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 정월, 역관 김현문의 우연한 조우.... by 迪倫

아란타인과의 인연이 이걸로 마지막은 아니라는 1655년 비극의 남이안(南二安), 그리고, 1666년 미스테리 남만요리사의 끝부분에서 이어씁니다.

다시 1712년으로 돌아왔습니다. 역관계의 레전드 김지남과 역시 역관이었던 큰 아들 김현문이 한참 백두산으로 오라총관 목극등이 파견된다 하여 함경도 국경으로 올라가던 1712년의 정월 김지남의 둘째 아들 김현문은 일본으로 통신사행에 합류하여 일본에서 귀국길에 오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일본어 통역인 왜학역관이었던 김현문(金顯門, 1675~1738)은 “신묘사행”이라고 부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 家宣)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1711년 여름에 출발한 통신사행에 압물통사(押物通事), 즉 사행의 물품관리 집행을 맡아 다녀오던 도중이었습니다.

압물통사는 본격 외교무대의 통역이라기 보다는 실제 사행 기간동안의 잡다한 실무와 각종 기록을 맡은 직책이었습니다. 하긴 역과에 합격한지 이제 10년이 되어 주요 경력은 아직 역관 관련 기록관리 담당자라든지 왜관에 파견나간 별차직을 주로 하고있던 요즘식으로 하면 과장급 정도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 이제 처음으로 일본 본토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이 신묘사행의 정사에 이조참의 조태억, 부사는 사복시정 임수간, 종사관은 병조정랑 이방언으로 구성되었고, 총인원 500명의 대규모 통신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묘사행이 상당히 중요한 사행이었던 것이 이 사행에서 여러가지 조선과 일본이 이후 강화도 조약 시기까지 두 나라간의 관계를 상당히 정립하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빙례 개정"이라 하는데 즉 맞이하는 예법을 고치자는 것입니다. 신미사행에서 우선 일본의 에도 바쿠후는 그동안 외교문서에서 관백이라고 일컫든 바쿠후의 쇼군을 국왕으로 불러주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통신사 접대에 과다하게 지출되는 예식과 경비를 현실화하여 간소하게 하는 새로운 규칙을 요구합니다. 이런 일본측의 요구는 실은 조선에서 무리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특히 관백을 국왕으로 호칭하는 것은 이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의 에도 바쿠후 체제를 인정해준 것입니다. 물론 이는 한참 이후에 천황과의 관계로 인한 조선국왕의 외교적 위치때문에 결국 문제가 되지만, 1711년 당시 이미 일본은 바쿠후 체제가 굳건하게 자리잡은 실질적 주권(de facto sovereign)이었던 것이죠. 실제 이 당시 VOC에서도 쇼군을 keiser 즉 황제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묘사행의 정작 심각한 외교문제는 조선 국서를 전하고 받은 답서가 중종의 어휘(御諱)을 범하고 게다가 서식이 바뀐 일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를 항의하자 일본측에서는 조선이 내세운 논리와 동일한 논리를 내세워 조선의 국서에 들어있던 광(光)자가 쇼군의 이름을 기휘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여 결국 양측이 국서를 받네 못하네로 기나긴 줄다리기를 합니다. 결국 조선측이 귀국 후 새로 국서를 고쳐 보내면 일본도 새로 답서를 보내는 것으로 절충하기로 합의를 합니다만. 아무튼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사신들은 이로 인해 귀국후 삭탈관직과 문외출송의 처벌을 받습니다. 물론 이게 뭐 중요한 일인가 싶지만, 1712년이나 2013년이나 마찬가지로 외교라는 것은 아와 어가 실제로 뭐가 다르든 누구의 어느 방식과 태도로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냐 못시키냐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조선 논리를 그대로 사용한 이 일본측의 디펜스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라는 걸출한 유학자의 작품이었습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잠시 후에 다시 등장할 예정이니 일단 북마크 하고 넘어갑시다.

