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라스코프, 18세기의 텔레비전, 먼 이국의 풍경. by 迪倫

랑체(郞體), 18세기 서양화법의 파급에서 이어씁니다. 그사이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연말로 다가가는 시점에 저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열심히 동아시아를 이웃으로 엮어 생각해보려는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듯 아베 수상은 선을 넘고 말아버렸네요. 오늘 포스팅은 결국 일본 얘기를 하려는데 이거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한국의 전해오는 뉴스 역시 이야, 이걸 뭐라 평해야할지….아무튼 다들 무사하게 파고를 넘어 새해를 맞이하시기들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도 뭐 딱히 제가 역사적 사명감과 의미까지 다룰 능력도 없고 그냥 이야기는 이야기일뿐 재미로나 읽어주십사 하는 정도로 하고 스리슬쩍 넘어갑니다. 아, 그리고, 이미지들은 사이즈를 줄여두기는 했지만 내용을 따라가시면서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계속 근세의 광학장치라고 하고는 몇편을 그냥 미술사같은 중언부언 설교로 채워서 슬슬 그래서 다시 렌즈는 언제 나오는가 하시는 분들, 잠시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청나라이든 조선이든 일본이든 낭체와 같은 서양화법, 그중에서 원근법을 빡세게 적용한 그림만 봐도 우와 근사(近似)하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습니다. (근사하다는 말 자체가 진짜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에는 조금 미흡하죠. 지난번 포스팅의 책거리 그림도 물론 원근법이 잘 적용된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3D 라기는 정도는 아니잖아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VOC에서 동아시아에 당시 유럽에서도 막 발명되어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신기한 신제품을 들고 옵니다. 이름하여 조그라스코프(zograscope)라는 장치입니다.

이 장치는 어찌보면 눈요기 거리의 광학 장치로서 아마 가장 첫번째 장치가 아닐까 합니다. 조그라스코프라는 것은 거울과 볼록렌즈를 조합해서 만든 간단한 장치입니다. 하지만 시각적 효과는 충격적일 정도입니다.

조그라스코프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래의 이미지에서와 같이 거울 아래 그림을 거꾸로 놓고 렌즈를 통해 이미지를 보는 것입니다.

위의 장치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조그라스코프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냥 확대경과 비스듬히 이어붙인 거울이 장치의 전부입니다. 물론 조그라스코프 중에는 그 아래 이미지처럼 상자 속에 설치하는 좀더 복잡한 스타일도 이후 만들어지긴 합니다만, 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조그라스코프는 먼저 그림을 거울로 반사시킨 다음 다시 렌즈를 통해 굴절을 시키면서 원근감을 실제보다 강조하여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근법을 특히 강조한 그림들, 특히 대로가 쫙 뻗어있고 대로를 따라 원근법에 맞춰 건물이나 숲이 직진으로 깊이 후퇴하면서, 전면과 후면에 크기가 다른 사람이나 나무같은 물체를 배치하면, 이 전면과 후면의 물체가 깊이감이 왜곡되어 간격이 더 멀어지게 보여서 원근감을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백밀러에 실제 거리보다 더 멀게 보인다는 주의글이 적혀있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 소개한 들여다보는 요지경 상자 혹은 노조키 카라쿠리라고 했던 장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거울을 사용해 반사를 한번 시키기 때문에 그림이 위아래 좌우가 뒤집혀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지경상자는 거울을 사용해서 이미지를 반사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림을 우리가 보는 상하좌우와 동일하게 그대로 봅니다.

아래의 그림은 1778년 제작된 마르세유 항구의 모습을 그린 조그라스코프용 그림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게 그림 속의 상단 제목이 글짜가 반대로 뒤집어 적혀있는 것 보이십니까? 이 그림은 조그라스코프에 놓고 보면 좌우 상하가 반대로 뒤집어져서 바로 글짜가 표시되는 것이지요.


아래는 1780년 경 프랑스에 제작된 전형적인 조그라스코프용 그림 즉 뷰옵티크라고 부르는 그림인데, 예 확대가 되면 더욱 생생한 감각을 주기에 가장 적합한 동판 에칭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아래의 확대한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위 그림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분을 제가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상세하게 나타내면서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동판 에칭판화가 최고였습니다.

이 장치는 대략 네덜란드에서 17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일단 시장에 출시되자 전 유럽에 급속히 확산되어 나갑니다.

