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시아국 이야기: 달콤한 꿈이 악몽으로 바뀌다 by 迪倫

蘭学雜談 (8)

지난편 우니코르 얘기에서 연결되어서 다시 시란도신원회도(芝蘭堂新元会図)로 돌아갑니다. 이 그림 속의 이날 참석인원들의 신원은 현재 거의 대부분 파악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난번 소개한 헤슬링크(Reinier H. Hesselink) 선생의 참석인원 신원파악은 일본인도 아닌데 네덜란드의 일본학 연구의 수준이 이 정도 깊이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지난번 포스팅의 연결 링크에서 "Shirando no Oranda Shogatsu: sennanahyaku kyujugonen ichi gatsu tsuitachi"를 열어보시면 "芝蘭堂のオランダ正月"이라는 제목의 일본어 pdf 파일이 있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에 소개한 영문 논문의 일본어 번역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림의 인물들은 각각 미묘한 힌트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힌트들을 따라 마치 퀴즈처럼 참석자의 신상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머리를 모두 민 사람들은 대부분 난의학(蘭方醫) 의사들이고, 상투(촌마게라고 하죠)를 튼 사람들은 사족(士族)이라던지 하는 사소한 힌트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러 힌트들을 가지고 파악해보면 좌장 오쓰기 겐타쿠(大槻玄澤)는 식탁 오른쪽의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사족으로 보이는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오늘은 일단 생략합니다)

그런데, 이런 참석 인물들 중에 상당히 특이한 것을 힌트로 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측 상단 화병 바로 앞의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확대로 보면 상당히 특이한 문자가 적혀있습니다. 얼핏 보면 로마자인가 싶은데, 실은 키릴 문자, 즉 러시아문자가 적혀있습니다.


전편 마지막에 얘기한 이날의 특별 초대 손님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살아있지만 살아있지않는 사람, 에도 일본의 바깥으로 우연히 튕겨나가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에카테리나 여제까지 알현하고 온 일본인입니다.

그의 이름은 다이코쿠야 고다유 大黒屋光太夫, 그의 러시아 기행을 러시아와 합작영화로 옮긴 『おろしや国酔夢譚』(오로시야코쿠 스이무탄, 오로시야국 꿈에 취한듯한 얘기...)가 1992년도에 오가타 겐(緒形 拳) 주연으로 개봉된 적도 있습니다.

고다유는 지금의 미에(三重)현인 이세(伊勢)국 가메야마(亀山)번 출신의 선장이었습니다. 이세에서 에도까지 도카이도 연안을 따라 화물을 운반하던 일을 주로 하던 것 같습니다. 조선으로 치면 조운선의 선장이랄까요..

그런데, 1783년 1월 어느날 에도에 가코이마이(囲米 바쿠후가 제번에서 거둬서 구휼이나 미가 조절용으로 쓰던 저장미)용의 쌀을 수송하기 위해 이세의 시로코노우라(白子の浦)에서 출항한 그의 배는 그만 폭풍을 만나 7개월을 표류하다가 알래스카 남서쪽 알류산열도의 암치트카 섬까지 그만 흘러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원주민들에게 억류된 그와 그의 선원들은 모피거래를 위해 와 있던 러시아인 상인들과 지내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4년후 러시아인들과 함께 배를 만들어 탈출한 일행은 캄차카, 오호츠크, 야쿠츠크를 경유하여 1789년 러시아 연해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합니다.

마침 이르쿠츠크에서 일본과의 무역에 관심이 있었던 러시아 식물학자 키릴(에릭) 락스만(Кирилл(Эрик) Г. Лаксман1766-1833)을 만나게 되고 1791년 그를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갑니다. 락스만의 도움으로 에카테리나 2세를 알현한 고다유는 마침내 귀국을 허락받습니다. 다시 극동으로 돌아와서 1792년 9월 당시 마쓰마에번이 관장하던 북해도의 북단 네무로(根室)에 러시아의 최초의 인접지역 사절단과 함께 도착.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귀환 후 바쿠후의 조사를 받으면 전한 정보를 시란도 좌장 오쓰키 겐타쿠의 친구이자 역시 유명한 난학자였던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기존의 오란다 경유의 정보와 함께 정리하여 『북차문략(北槎聞略)』(1794)을 편집합니다. 대략 18세기 후반의 유럽 정세를 상당히 정확하게 업데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현대어로 번역된 북차문략은 여기 클릭하면 전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락스만은 원래 스웨덴계로 에릭이 본명인데 러시아식으로 키릴이라고도 불린 것 같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위키나 자료들은 대부분 키릴로 표기하고 영어 자료들은 에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키릴로 표기하겟습니다.

