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동중국해의 템페스트 - 어느 아란타인의 기이한 모험... by 迪倫

17세기 독일인의 기묘한 모험 에서 이어 씁니다. 심플리치우스의 코리아 에피스드의 원형이 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들 중의 한명을 만나봅시다.

We all were sea-swallow'd, though some cast again,
And by that destiny to perform an act
Whereof what's past is prologue, what to come
In yours and my discharge.

The Tempest: Act 2, Scene 1
우리는 모두 바다에 삼켜졌었다, 비록 몇몇은 다시 떠올랐지만,
그리고 연극을 펼쳐야 하는 그 운명에 의해
과거는 다가오는 것의 서막이요,
그대와 나의 내어놓음 속에서. 템페스트 2막 1장


1624년 1월 8일 네덜란드 북부의 테설(Texel)에서 플라위트(fluyt)선 700톤 선급의 홀란디아호가 일단의 선단과 함께 바타비아를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이 항해에 승선한 한 사람에게는 이 출항이 그로부터 마치 심플리치우스와 같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생의 모험담이 시작됩니다. 출발한지 반년이 지난 7월 16일 마침내 목적지 동인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배가 도착합니다. 처음 출발할때 선원 183명, 병사 92명, 그리고 승객 55명이 승선하였는데 항해 도중 50명을 잃고 285명이 바타비아에 도착하였습니다.

홀란디아호로 바타비아에 도착한 일행은 이후 바타비아에서 흩어져 각자 업무를 맡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뒤 이들 중 일부의 선원들이 1627년 5월 12일 당시 피터르 나위츠(Pieter Nuyts) 타이완 총독을 따라 보다 규모가 작아 역내 항해에 이용되던 야흐트(jacht)선급의 아우베르케르크(Ouwerkerck), 호이스던(Heusden), 슬로턴( Sloten) 그리고 퀘다(Queda)에 나눠 타고 타이완의 포트 제일란디아(지금의 타이완 남부 안핑)으로 출발하여 한달 조금 지난 6월 23일 타이완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막 자리 잡은 타이완의 VOC 거점 요새인 포트 제일란디아(For Zeelandia)를 기지로 하여 복건성 아모이 일대의 무역과 사략선(해적!!) 영업에 투입됩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28일 계절풍을 타고 일본으로 출발할 예정을 잡아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당시 중국 아모이를 직접 공략하여 타이완에 자리를 잡은게 불과 5년전인 1622년, 중국으로부터 실크 공급을 확보한 VOC는 이제 포르투갈을 배제하고 일본으로부터 은을 직접 공급받기 위해 1600년대 초부터 심혈을 기울입니다. 아직 나가사키가 아니라 히라도가 주 무역항이고 예수회가 완전 추방은 당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바타비아의 특별 위원회에서 타이완 총독 나위츠를 일본에 대사로 임명하여 파견하기로 했고 그 여정을 준비 중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 1600년부터 1630년까지의 30년간은 당시 동인도 해상의 최강 포르투갈을 네덜란드 VOC가 지속적으로 공략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태클이 들어와 나위츠의 일본 사절단 미션은 실은 실패로 끝납니다. 야효에라는 일본인이 타이완에 대한 연고를 주장하며 에도 바쿠후에 동시에 청원을 하는 바람에 피터르 나위츠는 아예 에도 바쿠후로부터 만나지도 못해보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나위츠는 아예 이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안방 집무실에서 공격을 당하고 인질을 잡히고 그로 인해 일본과 VOC의 무역이 잠정 중지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632년까지 나위츠가 일본에 가서 구금을 당하는 굴욕의 패널티를 받고 1632년 후에야 협상이 성립되어 다시 무역이 재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예전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룬적 있습니다.(여기 클릭)

