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5년 비극의 남이안(南二安), 그리고, 1666년 미스테리 남만요리사 by 迪倫

1627년 동중국해의 템페스트 - 어느 아란타인의 기이한 모험... 벨테브레이의 이야기에서 이어씁니다. 마침 미국 연휴라서 시간이 좀 나서 후닥닥 글을 올립니다.

벨테브레이의 이야기는 실제 26년 후의 하멜의 표착과 탈출이 문제가 되면서 기록에 실려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네덜란드인 또는 서양인의 기억 중 가장 크게 남은 것은 하멜과 일행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1883년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보빙사 일행이 그해 12월 유럽으로 출발하기 위해 뉴욕에 머무를 때 그들을 찾아온 "은자의 나라, 조선"을 쓴 그리피스조차 당시 하멜 이야기를 영어로 옮기는 리서치 번역 작업 중이었고 민영익, 서광범, 변수와 함께 하멜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질문을 했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멜의 일행은 처음 총 64명이었는데 난파 직후 살아남은 자가 겨우 36명이었습니다. 이중 처음 하멜과 같이 탈출한 일행이 8명이고, 이후 데지마에서 바쿠후를 통해 정식으로 남은 인원의 송환을 요구하여 조선에서 대마도를 거쳐 나가사키로 귀환한 일행이 7명입니다. 차이가 무려 21명입니다. 이 21명은 결국 조선에 몸을 묻은 것이죠. 이들에 대한 얘기는 실은 거의 없습니다. 이름조차 남지않은 사람들도 상당수 입니다. 하지만 이중 그나마 연구자들이 찾아낸 두 명의 이야기를 남은 기록을 긁어모아 들려드립니다.

**하멜의 이야기는 워낙 번역본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멜 보고서", 유동익 번역, 중앙 M&B, 2003을 추천합니다. 우선 네덜란드어 전공자가 네덜란드어에서 직역을 한 유일본이고 뒤에 실린 신동규 선생의 해제 역시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자, 이제 처음 난파한 36명의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서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처음 표착한 후 서울로 압송되던 중 영암에서 파울루스 얀서 코올(Paulus Janse Cool)이 사망합니다. 하멜에 의하면 표착 당시의 이미 심한 부상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청나라 사신에게 청원을 하다 옥에 갇힌 일등 항해서 헨드릭 얀서(hendrik Janse)와 포수 헨드릭 얀서 포스(hendrik janse Vos) 2명이 1655년 사망합니다. 이로 인해 훈련도감에서 더이상 있지못하고 전남으로 흩어져서 배치된 남은 인원들은 1659년부터 1663년까지의 대기근때 다시 11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1662년의 하멜의 기록에는 대기근을 겪으며 그래도 여수 (saijsing) 12명, 순천 (sunischien) 5명, 남원 (namman) 5명 등 아직 22명이 건강하게 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666년 여수에 있던 하멜 일행이 먼저 탈출했을때는 여수에서 5명과 순천에 있던 3명이 살아나갑니다. 나가사키에 가서 보고한 남은 인원들은 남원에 3명, 순천에 3명, 그리고 여수에 2명 총 8명을 보고합니다. 최종적으로 조선에서 탈출한 사람은 이 중 다시 한명이 그사이 사망했다고 보고되고 총 15명입니다. 21명이 조선에서 죽었서 묻힌거지요.

이 21명 중에서 먼저 첫번째 인물 남이안(南二安)이라고 불렸던 비극의 사나이를 소개합니다. 배가 좌초하여 표착하였을 당시 이미 선장이었던 레이니어 에흐베르스가 사망하여 리더가 된 것은 실은 서기였던 하멜이 아니라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서(Hendrik Janse 또는 얀ㅅ존 Jansz = Janszoon)였습니다.

