 있는데 다섯 대의 수레로도 실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고 집을 지었다.” 한 것을 보면, 서경(西京) 시대 이후로 이미 기구를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제 그 전해 남은 것은, 뱃사람들만이 쓰는 활차(滑車)가 그것입니다. 대개 돛은 무겁고 돛대는 높아서 몇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데, 장대의 끝에 있는 활차가 돌아서 힘을 덜어주지 않는다면, 어찌 중간에 그치거나 꺾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옛사람들이 남긴 뜻을 취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고해서, 기중 소가(起重小架)를 만들어 수원성(水原城)을 쌓는데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천정(千鼎 천 개의 솥, 즉 무겁고 큰 것을 말함)에 한 조각 쇠붙이이며, 아홉 마리 표범의 반점(斑點) 중에서 하나의 반점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오히려 기계의 성능이 신묘하고 쓰임이 민첩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보면 깜짝 놀라고, 지혜 있는 사람도 보면 의혹할 만합니다. 심지어는 성문 양편에 세우는 돌 (속칭 현단석(懸端石)이라고 한다.) 의 무게가 수만 근씩이나 되어 천명(千名)의 힘으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백 마리의 소로도 끌지 못합니다. 이것을 두 사람이 도르래의 손잡이를 잡으면, 번거롭게 힘쓰는 소리를 할 필요도 없이 한 개의 깃털을 들어 올리듯 공중에 들어올리게 되니, 힘겨워 숨이 찰 걱정도 없을 뿐 아니라 나라의 재산도 절약되니, 그 이익됨이 또한 크고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기계를 만드는 데 그다지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약간의 공력(工力)만 들여서 도르래를 만들어 서로 통하고 서로 이끌게 만들면, 조그만 어린아이의 한 팔 힘으로도 여러 만근(萬斤)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으니, 절대로 보통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수원성의 역사(役事)는 적고 물건도 가벼우니, 어찌 꼭 그런 기계를 사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가운데서 가장 간단하고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골라 시험해 보겠습니다. 이에 왼편에 차례차례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첫번째는 가(架)이고, 두번째는 횡량(橫梁)이고, 세번째는 활차(滑車)이고, 네번째는 거(簴)인데, 거에는 고륜(鼓輪)과 녹로(轆轤)를 같이 설치해야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신(臣)은 삼가 내려준 《기기도설(奇器圖說)》에 실려 있는 기중(起重)의 법(法)들을 살펴보니, 무릇 11조(條)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정밀하지 못하고 다만 제8조ㆍ제10조ㆍ제11조의 그림만이 자못 정밀하고 신묘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0조의 그림은 모름지기 구리쇠로 만든 나사(螺絲)의 도르래가 있어야 되니 지금 생각해보건대, 비록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기술자라 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만들지 못할 뿐더러, 더구나 구리쇠 바퀴에다 톱니를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제8조와 제11조를 취하여 참고해서 변통하여 만들었는데, 왼편과 같습니다. (註: '왼편'은 옛날 책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때문에 '다음 페이지'라는 의미입니다)

위의 그림과 같이 네 개의 발이 있는 긴 틀[架]입니다. 갑(甲)과 을(乙)이 틀의 들보[梁]이고, 병(丙)ㆍ정(丁)ㆍ무(戊)ㆍ기(己)는 애각(礙角)이라는 것인데, 거(簴)에 설치된 것과 연결된 줄이 밀려서 벗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틀의 높이는 쓰임새에 따라서 높이를 더하거나 덜하면 됩니다.