하지만 1627년 아직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지 못한채 일본과의 무역을 협상하기 위해 나위츠를 태우고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던 배들 중의 하나인 아우베르케르크호는 일본 출항 예정 며칠 전인 7월 16일 타이완과 아모이 사이의 바다에서 중국 정크선을 하나 나포합니다. 정크선에는 중국인 150명이 타고 있었는데 70명을 아우베르케르크로 올려보내고 대신 승무원 16명이 이 정크선에 승선을 합니다. 당시 VOC의 관행대로라면 실크나 은같은 화물을 빼앗고 어차피 중국측에서는 구하려는 의지도 없는 중국인 포로들은 바타비아로 실고가서 노예로 판매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는 바로 7월 한참 태풍이 부는 시기입니다. 그만 태풍에 휘말린 아우베르케르크호와 이 중국 정크선은 다른 VOC의 배들과 헤어져서 높은 파도 너머로 사라져 버립니다.

태풍에 휘말려 일행과 흩어진 아우베르케르크호의 선장은 태풍 속에서 놓친 정크선을 포기하고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가 다른 배들에 합류하는 대신 좀더 남쪽으로 선수를 돌려 계절풍를 타고 일본 규슈의 히라도로 무역을 하러 올라오는 포르투갈 배를 좀더 공략하기로 합니다. 과연 얼마 되지않아 5척의 포르투갈 무역선을 발견한 아우베르케르크호는 흐흐흐 그럼 슬슬 공략해볼까 하고 접근을 하다 반대로 이미 동중국해상에서 골치거리인 네덜란드 해적놈들을 처치하기 위해 무장을 하지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있던 포르투갈 동인도 해군에게 나포되고 맙니다. 선장과 33인의 선원들은 아우베르케르크호와 함께 마카오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고 배 역시 본보기로 공개적으로 불살라지고 맙니다.

바타비아에는 일부 중국인 해적들의 소식을 통해 아우베르케르크호가 포르투갈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해 10월의 장부 기록에 침몰선으로 기재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생겨난 발단인 그 7월달의 태풍으로부터 한달 가량 후인 1627년 8월 10일 히라도(平戶) 상관에 소형 정크선이 하나 도착합니다. 놀랍게도 태풍에 아우베르크와 헤어졌던 중국 정크선에 타고있던 선원들 중 12인이 이 소형 정크선을 타고 거의 떠내려오다시피 살아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태풍으로 모선 아우베르크와 헤어진 후 정크선이 물이 심하게 새어 결국 버리고 여러가지 비참한 사건들을 겪은 후 드디어 작은 정크선을 타고 히라도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처음 정크선에 올라탄 16인 중 4명이 사라지고 12인이 돌아왔습니다.

리와인드를 해서 다시 보면, 이들이 원래 처음 나포하여 올라탔던 중국 정크선은 태풍이 불때 완전 반대로 불려 갔었습니다. 한참을 떠내려 간후 섬이 보이자 3명이 우선 그 섬에 가서 식수를 구하기로 하고 배를 내려갔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이 없어 더이상 알 수 없는 무언가 사건이 정크선에 있은 후 이들 3명을 섬에 남겨두고 정크선은 떠나버립니다. 짐작하기로는 정크선에 있던 중국인들이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잡은 남만인들에게 대항하여 다시 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포로로 잡고 떠나버린 것 같다고 합니다.

낯선 섬에 떨어진 이 3인은 밤이 되자 멀리서 횃불들이 몰려오자 아! 식인의 섬에 도착했구나. 이들이 우릴 이제 불에 구워먹으려나 보다 하고 하늘을 보며 울부짖습니다. 다행히 식인종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코리아의 남단 섬인 퀠파트였습니다. 예, 조선땅 제주도였습니다.