17세기말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지은 지영록(地瀛錄)이란 책 중에 있는 “西洋國漂人記”라는 글에 하멜 일행이 제주에 도착한 광경을 굉장히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계사년 7월 24일 서양국 만인 횐듥얌쇤(횐과 쇤은 실은 ㅎ+ᆡ(아래아+ㅣ)+ㄴ, ㅅ+ᆡ+ㄴ 입니다. 활자가 지원이 안되 횐/쇤으로 적었습니다) 등 64명이 한 배에 동승하여 대정현 지방 차귀진하 대야수 연변에서 부서졌다. 익사자가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가 36명이고, 옷을 입은 것이 검정, 흰색, 빨강의 세가지 색깔이 서로 섞여있었다. 머리를 모아 서로 맞대고 웅크려있거나 서기도 하였다. 글로 써서 물으니 십자 셋에 나머지는 여섯을 세고, 거듭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또 십자 둘에 나머지 여섯을 세고 거듭해서 눈을 감고 쓰러지는 모습을 만들어 냈다. 생김새가 괴상하고 의상이 다르게 만들어졌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생존자의 수를 뜻하며, 눈을 감고 쓰러진 것은 사망자의 수이다. 그 생사자의 수를 조사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한왜역과 유구국에 표류했다 돌아온자 모두가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사정을 물어볼 길이 없었다. 남만 서양 등의 사람들이라는 의심이 들어 이것을 계문한 즉, 남만의 표래인 박연을 내려 보냈다 (**아무래도 의사 소통이 안되자 서양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정에 요청을 하여 마침내 벨테브레이가 등장합니다!) 언서로서 문답한 것을 번역하기에 이르러 별지로 치계하였다.

박연과 표만 3인은 첫머리에 서로 만나자 오랫동안 눈여겨 자세히 보다 말하기를 “나와 같은 형제 사람입니다”하였다. 따라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다. 박연 역시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박연은 만인들을 모두 불러 자기가 살고있는 지명을 각각 말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남만 땅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어린이가 겨우 13살이고 이름을 너넷고불쇤(ㅅ+ᆡ+ㄴ)이라고 하는 자가 홀로 서양나라 땅에 있을 때, 박연이 살던 근처 사람이었다. 박연이 자기 친족에 대해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살고 있던 집은 부서져 옛 터엔 풀이 가득하고 그의 아저씨는 돌아가셨지만, 다만 친족은 있다고 하였다. 박연이 더욱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하였다. 박연이 또 묻기를 :”너희들의 의복 제도가 어찌 옛날과 다른가”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떠난 뒤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고 의복제도와 범사가 모두 옛날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중략: 그리고 박연이 이들에게 어디를 가던 중인가 상황을 묻고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박연이 일본의 쇄국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일본에 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하며 함께 서울로 올라가 도감의 포수로 입속하면 몸도 안전하고 의식주에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설득을 합니다.)
만인들은 먼저 이름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을 말했다. 글자를 쓰려면 세로의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써갔다. 글자 모양은 마치 언문같은데 어찌나 비스듬히 흘려쓰는지 깨칠 수가 없었다. 생긴 모양은 눈동자가 파랗고 콧마루가 높고 피부는 어린 사람은 희고 장성한 사람은 황백색이었다. 머리털은 황적색인데 자른 나머지가 앞에는 눈썹까지 드리웠고 뒤에는 어깨까지 드리웠는데 간혹 전부 깍은 자도 있었으며, 혹은 구레나룻은 자르고 콧수염은 남겨둔 자도 있었다. 키는 커서 8, 9척이었다. 남에게 예를 할 때는 모자는 벗고 신발도 벗어 양손을 땅에 짚고 길게 꿇어 앉아 머리를 숙였다. 모자는 바로 전립이었다 (원문은 羊毛氈笠). 소위 그들의 우두머리인 횐듥얌쇤이라는 자는 技舵工(항해사)으로 날씨를 헤아리고 방위를 분별하는데 능하였다. 박연이 거느리고 가서 육지로 나갔는데, 호남의 병수영에 분속시키고 인접토록하여 안주시켰다. 그들 병기인 대, 중, 소포 등의 물건들은 모두 본주(제주도)의 무기고에 유치하였다.