물론 중간 실무자급인 김현문은 그리 큰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오히려 김현문은 이 사행 후에 사행 동안의 일기를 "동사록(東槎錄)"이라는 책으로 냅니다. 이 일기는 아무래도 사신들이 쓴 사행기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담겼습니다. 우국충절과 비분강개류의 양반 선비들의 티피컬한 감상적인 나레이션이 적고 대신 어찌보면 건조할 정도로 사실 위주로 적혀있습니다.

자, 그런데, 제가 이미 언급한 대로 실은 와유록 시리즈를 써보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동사록에 나오는 짧은 기사때문이었습니다. 김현문의 동사록은 백옥경 선생의 번역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동사록, 김현문 저, 백옥경 역, 혜안, 2007"

그 내용을 이 번역본에서 인용합니다.   

임진년 숙종 38년 1712년
정월 23일 정미
비가 오다 맑았다 함.
적간관(赤間關)에 머물렀다. 장문수(長門守)가 꿩 5마리를 바쳤다. 저녁에 종사관이 내려서 숙소에 머물렀다. 아란타국(阿蘭陀國) 사람이 장기도(長崎島)를 거쳐 강호(江戶)를 향하다가 오늘 이곳에 정박하였다. 모두 5인인데 왜선을 타고 왔다. 왜인이 숙소를 만들어 접대하였는데, 일행들이 가서 그들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 담을 넘어 들어가거나 혹 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고함을 치니 아란타 사람들이 화를 내며 피하였다. 그러므로 왜인들이 매우 엄하게 금하였다고 한다.

24일 무신
흐림.
적간관에 머물렀다. 식후에 작은 배를 타고 최와 이 두 당상(堂上)과 서너 명의 동료들이 가서 부사상(副使相)께 문후하였다. 오는 길에 아란타인이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중로(中路)에 그 사람을 보니, 머리카락이 가늘고 적황색이며 길이는 겨우 3,4촌으로 양털 같았다. 키가 크고 눈은 오목하며, 코가 크고 안색이 희다. 입은 옷은 붉고 노란 전포(氈布)로 만들어 마치 우리나라의 전포(戰袍) 같았으나, 모두 끈으로 묶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립(戰笠) 같은 것을 썼고, 어떤 사람은 청인(淸人)의 모자를 썼는데, 왜어(倭語)를 잘하였다. 내가 왜어로 답하니 얼굴에 기쁜 기색이 있었으나, 왜인이 금하여 오랫동안 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장문수가 이당(飴糖), 밀감을 바쳤다. 사상(使相)이 도주에게 문안하고 이당을 보냈다.

25일 기유
흐리고 바람이 크게 불었음.
적간관에 머물렀다. 장문수가 토끼 다섯 마리를 바쳤다. 달을 넘겨 패를 입히는 것이 실로 미안하니, 이후에는 일찬(日饌)도 감하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들으니, 적간관 건너편에 예곽대명신궁(刈藿大明神宮)이 있다고 한다.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매번 정월 초하루에 신당 앞 바닷물이 홀연히 저절로 열리면, 신궁의 승려가 물에 들어가 미역을 따서 관백에게 바치는데 해마다 항상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 일은 매우 괴이하고 탄망(誕妄)하지만 매년 이같이 한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란타인이 오늘 강호를 향하여 출발한다고 한다. 아란타국에서는 산호(珊瑚), 구슬, 궁각(弓角), 무늬있는 포 등의 물건이 생산되는데, 일본이 장기도에 숙소를 만들어 해마다 매매하며, 빈번하게 황래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번번이 그 두목(頭目) 4,5인을 머무르게 한다. 다음 배가 도착한 후에 머무르게 했던 사람을 보내고, 또 새로 온 사람을 머무르게 한다. 해마다 이렇게 하고 또 해마다 서너 사람이 강호에 가서 폐백을 바치는데, 마치 세금을 바치는 것 같이 한다. 지금 들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란타는 본래 남쪽 끝의 별종 세상이라고 하는데, 개들의 종족이라 소변을 볼 때 한쪽 발을 들고서 배설한다고 하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집승(集僧)이 사람을 보내어 문후하였다.