이들을 체포한 섬의 총독 대장은 이들을 당시의 관례대로 신원이 확인되는 표류인 송환에 대한 관행을 따르려 이들에 대한 심문 조사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남만인도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 관행이지만, 문제는 이 1627년이 바로 정묘호란의 해, 당시 한참 후금의 공세로 남명 정부로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산으로 보내 왜관에 통보하고 인수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마도에서는 이들을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인수를 할 수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앞서 설명한 것처럼 1627년 ~ 28년 나위츠의 해프닝을 통해 에도 바쿠후가 네덜란드 VOC에 대한 무역제재를 시행하고 있던 때입니다. 아직 포르투갈도 자유스럽게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던 중이고 대마도는 조선 무역을 가지고 이들과 힘겹게 일본 내에서 경쟁을 하던 시기 입니다. 대마도에서는 이들 홍모인들을 아직 모르거나 혹은 국내 사정에 의해 아예 관여하지 않으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튼 4-5년 가량 동래에서 낙동간 오리알이 되어 있던 이들 일행에게 한양으로 올려보내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이들을 인수한 사람은 바로 인조반정의 공신인 포도대장 구인후(1578-1658)이 었습니다. 이들의 포술을 높이 산 당시 군부의 실세 구인후 대장은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하여 중국에서 망명한 한족과 임란 이후 조선에 귀화한 항왜 부대를 담당하는 중간급 사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그러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들 역시 전쟁에 동원되어 조선을 위해 싸우다 이 중 두명은 전사를 하고 나머지 한명만 살아남습니다.
이 살아남은 한 사람이 유명한 바로 벨테브레이 Weltevree, 즉 박연(朴淵, 朴延, 朴燕, 朴仁)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실은 레이야드와 신동규 선생의 연구 내용, 그리고, 제가 찾은 VOC 데이터를 조합하여 시간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물론 연구자들 간에 해석에 대해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기 적은 것은 모두 배시황전같은 소설이 아니라 팩트들입니다.

벨테브레이의 이름은 얀 얀서(Jan Janse) 혹은 얀 얀스존(Jan Jansz = Jan Janszoon)입니다. 미들 네임인 얀서나 얀스존은 모두 영어의 Johnson하고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그의 이름을 만어(蠻語)로 박연이라고 했다는 기록에 따라 벨테브레이를 비슷한 발음의 ‘박’씨로 삼고 ‘얀’을 따서 연(淵, 延, 燕, 한군데는 朴仁으로 되어 있음)으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록 중에 “박연의 원래 이름은 호탄만이다 (延初名胡呑萬)”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인터넷의 지식인은 중국이름이라고 무슨 근거인지 모를 소리도 했지만,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네덜란드어 Hoofdman(호프트만)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hoofdman은 머리를 의미하는 hoofd와 사람-man의 복합어인데, 제글을 계속 읽어오신 분들은 혹시 비슷한 단어를 본 적있는데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름아니라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의 상관장을 opperhoofd라고 불렀습니다. opper는 영어의 over 독일어의 uber하고 같은 단어입니다. 즉 최고 우두머리라는 의미이지요. VOC의 관리직 구성은 주로 이 상위 및 하위 hoofd로 불립니다. 예를 들면 opperhoofd – hoofd – onterhoofd 처럼 영어로 한다면 overhead – head - underhead같다고 할까요.(한국어 위키에 opperhoofden이라고 적혀있는 것은 복수형입니다)
실제 hoofd는 프로토 인도유럽어의 kauput/kaput(머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 kauput이 프로토 게르만어의 haubuden 으로 변형되고 다시 독일어의 haupt, 네덜란드어의 hoofd, 중세영어의 heaved/heved/heed를 거쳐 현대 영어 head처럼 분화된 단어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 상관장을 카피탄(カピタン 甲比丹,甲必丹,加比旦)이라고 불렀는데, 이 카피탄은 VOC이전에 일본이 주로 무역을 했던 마카오 포르투갈의Capitão–Mor 가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 "카피탕 모르"는 영어로 치면 캡틴 메이저, 즉 총 대장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capitão이라는 단어 역시 프로토 인도유럽어의 kaput이 라틴어 caput/capitaneus로 다시 로망스어에서 프랑스어의 capitaine, 스페인어의 capitán, 포루투갈어의 capitão이 된 것이니 기본적으로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VOC의 커리어는 실은 Jonge라는 13-16세의 어린 사환에서 시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한달 3-4 플로린을 받으며 회사일(배 위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한 후 30년 정도를 태풍과 전투에서 살아남고 버티면 상관장급의 오페르호프트가 됩니다.