그리고, 이 장치에 슬라이드로 사용하는 그림을 뷰돕티크(vue d'optique)라고 하여 동판 에칭화로 대량 제작하였는데 주로 런던이나 파리, 로마의 유적, 아니면 멀리 중국의 궁정과 같이 사람들이 가볼 수 없는 곳의 이미지를 마치 실물처럼 3D로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이때 유행한 중국 궁정을 그린 풍경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로 인해 마침내 사람들이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지않고도 그리고, 듣거나 읽고 상상만 하는게 아니라 멀리 이국 풍경을 눈으로 실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쉽게 말해 18세기의 텔레비전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유럽에서도 일반인들이 가질 정도로 값싼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하긴 텔레비전이 처음 출시되었던 시기 산다는 집에서나 갖출 수 있는 꿈같은 물건이었던 것 비슷하다고 할까요.

실제 연구에 의하면 18세기 중반 당시 네덜란드 가계의 경제적 카테고리를 농민, 임노동자, 상인 외 인구, 상인과 상점운영자, 그리고, 유지와 자산가의 5개 카테고리로 나눌 경우 조그라스코프를 소유한 계층은 마지막의 두 계급 상인과 자산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조그라스코프의 가격 역시 보급형이 네덜란드 길더 3길더에서 5길더 정도, 약간 고급형이 8길더, 최상품은 10길더 정도 했다고 하고, 런던에서는 18실링형에서부터 고급형은 1파운드 12실링 6페니짜리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가격은 19세기로 다가가면서 점점 하락하기는 하였고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쌌다고는 합니다만, 오스트리아같은 중부 유럽은 여전히 상당한 고가의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길더 1길더 = 영국 8 페니, 영국 1 파운드 = 20실링=240 페니.

뭐 그래서 좀 사는 집이라면 이렇게 조그라스코프를 배경으로 우리집에 이런 물건 정도는 갖추고 있지비 하는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는거죠.

**이 그림은 1794년의 "L'Optique"라는 그림입니다. 그림 속의 아가씨 루이제 세바스치안느는 나중에 그림 속 소년의 아버지인 프랑스 혁명의 조르주 당통과 결혼을 한다고 하는 군요....

그런데, 이 물건이 거의 동시대에 동아시아로 와서 베이징뿐 아니라 초창기부터 광둥성, 저장성, 장쑤성의 남중국 연안지역에 퍼지면서 쑤저우 판화와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 중국에서 나가사키로, 그 다음에는 VOC에서 직접 이 물건을 일본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일본에 처음 도입된 시기는 중국을 경유하여 나가사키에 1718년에 이런 물건이 들어온 기록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유럽에도 물건이 발명되기 전이니 이건 약간 다른 물건으로 보이고, 아마 1770년대가 유력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의 유럽과 동시대에 도입되었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 장치가 일본에서도 역시 들어오자 마치 이 우키요에에 그려진 것처럼 신기한 이국 물건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명종에서 본 것처럼 일본화하는 상당히 특이한 전개를 보이게 됩니다.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아직 반밖에 못갔는데, 우선 여기서 자르고 주말 중에 뒷편 마저 올리겠습니다. 뒷편에서 일본에서 처음에는 원근법을 강조한 눈으로 보기만 하던 우키에가 이 조그라스코프를 이용하는 메가네에(眼鏡繪)라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번부터는 계속 여러가지 광학장치들이 본격 등장합니다. 기대해주십시오~

**조그라스코프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그리 어렵지않은게 손거울과 확대경만 있으면 됩니다. 아래의 링크에 뷰돕티크 그림의 이미지가 많으니 하나 정도 다운로드 받아 프린트 한 다음 손거울로 비춘 다음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시면 됩니다. 의외로 3D감이 충실합니다. 진짜라니까요...
뷰돕티크의 샘플: http://bibliodyssey.blogspot.com/2011/07/grand-perspectiv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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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중생 : 그림 속 여성과 과학기술 2018-01-24 02:14:42 #

    ... 현지처와 카라유키상(からゆき)들이 망원경 같은 신기술에는 관심 안 갖고, 한 번 보여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그냥 본업(?)에만 충실했을까요? 또 조그라스코프는 어떻습니까?그저 여성을 그리는 회화 전통 때문이라고만은 생각치 않습니다. 당장 "Ukiyoe, telescope"라는 키워드로 구글 이미 ... more