사행이 해를 넘겨 1712년 정월 이제 에도에서 일을 모두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던 길 에서 대한해협을 건너기 직전 적간관에서 머물다가, 반대로 에도로 들어가는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온 VOC의 네덜란드인들과 그야말로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들의 무대가 된 적간관 赤間關, 아카마가세키는 지금의 시모노세키(下關)입니다. 장문수(長門守)는 이 시모노세키가 소재한 나가토노쿠니(長門國)의 책임자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참 역사의 아이러니인게 바로 메이지 유신의 주력 세력인 조슈(長州)번이 바로 이곳입니다.

아래의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지도는 조선 통신사행의 여정이고, 아래는 데지마의VOC 상관장의 연례 에도참부 여정입니다. 둘다 일단 시모노세키 즉 적간관에서 세토나이카이 즉 일본 내해로 배를 타고 오사카 지역까지 간 다음 도카이도 길을 따라 에도로 갑니다. 바로 이 적간관이 두 사신 행로가 마주치고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통신사가 파견된 250년간 12회의 기간이 서로 조금씩 다르게 진행되어 이렇게 매년 여름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정월에 에도로 가던 VOC의 일행과 엇나가는데, 이 신묘년의 사행은 국서문제로 실랑이하다 출발이 지체되었던 것도 있었고, 그야말로 통신사행 250년만에 처음으로 이들이 우연하게 조우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아란타인들을 마주치자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은 아예 그들의 숙소로 가서 문도 두드리고 이리오너라 하고 상당히 적극적으로 접촉을 했다고 하는 군요. 당황한 아란타 상인들이 oh, nee! (영어의 오! 노!에 해당하는 표현입니다) 하면서 피하고 일본측에서 이러시면 다들 곤란하외다 어서 숙소로 물리시오 할 정도였다는 군요. 호오. 그런데, 김현문은 아에 이들과 직접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란타인들과 조우한 얘기는 당시 부사였던 임수간 역시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물론 임수간은 조정에 일본 체류 기간 수집한 각종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포함 시킨 것이라서 좀더 자세합니다. 어쩌면 이 보고의 내용은 김현문처럼 직접 얘기를 걸고 살펴보고 주위 일본인들에게 물어보았던 실무진이 제공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래는 임수간의 사행록 동사일기(東槎日記)에 실려있는 보고서 해외기문(海外記聞)의 내용 중 아란타인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닷길로 상관(上關)을 지나다가 뒤에 우연히 왜선(倭船)의 기(旗)의 빛깔이 좀 다른 것을 보고 물어보니, 바로 아난타(阿難陀)의 상객(商客)들이었다. 그 배가 매우 커서 장기도(長崎島)를 통과하려면, 얕은 물에 좌초되어 들어올 수가 없으므로 왜선을 사서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훤하며, 머리털이 앞으로는 이마를 덮고 뒤로는 옷깃까지 내려온다. 전립(氊笠 군뢰복다기) 비슷한 것을 썼는데, 왼쪽ㆍ오른쪽ㆍ앞쪽 세 군데를 말아 올려 위로 붙였다. 옷은 앞깃이 없이 동정으로부터 밑으로 합쳐 묶는 데가 수십 군데이고, 바지가 너무 좁아서 다리를 펴기는 하되 굽힐 수가 없다 한다.
그 기교(技巧)가 남보다 뛰어나서, 배 양쪽에 맷돌[石磨]을 시설해 두고 혹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기관[機]으로 물을 격동하면 비록 만 곡(斛)을 실은 무거운 배라도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다. 그리고 도르래를 돛대의 각 폭(幅)에 달아서 당기면 비록 1백 폭이라도 빠짐없이 모두 한데로 몰리는데, 그 배가 장기(長崎)에 와서 닻을 내리고 포성(砲聲)을 울리면,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집 판자 선반 위에 얹어 둔 그릇이 흔들리어 혹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나라는 서역(西域)의 가장 먼 곳에 있어 몇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중간에 섬이 없어 항상 먹을 물이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매양 여름 장마철에 나온다 한다. 무릇 왜인들의 값진 비단과 기이한 물자가 그 나라에서 많이 수입되기 때문에 해마다 몇 척의 배가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몸이 건장하고 잘 싸우는 편이어서 바닷길에서 왜선(倭船)을 만나기만 하면, 비록 사람 수가 상대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겁탈을 당하기 마련이라, 이 때문에 항상 배 한 척을 볼모로 삼은 뒤에 보내고 그들 선원도 매양 교체하여 돌아간다고 한다.
또 그들 풍속은 여자일 경우 반드시 10세 전에 시집을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울병(鬱病)이 생겨 죽게 되며, 남녀가 가장 오래 사는 자가 42세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1712년 알아볼 수 있는 내용들은 모두 수집하여 모두 보고를 하고 있군요. 대략 당시 일본에 퍼져있던 개처럼 다리 들고 소변을 본다라든지 40세밖에 살지 못한다는 도시전설도 모두 채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ㅋㅋ

