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9월 24일 브룩클린(下) - 개화문명이란 도대체 뭔가? by 迪倫

1883년 9월 24일 다시 뉴욕 - 브룩클린에서의 하루...(上)에서 이어쓰는 (下)편입니다.


앞의 上편에서 소개한 처음 기사에서 마차를 타고 오는 일행들이 막 "다리(the Bridge)"를 떠났다고 하는 부분의 '다리'는 지금의 "브룩클린 브리지"입니다. 브룩클린 브리지는 원래 19세기 후반만 해도 거의 유일한 뉴욕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지금은 뉴욕하면 떠오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당연히 20세기 건물이고, 심지어 자유의 여신상만 해도 아직 기초 공사를 하면서 모금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 든 손"만 보빙사 일행이 오기 한해 전까지 모금을 위해 바로 호텔 옆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 전시되어 있었답니다.) 브룩클린 브리지는 바로 4개월전인 1883년 5월에 13년간의 공사를 마침내 마치고 개통되었습니다.

1883년 하퍼스 먼슬리(Harper's Monthly)에 실렸던 특집기사의 이미지입니다. 그야말로 "새 다리"를 보빙사 일행이 마차를 타고 건너간 것이죠!

이날 다리를 건넌 유길준은 이 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大鐵橋는 紐約과 富祿吉仁의 二州의 間에 東江을 橫截하야 架臥한 者니...(중략)....平地를 從하야 橋上의 來往하는 人衆을 望하면 雲霧를 披行하는 듯 橋上을 從하야 下視하면 萬頃의 滄波는 足下에 浩蕩하고 塡路한 蹄輪과 撲地한 閭閻은 城市全面을 呈하더라."
(대철교는 뉴약과 부록길인의 두 주의 사이에 동강을 가로질러 가설한 것이니...(중략)...평지를 따라 다리위의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름 안개를 헤치고 지나가는 듯하고 다리 위를 따라 아래를 내려보면 만경 창파는 다리 아래 넘실거리고 길을 메운 마차들과 가득찬 집들이 도시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은 지하철을 타면 브룩클린까지 그대로 가기도 하고 다리도 여러개 있으니 별로 그런 감이 없는데, 문득 이스트 리버에서 강 건너를 보면서 여기를 배를 타고 건넌다면....역시 다른 동네라고 해야겠구나 하는 게 납득이 절로 가집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브루글린은 뉴욕과는 별개의 뉴욕주 롱아일랜드 카운티 소속의 독립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날 처음부터 동행하여 일행을 에스코트한 당시 브루클린시의 시장은 브룩클린 토박이인 세스 로우(Seth Low, 1850 – 1916)이었는데, 집안이 원래 중국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모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동아시아나 조선 비즈니스를 같이 염두에 둔 대대적 환영이라고 해도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 사람은 한참 뒤 뉴욕이 브룩클린을 합병하고 난 다음 두번째 통합 시장으로 다시 당선이 됩니다.

이 시장(市長, mayor)라는 직책은 실은 서양을 방문한 19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든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상당수 미국의 시장들은 상인(merchant)출신으로 부를 모은 다음 정계로 나가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시장으로 당선이 되어 지원해준 정당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시정을 펼쳤었습니다. 뒤에 소개하게될 당시 뉴욕 시장 프랭클린 에디슨 역시 곡물상 출신으로 뉴욕 상품 거래소의 회장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뉴욕 시장 프랭클린 에디슨이 자기 사람만을 발탁해서 쓰는 것을 풍자한 삽화입니다. 아래 적힌글은 "미안하지만 자네를 임명할 수 없네, 자네는 능력은 있겠지만, 선거를 할 수는 없네"라고 적혀있습니다.