벨테브레이가 처음 표착하였을 때 그를 다른 두명의 선원이 호탄만, 즉 호프트만이라고 불렀다니 아마도 30대 중후반의 중간 관리자급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조선으로 떠내려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인들에게 당하거나 또는 동중국해 어디선가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VOC를 통해 동인도로 나간 인원이 백만명도 넘는데 그중 네덜란드로 돌아온 인원은 3분의 1밖에 되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18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오란다인은 40살까지 밖에 살지못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 영혼들이 바다에 삼켜졌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클릭)

그렇지만 이렇게 병자호란에서도 살아남은 박연은 대략 70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한참 조선에 자리를 잡고 살던 17세기 후반 동시대에 효종의 부마였던 정재륜이 쓴 한거만록(閑居漫錄)에는 그가 결혼하여 남매 각각 하나씩 두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한거만록에는 또한 그가 매번 선악화복의 이치를 말하며 하늘의 보답이 있다는 얘기를 즐겨하여 도가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고도 하며, 또다른 그에 대한 기록인 18세기 후반의 윤행임의 석재고(碩齋稿)에는 조선에 표착해 와서 살던 외인들 중에 하이(蝦夷) 즉 에조인인 세류두우스는 임진왜란때 왜군의 선봉이 되었는데 박연은 남만포를 제작하는 공은 세웠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며 찬사를 바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세류두우스에 대해서는 블로그 이웃이기도한 헤르모드 김시덕 선생의 “제주에 표착한 일본인 세류두우스는 누구인가 - 윤행임 『석재고』를 통해 보는, 조선시대의 일본 임진왜란 담론 수용양상-,『일본학보』86 (한국일본학회, 2011•2) 라는 흥미있는 연구가 있습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조선을 집으로 삼은 박연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가 기록을 남겼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개인적으로 박연의 이야기가 연구와 더불어 영화같은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의 일생이 유명한 하멜보다 실은 휠씬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다시 길어졌습니다. 원래 알려지지 않은 또다른 아란타인에 대해 얘기를 하려는데 다음으로 넘겨야 겠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벨테브레이와는 다른 이유로 혹은 같은 이유로 조선을 결국 떠나지 못한 또다른 네덜란드인 남이안(南二安)과 그의 일행들을 만나봅시다.

**이번 포스팅에 사용된 자료는 일차자료로는
홀란디아 관련 자료는 De VOC. Scheepvaart tussen Nederland en Azië 1595-1795 (VOC 네덜란드와 아시아 간 선박자료: 1595 - 1795)
피터르 나위츠에 대한 자료는 Bladen over Japan: Met eene afbeelding van Decima (1852) (일본에 대한 잡지: 데지마 풍경
)
한거만록 - 정재륜, 석재고 - 윤행임, 연경재전집 - 성해응,

그리고, 2차 자료로는 신동규 선생의 “근세 동아시아 속의 일조란 국제관계사”, 경인문화사, 2007
“Vermeer’s Hat – The seventeenth century and the dawn of the Global world”, Timothy Brook, Bmoomsbury Press, 2008 입니다. 그외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질문해주세요.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번 포스팅과 다음 포스팅에 언급될 나위츠와 벨테브레이 및 하멜에 관련된 당시 동아시아 해상 및 무역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위의 내용들을 조합하여 제가 내린 결론이니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전혀 언급이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학교 숙제로는 인용을 하시지 마시거나 아니면 제 블로그를 출전으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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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3/02/18 14:03 # 답글

    벨테브레의 표착에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 迪倫 2013/02/19 12:08 #

    벨테브레이의 모험이 하멜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것은 시기적으로 아직 VOC가 해적질을 공공연히 하고 있고 포르투갈과 한참 주도권을 다투던 시기라서 더욱 에피소드가 많아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 불별 2013/02/18 14:30 # 답글