이 글에 보면 우두머리가 횐듥얌쇤이라는 자로 등장합니다. 이 횐듥얌쇤은 실은 Hendrik Janse (또는 Janszoon)을 의미합니다. 하멜의 기록에는 암스테르담 출신의 opperstuijrman 즉 일등 opper 항해사 stuijrman = 영어의 steer-man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남만총에 대한 포스팅에서 소개한 성대응의 연경재전집의 해당 기사 윗부분에는 좀더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습니다.
使之各書名字年歲而譯以諺。爲首者白鷄也。音斯伊隱。餘人名亦多斯伊隱之稱。斯伊隱者。盖如中國之姓氏也。
각자 이름과 나이를 언문으로 쓰게 하였더니, 우두머리의 이름은 백계(=흰닭)이었다. 소리는 사이은(斯伊隱)이라고 하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 역시 사이은이라고 부르는 게 많았는데, 사이은이라는 것은 대략 중국 성씨같았다.


ㅋㅋ 헨드릭을 횐듥으로 적더니 이름이 "흰닭"(白鷄)이로구나 허어 참! 하였군요…이 ‘백계’ 부분의 해석에 오랫동안 모른다거나 그냥 하멜이 대장이니까 하멜을 뜻하는 것이라고 우겨왔다고 하는군요.
이어지는 사이은은 Jan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斯는 왜 붙였는지 이해가 솔직히 안되는데 아마 의미 상의 “이”를 따서 “이인”을 표기한 것이거나 또는 j의 음가가 혹시 있어서 /ᅀㅏ인/을 표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 글 중의 13살 소년 “너넷고블쇤”은 Denijs Govertszen(데네이스 호베르천, 외래어 표기법으로 go를 호라고 적지만 약간 목에서 내는 소리로 ㅎ/ㄱ 비슷한 소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을 의미합니다. 13살이면 바로 VOC 최말단 배의 급사인 Jonge(용어)입니다. 이 소년은 나중에 25세 청년이 되어 하멜과 함께 1진으로 탈출을 합니다.**

박연은 당시 휘하에 항왜들도 거느리고 있었고, 또 조정에서 일본의 쇄국 정책에 대한 여러가지 조치를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들이 표류하기 전인 1640년대에는 일본과 조선이 공동 협조를 하여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일본을 목표로 잠입하려던 기리시탄 즉 선교사들을 지속적으로 적발 처형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경험한 지난편에 설명한 나위츠 사건처럼 일본과 VOC의 여러가지 불편한 관계를 짐작하여 이들에게 일본으로 가봐야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설득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벨테브레이로 살던 시절이 이미 너무 오래되어 심지어 옷조차 달라져 있었는 것도 몰랐던 것처럼 1650년대의 VOC는 이미 일본과 독점 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니 여기서 나와 편히 살자고 한 것이 그가 진심으로 믿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 표류인들은 그사이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VOC도 더이상 사략선 영업을 하지 않았고 동중국해 내해의 충실한 무역시스템의 한 부분이 된지 오래였던 것이죠. 여기만 벗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할까요.

일등항해사 “백계”는 그래서 1655년 하를렘 출신의 포수 헨드릭 얀서 포스와 함께 청나라 사신이 왔을때 나무하러 가는 척하다 숨어서 사신 일행에 뛰어들어 한복 안에 입었던 네덜란드 옷을 보이며 신원을 호소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효종 6년 3월 15일조의 승정원 일기에는 아수라장이 된 사신 행렬 보고를 듣고 급히 만인들을 점호를 실시하니 남이안(南二安)과 남북산(南北山) 두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청나라 원접사 보고서를 받고보니 행렬에 뛰어든 것이 남북산이고 달아난 자가 남이안이라는 것을 파악한 얘기가 실려있습니다.
달아난 남이안을 잡기위해 수색대를 꾸려 창의문 안팎의 여러 산과 성안의 여러 도로를 살폈는데, 동영에 근무하던 군병이 (지금 혜화동에서 돈암동 넘어가는) 동소문 길위에서 그를 발견하여 발에 족쇄를 채우고 보고하기를 칼과 족쇄를 채워 옥에 가둘까요 하고 문의하자 명령을 내리기를 알았다며, 잘 타일러 마음을 안심시키고 한편 행동을 잘 관찰하라고 합니다.