덧글

  • 까날 2013/12/27 17:30 # 답글

    그러고 보니 데지마에서 이걸 본것도 같습니다. 각도가 이상한 확대경이라 어디다 쓰는 물건인 줄 몰랐는데, 여기서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迪倫님 포스팅과 데지마에서 보고 온 것을 엮어서 포스팅을 해야 할텐데.... 게으른 탓에 진척이 없네요.
  • 迪倫 2013/12/31 10:54 #

    데지마 포스팅 잘 읽고 보았습니다. 아! 나가사키에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군요^^

    까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밥과술 2013/12/27 17:31 # 답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상상력을 조금이라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장치가 나오면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망원경이 발명되고나서 그걸 접한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과 자극이 어느정도 였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물을 처음으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 볼때의 놀라움도 그렇구요. 프리즘을 통한 빛의 굴절, 거울 여러개가 모여 만들어내는 만화경의 기하학적 무늬 이 모든게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사람들을 열광시켰을 것 같습니다. 어렸을때 학교에서 배워서 종이에 바늘구멍을 뚫으면 반대로 상이 맺어지는 걸 봤을때 정말 신기했습니다. TV가 있고, 카메라가 있던 시절에 살면서도 말이죠. 저는 국민학교때 플라네타리움을 처음 보고서 받은 감동과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조그라스코프같은 간단한 원리의 장치도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겠지요.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이야기 기다리겠습니다~
  • 迪倫 2013/12/31 10:57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아무래도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시각적 놀라움은 종종 가장 인상깊게 오래 남는 기억/추억/트라우마가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안그래도 말씀하신 핀홀 카메라 이야기를 조만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올 한해 정말 감사했습니다. 밥과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행인1 2013/12/27 22:46 # 답글

    동서양의 퓨전(?)이 일어나는군요.
  • 迪倫 2013/12/31 10:59 #

    물론 동서양의 퓨전이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중국에 처음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지만 중국과 달라지는 길을 걷는 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행인1님, 올 한해 늘 대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행인1 2014/01/01 12:22 #

    예, 감사합니다. 迪倫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종혁 2013/12/28 04:03 # 삭제 답글

    63빌딩 아이맥스 상영관을 먼저 접한 꼬마의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요즘 처럼 뭐든게 편한것이 당연한 세상에선 경이롭다고 표현할 만한게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내년에 나올 연말정산 환급금이지만..

    동심파괴 중년모드가 아닌 풋풋했던 그 시절을 가끔 떠올립니다. ㅋㅋㅋ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 迪倫 2013/12/31 11:00 #

    하하 연말정산 환급금이야말로 즐거운 경이지요^^

    올해 비로그인 덧글을 연 다음 이종혁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재미있게 읽고 얘기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이국땅에서 아무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빛의제일 2013/12/30 01:14 # 답글

    저는 27일 방학했습니다만, 거울과 볼록렌즈를 가지러 월요일 출근해야겠다 싶습니다.
    제가 시험삼아 하고 괜찮으면 학생들과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반밖에 못오셨다고 했는데도 이리 재미있으니 나머지 반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습니다.
    유럽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이어지는 것 보면,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 싶고 그러면서도 다른 모습에 제각각의 빛이 있구나 싶습니다.
  • 迪倫 2013/12/31 11:03 #

    그림 사이즈를 가로 30센치를 넘지 않게 약간 작은 사이즈로 프린트하시는게 좋을 것같습니다. 저는 실험을 해보니 의외로 입체감이 좋았었습니다.

    그나 저나 예, 말씀ㄷ로 제각각의 빛이 있는것 같습니다.

    올 한해도 빛의제일님 덕분에 이제까지 블로그를 잘 끌어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이런게 누군가 영차 영차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 법이라서요. 감샇 인사 전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 2014/01/01 02: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1/02 1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애쉬 2014/01/05 17:59 # 답글

    카메라 옵스큐라의 바늘구멍을 렌즈가 대신하는 과정에 이런 물건이 있었군요 조그라스코프 호오....재미난 걸 많이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迪倫 2014/01/12 06:49 #

    조그라스코프는 조선에는 아직 흔적을 찾지못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과학사 혹은 미술사에서는 그리 중요한 주제로 다루지도 않기도 하구요.... (어쩌면 조선의 과학은 외부 과학을 도입하지않고 정체되었다 라는 명제가 너무 강하게 설정되어있어서 더이상 흔적을 찾지도 않는가 싶은 느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좀 낯선 신기한 물건처럼 보이실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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