    반년의 항해동안 인명손실율이 15%라니.. 이게 일반적인 수치였나요?;
  • 迪倫 2013/02/19 12:12 #

    먼저 대답 드리기 전에 제가 다른 기록들을 더 많이 살펴보거나 통계 자료를 본것이 아니라는 점 알려드립니다. 다만 제가 본 자료들의 경우, 일단 바타비아까지 도착한 배들은 인명 손실률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배 자체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정 기간을 기준으로 잡고 그 기간 출항한 배들의 전체 인명손실률을 보면 아마 휠씬 수치가 높아질 것같습니다. 다행히 운 좋게 살아서 도착한 경우는 수치가 낮게 나오고요. 통계에 간혹 나오는 고전적인 오류 중의 하나입니다만. 예를 들어 업계에 보면 헤지펀드의 수익률이 일반 펀드보다 훨씬 높은 것은 헤지펀드는 손실이 나면 아예 환매를 해버리니까 마이너스 수익률이 계산에 아예 포함되지 않아 그렇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 알파캣 2013/02/18 19:03 # 답글

    좋은 글 잘 읽구가요 : )

    여담으로.. 실례지만.. 질문 하나만 드려두 될까요? ^^;

    만약 19세기 초반에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동양에 가본적이 없는)이

    동양인을 보면 엄청 놀랄까요?.. 아니면 조금 놀라는 정도일까요(?) ^^;

    그런 사람들이 책이나 그림으로 동양인에대해서 접해볼 기회가 있었을까요?
  • 迪倫 2013/02/19 12:26 #

    안녕하세요, 알파캣님. 저기 플린트락 머스킷을 그리시는 분이시군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해주신 것은 제 생각에는 아마 19세기 초반이라면 그리 놀라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8세기에는 동아시아가 아직 상당히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걸리버 여행기 같은 곳에도 일본이 라퓨타와 같이 등장할 정도입니다만,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인도와 중국에 대한 무역이 상당히 관례화 되면서 그렇게까지 신비한 이국은 아니게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이미 코친차이나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고, 광둥 지역에는 영국, 네덜란드 외에도 스웨덴, 미국 등 각국의 배들이 드나들고 있었는데다가 서구에도 상당히 중국풍 도자기 그림이 유행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덜란드같은 곳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네시아인들 같은 아시아인들이 보여지고 있었으니 그리 엄청난 쇼크는 아니었을겁니다.

    다만 독일인이나 특히 동부 유럽지역 출신이라면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에 아직 동아시아에 발을 들이밀지 못하고 있었으니 보면 상당히 놀라는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혹시해서 알려드리는데 좋아하신다고 한 나폴레옹 시대에 해당하는 글들이 카테고리 "出島物語 - Decima verhaar"에 실려있는 헤드릭 두프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질문도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리고, 올리시는 플린트락 머스킷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 알파캣 2013/02/19 12:34 #

    정말 감사드려요 ^^

    플린트 락 머스킷 출판 고증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xD
  • 迪倫 2013/02/19 13:02 #

    저야말로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
  • 검은하늘 2013/02/18 19:51 # 답글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못 찾거나 없어진 게 맞지 않을 까요?

    조선도 조선이지만 개척자들이 기록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는 거도 웃기는 거죠..
  • 迪倫 2013/02/19 12:34 #

    저는 조금 다른게 생각하는게 어쩌면 박연은 일기같은 기록을 남길 정도의 글을 쓸 줄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하멜은 서기였지만 벨터브레이는 포수였던 것 같고...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이름 정도나 간단한 인스트럭션 정도가 아마 최대한이었을 겁니다.

    모르죠, 하멜 일행을 처음 조사하러 갔을 당시의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살면서 한글은 배웠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도 정말 찾아내지 못한 그의 기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빛의제일 2013/02/18 20:15 # 답글

    학교 숙제는 아니고 학교에서 이야기는 해도 될런지요? ^^
    벨테브레에게 마음만 안쓰러웠지 저간의 사정은 몰랐는데, 아이고... 싶습니다.
    벨테브레가 남원 박씨의 시조라고, 어디서 주워들었습니다.(출처는 모릅니다. ^^;;)
    작년에 '탐나는도다' 만화책이랑 dvd 지르기만 하고 아직 보지 않았는데, 지금 읽는 책 후딱 헤치우고 봐야겠습니다.