나흘 뒤인 3월 19일(승정원 일기)에는 하지만 비변사에서 동소문에서 붙잡힌 남이안뿐 아니라 청 사신에게서 남북산을 인수받아 보고를 받고 훈련대장의 명으로 엄히 가두라는 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한달 가량 뒤인 4월 25일 효종 실록에는 남북산이 초조하여 먹지않고 죽으니 조정이 매우 근심하였으나, 청국사람이 끝내 묻지않았다. 하고 마지막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남이안의 기록은 없지만, 하멜에 의하면 자신들은 접근도 할 수 없었고 이후 둘 다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남이안과 남북산이 바로 헨드릭 얀스와 헨드릭 포스입니다. 남(南)이라는 성씨는 이들이 남만인이라서 붙은 성입니다. 모두 훈련도감에 편입될 때 호패를 받았다니 다른 사람들도 한국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현재는 이 두명의 한국 이름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과 효종대의 조선은 여전히 서로 의심을 거두지않고 언제라도 다시 전쟁에 휘말릴 수 있을 정도로 긴장감이 돌았던 시기입니다. VOC는 타이완을 거점으로 중국 무역을 지속적으로 활성화 하려 하였지만 중국 내부의 복명운동이 아직 마무리되지않고 해금정책 역시 유효하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막강 화력에 대한 정보는 청나라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 VOC출신의 포수들이 조선 한양땅에 최정규 엘리트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은 청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이 사건을 무마하고 난 후 아예 모두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극단적인 방안이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신 일행 모두 목숨은 살려두되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전남으로 분산 수용되고 그 다음은 잘아시는 탈출성공이 이어집니다.

한편 일본은 하멜 일행이 나중에 나가사키로 도망쳐 오자 박연때와는 달리 아란타는 자신들의 속방이라며 조선에 왜 그들을 넘겨주지 않았는지 추궁을 하고, 그러자 조선은 박연 당시 왜관에서 모르는 일이라고 인수를 거부했던 사례를 내세워 책임을 무마합니다. 요즘의 일반적인 해석처럼 왜 그들을 활용하여 서구 문명을 배우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자칫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외교문제를 촉발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문제를 그나마 일본으로 이들을 돌려보냄으로 해결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헨드릭 얀서, 또는 횐듥얌쇤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머나먼 이국 조선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0명의 사람들도 대동소이하게 조선에서 모험의 연속이었던 그들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중에 한명은 지금도 논란이 좀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의 두번째 소개 인물 얀 글라에천 입니다.

하멜이 나가사키에서 조사를 할 당시 조선에 8명이 남았다고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만, 실제 2차로 송환교섭으로 나가사키에 온 사람은 7명이었습니다.

1666년 송환 당시 49세였던 원래 배의 요리사였던 얀 클라에천(Jan Claeszen)은 송환 전에 사망했다고 통보가 되었습니다. 일본측에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표류인 송환관례에 따라 그리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잔류인원이 8명이라고 했는데 7명만 데러가면 상당한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그렇다면 그 시신이라도 소금에 절여 같이 송환시키기를 요청하였는데, 사망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입회한 상태에서 관없이 그대로 매장하여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사망으로 처리하고 마무리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운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만 아쉽게 죽고 말았구나 싶은데, 여기서 약간의 미스테리한 반전이 전개됩니다.

이들이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 당시 암스테르담 시장을 여러차례 역임하고 실제 VOC의 거버너 즉 고위층 이사 중의 한명이기도 했던 저명인사 니콜라스 비천(Nicolas Witsen)이 이들을 인터뷰하여 자신의 책 “Noorden en Oost Tartarije”(북부 및 동부 타르타르)에 이런 저런 증언들을 포함시켰는데, 이 얘기 중에 다른 생환자들이 말하기를 “그가 결혼도 하고 절대로 기독교인이나 네덜란드인으로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Hij was aldaer getrouwt en gaf voor geen hair aen zijn lyf meer te hebben dat na een Christen of Nederlander geleek)” 조선에 남았다는 증언이 남아있습니다.