자, 그러면 우리도 한번 이들을 만나볼까요?
쓰시마에서는 조선 통신사의 안내와 접대를 책임지고 있어서 이를 시뮬레이션 하거나 기록을 남겨 활용하기 위해 사행도를 여러차례 그렸습니다. 아래의 이미지는 바로 이 신묘 사행도의 일부분입니다.

중요한 정사, 부사같은 사람들은 제쳐두고 “小通事” 즉 중하위급 역관이라고 라벨이 붙은 인물들에 주목해보았습니다.(迪倫齋는 원래 그런 곳이랍니다 ^^) 조선인은 말탄 사람 둘, 걸어가는 사람 둘인데, 말탄 사람들이 차상통사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압물통사들일까요? 어쩌면 앞에 걸어가는 두 조선인 중의 한명이 김현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래의 이미지는 에도시대 후기 신묘사행으로부터는 시기가 좀 많이 뒤인 18세기 후반의 지금의 오사카 지역인 셋쓰노쿠니(摂津國)의 명소를 그림으로 소개한 "셋쓰메이쇼즈에(摂津名所図会)"라는 책에 실린 그림 중에 등장한 아란타인들의 모습입니다.

에도참부를 하러 나가사키에서 규슈 북부를 가로지른 다음 아카마세키에서 배를 타고 세토나이카이를 가로질러 오사카에 도착한 후 이곳에서 이런 저런 구경들을 하는 것을 일본측에서 바라본 그림입니다. 시기적으로는 1712년보다 좀 많이 뒤니까 아마 복장이 좀 달라졌을 수는 있습니다마, 그럭저럭 이런 분위기였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에도에 도착하면 이들 아란타인들이 머무는 지금의 니혼바시무로마치에 있었던 나가사키야(長崎屋)로 착아온 일본인 구경꾼(난학자들?)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시모노세키에서 이들의 숙소를 찾아간 조선인들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른쪽 세 아란타인들 중 가운데 사람의 모자는 17-18세기 네덜란드 그림에 잘 등장하는 작업모입니다. 아마 김현문이 묘사한 청나라 모자를 썼다는게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은 당시만 해도 조선과 VOC는 일본 내에서 무역으로 상당한 레벨의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정성일 선생의 연구 "The Volume of early mordern Korea-Japan trade: a comparison with the Japan-Holland trade",(ACTA KOREAN, vol. 7, No.1, Jan. 2004) (근세 조선-일본간 무역량: 일본-홀랜드간 무역과 비교)에 의하면 1684년에서 신묘사행의 2년전1710년까지 기간동안 조선의 대일 수출입 물량이 VOC의 대일본 수출입을 수출은 연평균 620 관목을 초과하고 수입은 연평균 104 관목을 초과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에 판매하는 물품은 둘다 중국산 실크인데 조선의 경우 여기에 인삼이 상당히 중요한 2차 상품이고, VOC는 동남아산 코모디티들이 2차 상품입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은(銀0 한가지라고 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선의 대VOC 비교우위는 신묘사행을 다녀간 1710년대를 기점으로 역전됩니다. 한마디로 요햑하면 이때부터 19세기까지 VOC의 대일본 무역량보다 조선의 대일본 수출/수입량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이 무역 시장의 변화는 아라이 하쿠세키를 중심으로 일본의 상황이 변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의 포스팅 “17-18세기 조선채널 무역의 흥망: 2부 - 6”를 참고하세요.