위의 그림과 같이 경(庚)과 신(辛)은 위의 활차(滑車)의 횡량(橫梁)입니다. (쇠붙이로 둥글게 만든다.) 그 등쪽은 가량(架梁 큰 틀의 들보)의 안쪽과 맞닿는 것이고, 임(壬)은 쇠로 만든 고리인데, 밧줄을 꿰어서 드리우는 것입니다. 계(癸)ㆍ자(子)ㆍ축(丑)ㆍ인(寅)은, 활차의 걸고리를 거는 곳인데, 약간씩 가늘게 만들어 걸고리가 안전하게 걸리도록 하고,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여유를 주되,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는 않도록 해야 합니다. ○ 묘(卯)와 진(辰)은 아래 활차를 거는 횡량(橫梁)입니다. (나무로 만들되 모[方]가 지게 한다.) 사(巳)와 오(午)는 쇠로 만든 갈고리로 무거운 물건을 달아매는 곳이고, 미(未)ㆍ신(申)ㆍ유(酉)ㆍ술(戌)은 활차의 걸고리를 거는 곳으로, 각각 홈을 파서 걸고리가 꼭 맞도록 하여 움직여 딴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위의 그림과 같이 둥근 걸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위쪽 횡량에 거는 활차입니다. 갑(甲)은 바퀴[輪]이고, 을(乙)과 병(丙)은 축(軸)이고, 정(丁)은 둥글게 생긴 걸고리인데 위의 횡량에 매달리는 것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둥글게 만든 것입니다.
○ 아래쪽에 모가 난 걸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래쪽 횡량에 거는 활차입니다. 무(戊)는 바퀴이고, 기(己)와 경(庚)은 축(軸)이고, 신(辛)은 모난 걸고리로서 아래 횡량에 꼭 맞게 고정시키는 것으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모가 지게 만든 것입니다.
○ 위의 바퀴나 아래의 바퀴나 모두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가운데 허리 부분을 깊게 하여 밧줄이 밖으로 벗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위의 축(軸)이나 아래의 축이나 모두 강철로 만드는데, 모가 지게 만들어서 바퀴와 꼭 맞물리게 하고, 축의 끝머리는 둥글게 하여 잘 돌아가게 합니다.

위의 그림과 같이 녹로(轆轤)는 거(簴)의 아래에 가로로 설치되어 (거는 아래에 나온다.) 고륜(鼓輪)에서 감겨져 오는 밧줄을 받아 감는 것입니다. (같이 아래에 나온다.) 자(子)와 축(丑)은, 녹로의 축이고 (축의 끝머리 부분이다.) 인(寅)ㆍ묘(卯)ㆍ진(辰)ㆍ사(巳)의 말뚝과 오(午)의 말뚝은, 녹로의 양편 끝에 있는 십자(十字) 모양의 손잡이 말뚝인데, 사람이 왼편과 오른편에서 녹로를 돌리고자 하면 각각 십자로 된 이 손잡이 말뚝을 잡고 돌리면 됩니다. (함께 아래에 보인다.)

위 그림과 같이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이 거(簴)인데, 무(戊)와 기(己)의 양편에 세우는 기둥은 고륜(鼓輪)을 설치하는 것이고, 경(庚)이 고륜인데, 모양은 요고(腰鼓 허리 부분이 잘록한 장고)와 같으며, 밧줄을 전달받아서 다시 녹로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辛)은 고륜의 축인데 (축의 한쪽 끝은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는다.) 두 기둥 사이에 고륜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 임(壬)과 계(癸)는 녹로의 축인데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그 허리 부분은 고륜에서 전달해 오는 밧줄을 받아 감는 역할을 하고, 축(丑)은 이미 감겨진 밧줄입니다. 인(寅)ㆍ묘(卯)ㆍ진(辰)ㆍ사(巳)의 말뚝과 오(午)ㆍ미(未)ㆍ신(申)ㆍ유(酉)의 말뚝은 `녹로 양편 머리의 십자(十字) 모양의 손잡이 말뚝으로서 힘을 받는 곳입니다.
○ 술(戌)은 다른 곳에서 밧줄이 오는 것인데 즉 장가(長架)에 설치된 활차로부터 전달되어 온 것입니다. (함께 아래에 설명하였다.)
○ 거(簴)는 왼편과 오른편에 각각 하나씩이 필요합니다.

이제 크고 무거운 물건을 높이 들어 올리려면, 위의 그림과 같이 먼저 네 개의 발이 있는 장가(長架)를 세우고, 다음은 위의 횡량을 장가의 아래편에다 붙들어 달고 (쇠사슬이나 쇠고리를 사용하여 조립한다.) 그 횡량에다 활차 네 개를 매답니다. 다음은 무거운 물건을 매단 아래의 횡량에다 활차 네 개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 매달되, 위의 활차와 서로 어긋나게 하여, 나란히 마주 쳐다보게 배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덟 개의 줄의 위에서 드리워지는데 그 드리워지는 직선을 따라 활차를 배열하면 된다.)