이 기사 한줄이 그래서 수많은 연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아마 자발적으로 조선에 남은 사람이 있었으며 그게 얀 클라에천이라는 주장을 하게 하였고, 실은 아직도 결론이 없이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인터넷에 그래서 남은 자손들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실은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로는 박연의 남매 기록만이 공식적으로 유일한 네덜란드인의 후손 기록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일행들도 결혼해서 자식을 둔 경우가 있다는 증언 역시 같이 있으니, 어쩌면 그중의 얀 클라에천은 정말 너무나 가지않고 남고 싶다하여 동료들이 대신 공식적으로는 조선에서 사망으로 거짓말을 하고 그를 떠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공식 사료 이면의 삶의 예측 불가능이랄지 드라마틱함은 떄로 상상 너머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남원에서 살고 있었다던 얀 클라에천은 식구들을 데리고 원래 요리사였으니 네덜란드 음식을 요리해서 주막을 하면서 행복하게 숨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남원의 명물 추어탕은 원래 청어 헤링으로 만들던 암스테르담 음식이었다능....것은 농담입니다.ㅋ

원래 네덜란드 VOC얘기를 자주 다루면서 하멜에 대한 얘기는 여기 迪倫齋에서까지 다룰 필요는 없다싶어 그동안 일부러 피해오다 시피 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그렇다더라 하는 베끼고 또 베낀 이야기들과 혼동되고 싶지않다고 할지 실제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가지 논란도 많고 해서 뭐 그런 마음이었습니다만, 아무튼 박연과 흰닭이라고 불렸던 남이안, 그리고 어쩌면 조선에 자발적으로 남았을지 모르는 이 사람의 얘기는 와유록의 여정에 짧게라도 꼭 포함시키고 싶었습니다.

자, 다시 와유록의 여정을 계속 가봅시다. 17세기 초반과 후반의 이런 해프닝을 끝으로 우리는 19세기까지 서양인 특히 네덜란드인들과는 더이상 접촉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어라, 전혀 다른 곳에서 그들과 조우한 사람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제 시간은 다시 뒤로 돌려 1712년 연초, 오랜간만에 다시 나오는 역관계의 전설 김지남과 큰 아들 경문이 함경도에서 오라총관 목극등을 맞이하러 두만강 국경으로 올라가던 때, 김지남의 또다른 아들 김현문은 전혀 다른 곳에서 공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모험담은 아니지만 그 역시 기묘한 사람들과 마주칩니다. 다음편에서는 역관 김현문을 만나봅시다.

**추가합니다. 이번 포스팅의 한문 번역은 제가 발번역했다고 밝힌 것 외에는 대부분 신동규 선생의 책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 경인문화사, 2007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하멜과 관련되어 자세히 알고싶으시면 강추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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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세한 정보는 여기 클릭. 참고로 그동안 제 글에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한 글들을 다음과 같습니다: (제목을 클릭하면 됩니다) 1. 1655년 비극의 남이안(南二安), 그리고, 1666년 미스테리 남만요리사: 조선에 잔류한 하멜 일행에 대한 이야기 2. VOC와 인삼의 나라 코레아: 근세 아시아 인삼에 대한 이야기 3. 먼 이국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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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다루는 두 개 문장을 소개합니다. 1. 우선 적륜 님의 포스팅, 1655년 비극의 남이안(南二安), 그리고, 1666년 미스테리 남만요리사에서 따옵니다. 니콜라스 비천(Nicolas Witsen)의 북부 및 동 ... more

덧글

  • 빛의제일 2013/02/19 20:46 # 답글

    불쌍한 흰닭, 내일 닭튀김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달걀이나 삶아먹어야겠습니다.
    저는 놀라운, 재미난 이야기로 생각했던 이면에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있구나 싶고,
    얀씨가 행복하게 살았기를 바랍니다.
  • 迪倫 2013/02/20 09:14 #

    달걀이나 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왕 흰닭을 기려 닭튀김으로 하시는 것이 더욱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ㅋ.