1860년 미국을 처음 방문한 에도 일본의 견미사절단은 이미 서양사정을 제법 공부하고 있었다고 했는데도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시장을 만나자 이 사람을 어떻게 인식해야할지 몰라 상당히 혼란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즉 전통적 에도 바쿠후 시스템에서 바쿠후에서 파견된 사무라이 계급의 일정 임기를 지닌 전권을 지닌 행정 사법관 마치부교(町奉行)와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이보다 하급의 주로 토착 유지출신의 마치도시요리(町年寄)로 상대해야 할지 개념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영어로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이 소개하기를 "San Francisco Board of Supervisors의 president"라고 하는데 president라면 다스리는 사람이니 부교에 가깝고, 그런데 현지의 상인출신이라니 도시요리라고 해야 하는게 아닌가....
뭐 지금도 어쩌면 한국사람들의 정서 속에는 전통적 한성부 판윤(判尹)의 이미지과 상인출신 Mayor의 현실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면 근대의 "시장"에게서 나랏님을 대리해서 덕을 펼치는 목민관을 기대하지마라는 거죠. 근대 이후의 시장은 대게 그 근본이 본래 이윤을 쫓던 사람들이니 니 손으로 뽑아놨으면 대신 그가 시정으로부터의 이윤을 시민들에게 보다 보편 타당하게 되돌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질정해라 하는게 "근대식 시장(市長) 제도"의 핵심이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지금 그 '근대'의 혜택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선정을 베풀어줄 목민관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또하나, 서유견문을 보조교재로 삼아 보빙사 일행들을 따라 가면서 특히 브룩클린 네이비 야드에서 든 생각이 좀 있어서 두서없지만 조금 정리를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아시아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각 나라가 가장 처음 접한 서양 근대의 상징은 "군함(軍艦)"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구로후네, 흑선도, 운요호도 모두 근대식 군함들입니다. 실제 유럽의 근세 이후 혹은 근대의 육지전을 경험한 적도 없고 (아편전쟁은 물론 조금 예외입니다만) 소위 서양 문명에 문을 열어뒀다고 알려진 '에도 일본' 조차도 인기있었던 那波列翁 전기에서 나폴레옹이 유배된 섬에서 장창을 든 군인들에 감시를 받는 것처럼 그려진 삽화가 버젓이 실려있었을 정도이니까,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양 = 군함"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형성이 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군함을 통해서 서구를 접하자 동아시아 각국은 해군을 총력을 다해 육성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일본 바쿠후의 해군전습소(海軍傳習所, 1854)에서부터, 북양수사(북양함대라고 알려진 北洋水師, 1871)까지 모두 일련의 서양 따라잡기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국이 건조한 군함으로 기회를 놓치기 전에 어서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즉, 서양국가에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국가의 이익을 취한다"라는 목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조선의 대표적 바보짓으로 손꼽히는 화물선 개조 군함 양무호의 구입과 강화도의 해군사관학교 수사해방학당의 경우도 실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당시 동아시아가 공통적으로 따라가던 필수 코스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의 해군전습소와 간린마루의 구입, 이어서 조선소와 군함건조라든지, 청의 경우 1866년 선정학당(船政學堂)과 푸저우 선정국(福州船政局), 뒤이은 군함 건조와 북양함대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과정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당시 동아시아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1862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건조한 지요다가타(千代田形丸)호입니다.

1869년 처음으로 청에서 건조한 완녠칭(万年淸)호입니다. 자세한 자료는: http://www.beiyang.org/bybq/wannianqing.htm

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보면 브룩클린 네이비 야드는 그야말로 서구 문명의 총체적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들 보빙사 일행에서 이미 2명은 이전에 근대식 조선소를 방문한 경험이 이미 있었습니다. 홍영식과 유길준은 1876년 일본으로 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이미 나가사키와 요코스카(横須賀), 이시카와지마(石川島) 조선소들을 이미 시찰한 바 있습니다. 물론 역사나 시설, 노하우의 측면에서 원조 브루클린 네이비 야드와 차이가 났겠지만, 일본은 당시 아무튼 수리 정비에서 전함 건조단계로 이미 넘어간 시기였습니다. 조사시찰단의 엄세영은 "나가사키 조선소를 공작분소라고 하는데 그 공장의 규모나 시설이 매우 웅장하다. 비슷한 규모의 요코스카 조선소를 보면 설치한 機輪(기륜)이 광대하고 건조중인 선함이 많은 것이 나가사키 공작분소의 배나 된다. 종종 이곳에서 해전 연습을 하는데 스스로 서양국가들보다 낫다고 여긴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허동현에서 발췌)