다음은 두 대의 거(簴)를 장가(長架)의 오른편과 왼편에 설치한 다음 밧줄 한 가닥을 위 횡량의 중심에 달린 쇠고리에 걸어서 줄의 끝이 왼편과 오른편으로 향하도록 하는데, 왼편 끝은 갑(甲)의 활차를 거쳐서, 을(乙)ㆍ병(丙)ㆍ정(丁)의 활차를 지나 왼편에 설치된 고륜으로 전해져 감겨돌아 녹로에 전해지고, 오른편 끝은 무(戊)의 활차를 거쳐 을(乙)을 지나 경(庚)을 거쳐 신(辛)을 지나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는 거에 이르러 왼편의 예(例)와 같이 합니다. 다음에는 사람이 왼편과 오른편에 있는 녹로의 십자(十字)로 되어 있는 손잡이 막대를 돌리면, 여덟 가닥의 밧줄이 일제히 줄어들면서 무거운 물건을 자동적으로 들어올리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제일 처음의 화성성역의궤의 그림을 다시 살펴보면 그 가운데에 지금 정약용이 설명한 장치가 코어 파트로 들어있는 것이 보이실 것입니다. 그럼 이 보고서의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은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 중 자찬묘지명의 일부입니다:
이해(註: 임자년,1792, 정조 16)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게 되었다. 주상이 이르기를, “기유년(1789, 정조 13) 주교(舟橋)의 역사에 용(鏞)이 그 규제(規制)를 진달하여 사공(事功)이 이루어졌으니, 그를 불러 사제(私第)에서 성제(城制)를 조진(條陳)하도록 하라.” 하였다. 용이 이에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 문충공(柳文忠公) 성룡(成龍)의 성설(城說)에서 좋은 제도만 채택하여 모든 초루(譙樓)ㆍ적대(敵臺)ㆍ현안(懸眼)ㆍ오성지(五星池) 등 모든 법을 정리하여 진달하였다. 주상이 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ㆍ《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 인중법(引重法)ㆍ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써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주상이 일렀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뭐 기록만으로는 "실험용으로 1대만 제작하여 실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없군요. 아무래도 남대문 복원공사처럼 검찰의 수사가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확실히 전문가의 통찰력은 역시 대다나구뇨. 뭐 농담은 이쯤하고...

정조가 정약용에게 기기도설을 내려 검토하라고 하였고 정약용은 보고서에서 "(11조의 항목 중에서) 그런데 모두 정밀하지 못하고 다만 제8조ㆍ제10조ㆍ제11조의 그림만이 자못 정밀하고 신묘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0조의 그림은 모름지기 구리쇠로 만든 나사(螺絲)의 도르래가 있어야 되니 지금 생각해보건대, 비록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기술자라 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만들지 못할 뿐더러, 더구나 구리쇠 바퀴에다 톱니를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제8조와 제11조를 취하여 참고해서 변통하여 만들었는데"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당연히 기기도설에서는 거중기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정약용이 새로 만들어낸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이 그나마 참고할 수 있었다던 8, 10, 11조의 당시 유러피언 메카니즘입니다. 그림 속의 알파벳 문자를 보십시오. 조선 후기 선비들 사이에 꽤 알려져있었던 뉴아이템이었습니다. (이전 포스팅 참조해보세요)




정약용은 "구리쇠로 만든 나사(螺絲)의 도르래가 있어야 되니 지금 생각해보건대, 비록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기술자라 할지라도 능히 그것을 만들지 못할 뿐더러, 더구나 구리쇠 바퀴에다 톱니를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라면서 실질적인 기술적 어려움을 고려하고 대신 "수원성의 역사(役事)는 적고 물건도 가벼우니, 어찌 꼭 그런 기계를 사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면서 현지 상황에 맞게 마춘 장치를 고안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다산 선생 어플리케이션에 강한 상당한 공돌이 마인드의 보유자입니다.

여기서 조선 근세 과학기술을 얘기할 때 늘 부딪히는 문제 하나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정약용의 예, 또는 다른 18-19세기 기록들을 보면 상당히 재주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 외래문물에 대한 호기심도 요즘 오덕 못지않구요. 그런데 왜 과학기술을 발달시키지 못했을까요? 흥미있는 실마리가 그런데 정약용이 참고한 기기도설에 있습니다. 기기도설은 기본적으로 선교용 도서입니다. 이 책의 처음에는 아담과 이브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왜 이런 기계 장치가 중요한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다음은 기기도설에 실린 해당부분입니다. 당연히 정약용도 정조도 이 부분만 안읽고 넘어가지는 않았겠지요:
인류의 시조는 아당 (亞當)이다. 조물주 (造物主)가 천지를 만들고는 즉시 최초의 인류를 만들어 아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액말 (厄襪)이라 이름한 그의 아내와 함께 땅위의 살기 좋은 곳에 두었다.그 초기에 사람은 질병도 없고 늙거나 죽는 일도 없었다. 사람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오곡과 과목(果木)들이 모두 땅위에 저절로 나고 자랐으며 그 가운데 일체의 새와 짐승들도 사람의 부림을 받았고 해독은 없었다.그러던 것이 아당 (亞堂)과 액말 (厄襪)이 천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계율을 어겨 죄를 얻은 이후로 오곡은 잘 나지 않고 새와 짐승들도 독이 있게 되었다. 굶주림과 추위가 있고 병과 죽음이 있게 되었으며 남자는 농사 짓는 고통을 받게 되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고통을 벌로 받게 되었다.이에 아당은 처음으로 농구 (農具) 등의 기구를 만들어 스스로 의식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구의 이용은 모두 인류의 시조인 아당이 만든 것으로서 대개 아당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법도를 세웠는데, 반은 사람의 힘으로 반은 하늘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포스팅은 여기)