    남이안의 얘기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래도 요리사 얀씨는 어쩌면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르니 저도 그냥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 행인1 2013/02/19 22:50 # 답글

    하멜일행이 청나라 사신과 조우한게 그렇게나 큰일이었군요.(아직 효종대였으니)
  • 迪倫 2013/02/20 09:20 #

    청나라 사신이 입 다물어 주는 대신 뇌물을 엄청 줘서 무마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다행히 그래서 넘어갔다고 하는 군요. 청나라 사신에게 넘어갔으면 확실히 조선이 좀 곤란해지긴 했을겁니다. 게다가 청나라와 VOC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기간이라 오히려 투옥되어 중국에서나 아니면 마카오로 실려가 죽었을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 리리안 2013/02/19 23:01 # 답글

    그런데 벨테브레이는 나름 등용 된 것 같은데 하멜 일행은 나중에 지방에 배치된건 결국 충성도 문제였나요?
  • 迪倫 2013/02/20 09:27 #

    일단 벨테브레이는 초창기부터 구인회 대장같은 실세의 휘하로 들어간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병자호란에 직접 참전해서 공을 세웠을테니 여러가지로 조선측에서는 그냥 조선인으로 간주했습니다. 무과 급제의 기록도 추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멜 일행은 이에 비해 인원이 많아 조선측에서 통제가 어려운 점도 있었고, 나름대로 특기를 파악해서 훈련도감 소속으로 "배려"를 하고 있는데 이런 중대 사건을 일으킨게 결정적인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 시쉐도우 2013/02/20 00:41 # 답글

    화란국에서 청어로 만들던 요리에다가 조선산 양념을 팍팍 넣어서 만든 (본격 퓨전음식!) 남원추어탕(???)은 감환에 걸렸을 때 먹으면 땀을 빼면서 온기를 돋우더이다.

    일설에는 해남지역에 화란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걔중엔 기골이 장대하고 홍모인 자가 드물잖다고 하더군요.(벽안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그것과 비슷한 나막신도 만들어 신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국내 언론보도라 좀 깎아서 받아들여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수년이상 국내에 거주했는데, 혼혈아해 몇 정도는 생산하지 않았겠습니까? 심증은 가나 물증이 확실찮아서 말입죠.

    조선이 저때 제대로 대우해서 외인부대를 좀더 확장시켜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청국과 한참 긴장타고 있던 상황에 저런 일이 벌어졌으니 조정관료들은 모골이 송연했긴 하겠지만, 당시 대우가 그닥 좋잖았던 듯 하니, 벨터브레이 처럼 귀화를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 迪倫 2013/02/20 09:35 #

    ㅎㅎㅎ 네덜란드식 퓨전 추어탕이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면 정말 재미있을텐데요...(이러다 인터넷에 남원추어탕 네덜란드 원조라고 근거없이 퍼지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해남에 후손 추정설은 저도 들었습니다. 이게 따져 올라가면 실은 19세기 유럽인들 사이에 도시전설같은 내용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제가 별도 포스팅으로 나중에 19세기 후반 유럽인들 사이에 퍼진 코레피언(코리언+유러피언) 전설을 따로 다뤄보겠습니다. 여기서 결혼을 하고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 역시 위에 언급한 비천의 책에 나오는 얘기인데, 비천이라는 사람이 프로파일을 보듯이 그리 허투루한 사람은 아닙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고급 정보에 접할 수 있고 신빙성이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단은 고 정도까지만 저도 얘기를 더 확대시키지 않으려고요.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냥 관할 관리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에 따라 체류한 10 수년 동안 대우가 냉온탕을 반복했더군요. 청나라 사신 사건만 아니었으면 훈련도감에서 제법 좋은 대우를 받았을텐데, 반대로 그랬으면 배를 구해 탈출도 어려웠을 거고. 인생의 주사위는 어디로 던져질지 가늠키 어렵다고 할지 그렇습니다....
  • 밥과술 2013/03/08 03:19 #