그런데, 자세히 뉴욕의 기사들을 보면 어라, 싶은데가 있습니다. 이들은 군함의 건조에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고 있지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대신 피복창(tailor shop)과 커피 분쇄시설이 있는 곳에서 대단한 흥미를 보여 시간을 생각보다 오래 지체했다고 기사가 전합니다. 시찰한 트렌턴호에서도 전기설비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만, 군함 자체에 특히 더 관심을 보인 것같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유길준은 이후 서유견문에서 서양 각국의 해군 얘기를 하면서 "商賈의 不盛한 邦國은 海軍도 强大하기 不能하대 惟合衆國은 海軍을 不務하야 他國이어셔 少함이오 商賈의 不大함을 因緣함은 아니니...(상업이 번성하지않은 나라는 해군도 강대할 수 없지만 오직 합중국은 해군에 힘쓰지않아 다른 나라보다 적지만 상업이 작아서 그런 것은 아니니)"라고 오히려 해군과 나라가 부강한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사행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보고하는 민영익의 복명에도 비슷한 평가가 있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그곳 역시 무비(武備)를 숭상하던가?”
하니, 민영익이 이르기를,
“서양의 부강함은 오로지 상무(商務)를 위주로 합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날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항만(港灣)을 봉쇄할 것이므로, 각국이 서로 화해하도록 권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무비를 숭상하지 않아도 자연 막강한 것입니다.”하였다.(고종 21년 1884년 5월 9일자 승정원일기에서, 고전번역원 DB)


왜 그랬을까요?

왜 이들이 전기와 농업기계에 대해 보인 지대한 관심과 달리 정작 "군함"에 대해서 보인 관심은 크게 주목할만한 기록이 없는 걸까요?

우리는 지금 조선이 이 필수코스에서 형편없이 실패한 것을 압니다. 왜 조선의 지도층, 지식인들은 이 필수코스를 소위 "성공적"으로 이수하지 못한 것일까요? 아편전쟁 이후 청 내부의 양무운동을 촉발한 위기감이나, 아편전쟁 직후 전해진 소식과 이양선들의 출몰로 일본에 극도로 고조된 긴장감에 비견할만한, 외부의 위기감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걸까요? 아니면 보빙사 일행들처럼 미국처럼 군비를 무리하게 강화하지않아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덕업상권하는 유교적 대안을(결과적으로 헛되이) 꿈꾼 것일까요? 이것 역시 "경쟁"을 택한 일본과 "경려"을 택한 조선의 차이였을까요? 그래서, 호된 시련을 겪고 나서 이제는 일본보다 더한 '만인이 만인에 대해' 경쟁하는 사회를 마침내 구현한 것일까요? 어려운 질문은 이번에도 슬쩍 던져만 두고 피해갑니다.

한편 브룩클린 네이비 야드는 1966년 해군에서 마침내 폐쇄하였습니다. 이후 뉴욕시로 부지가 매각되어 민간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 제조업의 쇠락과 더불어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조선은 1979년, 선박수리 도크는 최종적으로 1980년대 후반 완전히 중단됩니다. 그렇지만 대신 이 부지를 산업공단으로 재조성하여 지금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선소의 기억은 공단 내 박물관 센터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큰 사회문제가 되고있었던 부산 영도의 모 조선소의 경우 원래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이어져 내려오는 곳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조선소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역사의 지속이 가능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쓸데없이 길게 덧붙인 사족들입니다. (뱀이 이제 足이 너무 많아 지네가 된듯하군요)
대신 9월 25일은 비즈니스뿐 아니라 여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 조선인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에 나선 일행들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전기(electricity)"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어제 글을 올리고 아침에 출근하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신문기사가 묘사한 민영익의 의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구군복 즉 무관의 융복같습니다. 검은색 가운과 붉은 색 소매에 벨트. 그렇죠? 역시 군사시설의 공식 방문이라 군복 정장을 갖춘 것일까요? 호오, TPO센스가 있으신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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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2/04/27 13:02 # 답글

    1. 사실 스페인과의 전쟁과 '백색함대'의 세계일주 이전이었던 당대 미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유길준의 평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미국은 이상하리만치 상비군에 열정이 없었거든요.