지금 우리가 아까버라 그때 적극적으로 VOC와 무역했어야 하는 거 아님…이 아니라 당시에는 서로 경쟁국가였다니까요…

자, 그런데, 이제 제가 언급한 적이 있는 본론으로 갑니다. 이 김현문이 말을 나눈 아란타인은 누구였을까요? 김현문의 동사록이나 임수간의 동사일기에 아란타인과 조우한 얘기는 기실 비밀이 아니라 번역도 되고 알려진 사실입니다만(그러니 저도 알았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그 만난 아란타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찾아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감에 불타 헤이그의 문서기록고를 뒤진….이 절대 아니라 그냥 재미로 관료주의 기록 보관의 최고봉 국가 네덜란드의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다음편에는 그래서 김현문이 우연히 마주쳐 얘기를 나눈 VOC의 코르넬리스 라르데인을 만나보기로 원래 예고했습니다만, 잠시 옆으로 빠져 김현문과 신묘 사행의 일행 중의 한명이었던 최천약에 대해 먼저 얘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3/3일 추가)

**김현문은 이후에는 상당한 중량급 역관으로 일본에 여러차례 다녀옵니다. 그리고, 신묘 사행 기간 중에는 당시 대마도측의 수행 역관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와 밤늦게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다 "끝내 크게 취하였다'는 얘기도 동사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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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3/02/24 14:11 # 답글

    양자가 이렇게도 조우할 수 있었군요.
  • 迪倫 2013/02/24 14:58 #

    예, 제가 알기로는 이게 유일하게 서로 조우한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VOC 상관장의 기록에 조선에서 온 통신사 행차를 봤다는 기록은 있는데, 이렇게 직접 보고 얘기까지 나눈 것은 유일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 빛의제일 2013/02/24 18:42 # 답글

    '아메노모리 호슈' 아는 사람 이름이 나오니 반갑습니다. ^^ 헤르모드님의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을' 읽었지요.
    덕분에 몰랐던 시절을 알게 되니, 17~18세기가 동네 어르신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사록은 일단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적륜재 마실 오면서 팔자에 없는 역사책 읽기를 합니다.
    책 사재기, 지름으로 대동파산하면 迪倫님 댁 앞에서 구걸해야겠다 생각하니 멉니다. :)
  • 迪倫 2013/02/25 04:13 #

    아메노모리 호슈는 이 신묘사행에 일본측 수석 통역이었습니다. 임수간이나 조태억같은 양반들은 호슈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도 역관이란게 조선에서는 중인계급의 일이어서인지 낮게 보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아라이 하쿠세키 얘기를 할때 호슈도 조금 더 덧붙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시 김현문과는 대충 10살 정도 차이가 났지만 국경, 연령을 초월하고 마음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헤르모드님 책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김현문의 동사록은 의외로 그리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밝힌대로 좀 건조한 일기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행기들이 좀더 감상적인 측면에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말씀 미리 드리면서 살짝 면피합니다...^^

    책사재기 라는 것은 바다 건너에서도 그 폐해가 극심하야 그 동감의 분루가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을 뿐이겠습니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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