유대기독교적 유럽 문화에 있어서 '기계장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인간성과 신과의 관계의 중요한 팩터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유체계 내에서의 '메카니즘'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이 아닌 땅에 서있는 "인간 자신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으로 변환됩니다. (이것이 원근법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인간의 시선으로 측정하고 내재된 원리를 파악하여 인간의 힘으로 실물로 구현하는 시스템으로 전개됩니다. 심지어 인문학적인 입장의 반대편에 선 신학적인 해석에서마저도 예수회의 경우 수학과 천문학을 통해 우주를 연구하고 자동기계를 만들어 신의 원리를 이해하고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아시아로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특히 과학자들이 많았고 청나라에서 특히 관상감을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유럽 과학 기술이라는 게 유럽의 상부구조적 패러다임과 분리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게 19세기의 수많은 슬로건들 '중체서용', '화혼양재' 동도서기'가 모두 헛되이 실패하고 "이식"된 근대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정약용은 위에 인용한 자찬묘지명에서 거중기를 만들기 5년전인 1784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갑진년(1784, 정조 8) 여름 이벽(李檗)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에서 배를 내려 비로소 서교(西敎)를 듣고 한 권의 서적을 보았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한참 서학에 경도되어있던 시절, 그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거중기라는 작품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근세 조선은 왜 서양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냐고 못났다고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그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었던 전통사회가 식민지와 전쟁으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난 후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이식한 후에는 급속도로 서구방식의 근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속에서도 하이퍼 하이테크 국가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얻은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죠. 우리는 불과 백년전의 우리 할아버지들이 쓴 글도 읽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야기가 오늘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음편은 다시 근사한 세계, 근세 광학 장치의 2부로 넘어가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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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4/02/16 12:29 # 답글

    흠, '기기도설'이 이름과는 달리 선교용 서적이었군요.
  • 迪倫 2014/02/16 12:35 #

    예수회에서 동아시아에 소개한 서적들은 일단은 모두 선교 목적으로 봐야합니다. 다만 기기도설의 경우는 너무 노골적으로 "야소"를 내세우지 않아 그렇게까지 인식이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漁夫 2014/02/16 13:12 # 답글

    당시에는 해당 사회의 역사 및 궤적과 상관없이 '과학은 보편타당하다'는 의식이 많지 않았겠지요. 어떻게 보면 종교 등과 상관없이 과학 기술을 볼 수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20세기 들어서야 널리 퍼졌다고 간주해야 하겠네요.
  • 迪倫 2014/02/16 13:30 #

    예, 말씀대로 '보편타당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근대에 도입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지않을까 합니다. 그 이전에는 사람에 따라 남여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적용되는 하늘의 원리가 다르다고도 했었으니까요....
  • 빛의제일 2014/02/16 22:20 # 답글

    저도 못 믿는, 안 믿는 제 머리입니다만. 오래전 본 다큐멘터리에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었을 환경과 비슷하게 만들고
    서울대 공대쪽 학생과 포스코인가 카이스트 학생들을 모아서 만들게 했더니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본듯한 기억이 납니다.

    '상부구조적 패러다임'이라는 말씀에 세계관의 觀이 화악 새롭게 다가오면서 <근사한 세계, 근세의 광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담긴 뜻을 곱씹게 됩니다.
  • 迪倫 2014/02/18 11:49 #

    아, 그런 실험을 한적이 있었군요. 왜 못만들었을까 프로그램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의외다 싶네요. 기록이 상당히 자세한데....