    2. '뉴욕'과 '미 해군' 모두와 연관된 당대의 인물로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테디 루즈벨트가 있군요. 뉴욕시 경찰국장과 해군 차관을 역임했으니 말입니다.
  • 迪倫 2012/04/28 10:49 #

    1.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쓸 당시에는 좀더 미국의 사정을 파악하여서 실은 제가 인용한 다음에 '그런데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해군을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유럽국가들에 비해 당시 미연방정부가 상당히 약한 존재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1,2차 대전과 냉전을 거치고 난 후의 미연방정부와 19세기의 연방정부는 실은 간격이 엄청난 다른 정부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2. 루즈벨트는 그정도가 아니라 원래 니우암스테르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네덜란드계 집안입니다. (원래 로오스펠트가 패밀리 네임이었죠) 2세기 정도 지나면서 뉴욕일대에서는 확고한 유지집안이었습니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뉴욕경찰국장 시절 반부패 전쟁같은 것을 실행할 수 있었지요. 그렇긴한데, 이후 중앙정치로 나간 후는 뭐랄까 미국을 본격 제국주의 국가로 조성한 장본인이랄지 좀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항상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까날 2012/04/27 13:42 # 답글

    그러고 보니 옷을 굉장히 많이 챙겨갔군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군함에 큰흥미를 갖지 못했다니, 납득이 가기도 하고 좀 이해가 안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迪倫 2012/04/28 10:52 #

    사절단의 패션이 기사마다 상당한 관심거리입니다. 처음에 갓을 보고 15불씩이나 한다는 기사도 있고 어떤 모자 (아마 관모같은데) 는 60불짜리라고 놀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군함에 큰 흥미를 갖지못한 느낌은 앞으로 좀더 계속 공부해봐야할 내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 빛의제일 2012/04/27 20:53 # 답글

    이렇게 알찬 글을 다 읽고 저는 "아이~ 좋아라~ 어~ 좋다" 라고 추임새를 하였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쏠쏠한 영양가 있는 댓글을 쓰고 싶습니다만, 부족합니다. ;)
  • 迪倫 2012/04/28 10:52 #

    아, 괜찮습니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2/04/27 20: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迪倫 2012/04/28 10:54 #

    그렇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비록 소극적으로 달리 밸리에도 올리지않고 노는 삼아 올리는 글이지만, 무슨 비공개 회원제 카페도 아니고 그냥 공개해둔것인데요. 그렇게 해주시면 관심있으신 분들이 더 많이 같이 얘기나눌수 있을테니,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현 2012/04/28 17:16 # 답글

    모든 정보를 사절단의 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왕이나 관료들이었을 텐데.. 그만큼 보빙사의 책임이 무거웠지 싶습니다. 사실 본인들 역시 낯선 문물이었을 텐데요. 그들의 복합적인 심경을 짐작하며 흥미롭게 따라가보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구요~
  • 迪倫 2012/04/29 07:39 #

    보현님도 평안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역사책에서 한두줄로 다녀왔다라든지 절을 해서 미국사람들을 놀래켰다는 정도만 알다가 이곳 뉴스기사에 남아있는 의외의 모습들을 보고서는 아주 열심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천천히 포스팅을 올려도 양해바랍니다.
  • 밥과술 2012/04/29 13:20 # 답글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역사의 재조명, 이런 말이 거창하게 들리는데 바로 이런 글이 딱 떨어지게 그런거지요. 한국쪽과 미국쪽 양쪽의 문헌을 비교해가며 부족한 자료를 상상력으로 메꿔가는 작업, 읽는 사람도 흥미진진합니다. 일찌기 고향 부산 동래쪽 글을 써주셨듯이 지금 사시고 계신 뉴욕과 연결된 조선의 글을 써주시니, 이제 태평양을 아우르는 향토사학자가 되셨군요.

    멕시코에 사시는 분, 하와이에 사시는 분 등등 세계 곳곳에 나가있는 한국사람들 가운데 딜런님같은 국제 향토사학자가 많이 나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 迪倫 2012/04/30 10:48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토사학자"라고 해주시니 제법 우쭐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

    간혹 똑같은 자료라도 살고 있는 사람의 눈에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말씀대로 그런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아지면 정말 저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항상 읽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주 건강하게 잘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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