    남원추어탕이 이렇게해서 생긴거로군요...ㅋ

    근데 선농단에서 설렁탕이 나왔다는거보다 더 그럴듯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뭔가 짠합니다... 타향에서 젊은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 迪倫 2013/03/10 14:47 #

    밥과술님/ ㅋㅋ 이러다가 남원추어탕 네덜란드 유래설이 인터넷에 퍼지지는 않겠죠^^

    왠지 이들에 대한 얘기는 흰닭처럼 재미있다든지 정말 조선에 남았을까 싶은 호기심과 상상이 있는 한편으로 왠지 마음이 짠한데가 있어 꼭 소개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 르-미르 2013/02/20 21:42 # 답글

    항상 재밌고 유익한 글들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ㅎㅎ
    관심사가 일본의 기독교사쪽이다보니 40년대에 조선과 일본이 함께 선교사들을 적발했다는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
  • 迪倫 2013/02/21 11:48 #

    안녕하세요, 르-미르님. 재미있게 읽고 있으시다니 감사합니다.
    궁금해하신 조일간 키리시탄 적발 공조체제...(라고 너무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나 싶은데)...실제 1630년대 후반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되고 난 후 에도 바쿠후가 거의 패닉 상태에서 조선에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아직 절강 복건쪽에 정성공의 반청 복명투쟁이 지속되고 있던 시기라서 당시 일본으로서는 협조 요청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조선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중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을 우회하여 일본으로 가려던 시도가 이 공조체제로 인해 적발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얘기가 이렇게 가볍게 정리하기에는 좀 길어서 대신 이 다음 포스팅에서 같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와유록 시리즈에서 한 서너편 뒤면 어차피 이와 관련된 얘기를 하려했으니 그때 포함시키도록 하죠^^

    궁금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 실은 일본의 기독교사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17-18세기의 유럽인들과의 교류측면만 정말 조금 관심이 있는 정도입니다. 그점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아무튼 자주 들러서 얘기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 푸른별출장자 2013/03/10 17:23 #

    일본 기독교 사라면 조선 출신의 성녀 줄리아는 당연히 알고 계시겠고...

    도쿠가와 막부 시절 유독 나가사키 앞 섬만 열어 놓고 그나마도 네덜란드인만 출입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기독교가 가진 파괴력을 두려워 해서 비슷한 입장인 조선과 함께 이런 관련으로는 업무 협조를 긴밀하게 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민 평등이나 그런 신앙적 파괴력도 크지만 선교를 핑계로 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양 쪽 모두 공히) 국가의 침공이 두려웠던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훗날 의화단 사건이나 황사영 백서, 제주도 이재수의 난 등이 모두 그런 예측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 迪倫 2013/03/14 11:45 #

    푸른별출장자님/ 동아시아에서는 말씀대로 아무래도 기독교가 갖는 위험성(?)이 사상 자체로나 외세와의 결탁(!)이라는 점에서나 화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황사영 백서는 시리즈에 조금 언급할 것 같습니다. 이재수의 난은 개인적으로 관심은 있는데,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덧글 감사합니다!
  • net진보 2013/03/27 12:52 # 답글

    하멜일행이 유배된 까닭이 저런 상황이 있었군요 ㄷㄷㄷㄷ박연같은경우 오랫만에 동포를 보고 얼마나 기뻤을지 참 .....
  • 迪倫 2013/03/27 12:57 #

    하멜 일행은 조선이 무조건 몰라보고 잡아둔게 아니라 나름대로 배려를 하고 활용을 하려 했는데 외교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경우입니다. 대신 그 덕분에 탈출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박연은 돌아와서 소매가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다는 기사가 남아있습니다.
  • 2013/04/05 16:1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迪倫 2013/04/07 11:47 #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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