    그리고, 키워드를 콕 집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밥과술 2014/02/16 22:32 # 답글

    반은 인력이고 반은 하늘의 힘이다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저는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만, 쓰면 '엉? 뭥미?' 이런 반응이 나오고 제가 안드로메다가 될것같아 참습니다.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만 한자로 음역을 할때부터 아담과 이브에는 성차별이 개입되었군요. 요즘같아서는 고소할 거리가 될 정도네요 ㅋ

    늘 느끼지만 일정한 굵기로 선을 그을수 있는 펜이 아니라 붓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는 건 대단합니다. 펜이 도입되었을 법도 한데 언제인지가 궁금합니다.

    잘읽고갑니다~
  • 애쉬 2014/02/17 07:33 #

    붓과 함께 막대를 나란히 한손에 쥐고 사용하면 일정한 굵기의 선도 그을 수 있고 자도 쓸 수 있답니다^^;; 물론 성가신 방법입니다만
  • 迪倫 2014/02/18 11:53 #

    앗, 그 뭥미 해석이 궁금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들려주십시오. ^^

    이브는 일단 라틴어 Eva의 음사인데 당시 예수회 자료에는 몇가지 한자 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이 '액말'이 가장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요즘같으면 고소를 할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붓/펜 이야기는 예전에도 한번 덧글로 말씀하신적이 있으셔서 자료를 볼때마다 간혹 찾아보고는 있습니다. 아직 포스팅을 할 정도는 아니라서 언젠가 자료가 좀더 찾아지면 꼭 다뤄보고 싶습니다.
  • 迪倫 2014/02/18 11:55 #

    애쉬님: 그런 방식이 있었군요. 흥미롭습니다. 괜찮으시면 이런 방식이 전통적인 출판이나 그림 그리기에서 어떤 경우에 응용되는지 자세한 얘기 좀더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역사관심 2014/02/17 06:21 # 답글

    제대로 연구도 안해보고, 저렇게 '일갈'을 내지를수 있는 마인드...참 뭐라 이해가 안됩니다. 안되요... 어떻게 저렇게 만용이랄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수 있는지. 나름 연구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지만.

    그리고 마지막 문단. 구구절절 동감입니다.
  • 迪倫 2014/02/18 11:57 #

    마지막 문단에 동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처음 얘기한 전문가분은 기사만 보고 저도 하는 얘기라서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하긴 남대문 복원에 난데없이 거중기를 쓰겠다는 '전시행정'도 말도 안되고, 한번 쇼하고 치운것도 말도 안되고....아니 남대문이 불탄것부터 말이 안되니....도대체 어디서부터 아쉽다고 해야할지...참....
  • 애쉬 2014/02/17 07:32 # 답글

    거중기의 궁금한 점들을 많이 해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계공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활차의 대량생산은 꽤나 힘들었지 싶습니다.

    지금은 철사로 못을 만드는 자동 기기 때문에 흔한 것이 못이지만 에전 고건축에서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나무만 고집하는 오소독스함 때문이라기 보다 못을 대량생산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라고 보더군요
  • 迪倫 2014/02/18 11:59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쇠못같은 철물의 생산이 어느 정도 단계였는지 저도 잘 알지못합니다.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알기 어려워서....관심은 가지고 찾아보는데 별로 성과는 없고, 그나마 조금 알게된 것을 이야기로 나누려는 정도입니다.
  • 인형사 2014/02/17 07:43 # 답글

    기기도설의 아담과 이브에 관한 이야기는 딱 다음과 같은 것이겠군요.

    http://youtu.be/Tg5n5Rn79_4

    'Black and White in Color'라는 일차대전 시기 아프리카의 한 프랑스 식민지의 풍경을 그린 영화이지요.

    프랑스인 신부가 원주민들을 모아놓고 자전거 타는 것을 보여준 다음, 백인이 이런 걸 만들고 탈 수 있는 것은 백인의 신이 쎄기 때문이고 흑인도 백인의 신을 믿으면 자건거를 탈 수 있다면서 데리고 다니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흑인 하인이 자전거를 타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지요.

    저 유튜브 영상에서 1시간 8분 쯤에서 1시간 10분 정도까지 보면 나옵니다.
  • 迪倫 2014/02/18 12:00 #

    호오, 흥미있는 장면이네요. 제가 알기로 17-18세기에는 동아시아 적어도 중국, 일본에서 저런 태도까지 갖지는 않았는데, 19세기에는 정말 완전히 영화 속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흥미있는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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