    덧글 올리고, 찜찜하여 남원 박씨 구글링하니 시조는 다른 분이고, 벨테브레는 원산 박씨의 시조라고 나옵니다.

  • 迪倫 2013/02/19 12:38 #

    ㅎㅎ 학교에서 얘기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해석 상의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들을 종합한 것이니 그리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원산 박씨 이야기는 인터넷에는 엄청 나오는데 전부 같은 얘기의 반복이고, 정작 한국의 성씨같은 데이터 베이스에는 그런 본관이 없어서....실은 다음편에 후손의 가능성에 대한 약간의 얘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저는 후손 가능성에 대해서 모르겠다 입니다....

    탐나는도다는 이런 얘기 듣고 보면 꽤 재미있슴니다. 물론 너무 무리한 설정이다 싶은 부분도 있고 이런 것은 상당한 고증인데 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도 요즘 제가 올린 포스팅과 같이 보면 조금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 밥과술 2013/03/08 03:09 # 답글

    아아, 박연의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흘러 오게된거였군요. 당시 사람들의 용기와 풍운아같았던 삶은 요즈음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울것 같습니다. 빨리 정주행하여 다음글로 넘어가야겠습니다. 재밌어요!
  • 迪倫 2013/03/10 14:44 #

    답글이 조금 늦었습니다. 출장 다녀오시자마자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et진보 2013/03/27 13:02 # 답글

    나포했던 배에서 일종의 지휘반란으로 조선에 낙오자가 되었던거군요...먼산... 물구하러갔는데...배는없고...귀국도 힘들게되엇을때 그좌절감은 ㅎㄷㄷㄷ 이들이 조선에 남아서 정묘호란때 참여햇을때 어떤생각이 들엇을지....하멜이 나중에 박연을 만났을대 박연이 어던기분이 들엇을지 진짜 상상이 안가네요.
  • 迪倫 2013/03/28 10:38 #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벨테브레이의 이야기는 하멜보다 훨씬 마음이 끌리는 점이 있습니다. 실제 하멜을 만났을때 네덜란드말을 잘 기억을 못해서 하루가 지나서야 대화가 통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드벤처의 끝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나마 평안한 노년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만...
  • KittyHawk 2013/07/13 13:10 # 답글

    우연히 알고 들렀습니다. 하멜과 벨테브레의 일화를 감안하면 처음엔 하멜은 벨테브레와 그의 가족도 같이 데려갈까 생각했겠지만 이미 정착을 거의 끝낸 벨테브레의 입장상 동행은 어려울거라 판단하고 그들 일행만 떠났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지더군요. 두 사람이 조우한 이후의 뒷이야기들 중에 적잖이 안타까웠던 건 하멜의 보고를 통해 조선과 접촉할 필요를 느낀 네덜란드측이 '코리아호'라 명명한 선박을 보낼 시도를 하다가 무산된 점이었죠. 그때 하멜의 동료 중 일부가 조선 체류중일 때 얻은 가족들을 만나려고 승선을 희망했었다고 하니 그들의 아쉬움이 얼마나 컸을지... 포교 행위에 민감하던 조선이었으니 철저하게 상업적 활동에만 주안점을 두는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무난했을 거라 생각하면 역사에 만약은 무의미하다지만 무척 안타깝더군요.
  • 迪倫 2013/07/16 11:32 #

    읽고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리아 호에 대해서는 저도 그다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말씀하신대로 가족들과 헤어진 것은 그들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을것입니다. 이야기들이 좀더 알려지면 좋을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 역사관심 2013/09/28 22:27 # 답글

    박연이름만 알고있었는데 흥미만점의 이야기네요.
  • 迪倫 2013/09/30 12:22 #

    제 개인적으로는 하멜보다 박연이 훨씬 흥미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연구를 하지않지만, 박연이 속한 동아시아의 당시 굉장한 패러다임 전환기의 중국,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 조선의 관계를 같이 고려해서 박연의 표류를 고찰하면 훨씬 흥미있는 내용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건 언젠가 누군가 연구를 하겠죠...
  • 2016/08/06 12: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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