그런데, 그의 귀환은 에도 일본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쿠후의 조사를 받은 후 바쿠후의 전용 식물원이라고 설명해야 할 "고이시카와 고야쿠엔(小石川御薬園)"에서 일종의 보호감호 하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해외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자체가 바쿠후의 정책을 정면으로 깨뜨리는 것이라서 공식적으로는 그는 사망자였습니다. 물론 가족도 만나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지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바쿠후의 감시체제 하에 일생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쿠후는 19세기 중반까지
열심히 세계정세를 익혀서 그 새로운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 게 아니라, 열심히 파악하여 가능한 에도 일본 사회를 그 새로운 조류로부터 차단하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사실이야말로 한국에서도 근세 일본에서 전개된 난학의 실상을 정확히 뭐였는지 알아봐야 할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로부터 공식적으로는 격리된 고다유가 예외적으로 외부인들과 공개적으로 해외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바로 몇 년 뒤 1795년 시란도에서 열린 네덜란드 정월 잔치 즉 신원회였던 것입니다. 그가 보호감호 하에 있던 장소가 약용식물원 즉 박물학의 시설이라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앞의 목내이와 우니코르 얘기에서 설명했듯이, 군사, 세계 정세 중심의 난학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난학이라면 통사들을 통해서 전해진 네덜란드의 책과 수입약품을 익힌 의사들을 통해서 외과와 함께 제약학 즉 본초학으로 전개가 됩니다. 바쿠후 공식의 식물원 역시 목적은 각종 약용 자원을 취급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담당자들 역시 광의 또는 협의의 난학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고다유는 돌아올 때 후원자 락스만의 선물로 시베리아의 식물 표본까지 가져왔었습니다. 고야쿠엔에서 고다유를 보호하고 있던 장군가의 시의(侍醫) 가쓰라가와 호슈(1751-1809)와 시부에 조하쿠 渋江長伯(1760-1830가 신원회에 바쿠후의 의외의 묵인 하에 그를 데리고 참가해서 뭔가 오리지날을 갈구하던 난학자들에게 그가 보고 들은 생생한 정보를 전하였던 것이죠. 신원회는 실은 오쓰키 겐타쿠가 상당히 위험을 무릅쓰고 저지른 일에 가깝습니다. 그런 연유로 고다유가 이 그림에 모습을 전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18세기 후반의 러시아가 일본 역사에 발을 들이 밀게 됩니다. 러시아는 이제 연해주에서 사할린 열도를 타고 일본과 교역을 하기 위해 아직 에조지 홋카이도를 담당하던 마쓰마에(松前)번에 서서히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고다유와 일행을 송환하는 한편 바쿠후와 통상교섭을 하려는 목적을 띄고 키릴 락스만의 아들이기도 한 아담 락스만 중위가 인솔하여 1792년도에 찾아온 러시아 사절단 배를 마쓰마에번에서는 여기는 외국인들과 함부로 접촉할 권리가 없는 곳이다. 모든 컨택은 나가사키로 가서 하라는 바쿠후의 정책을 전하면서 특별히 입항 허가증에 해당하는 신패(信牌)를 발급합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일단 이 배는 나가사키대신 다시 오호츠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멀지않아, 1804년 헨드릭 두프가 막 데지마 상관장이 되었을 무렵 (아직 파에톤호 사건이 나기 4년전) 네덜란드 배가 아닌 이국선 한척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나가사키를 방문합니다. 바로 점잖은 니콜라이 레자노프 대사(Николай П. Резанов, 1764-1807)의 사절단이 짜르의 서신과 일본인 표류자를 동반하고 나가사키에 바쿠후와 협상하러 나타납니다.

레자노프 대사를 그린 일본의 목판화입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요구는 정중하게 진을 다 빼버리고 거절당합니다. 당황한 바쿠후가 반년이 넘도록 시간끌기 신공으로 진을 빼고는 돌려보내는데, 반면 유럽에는 네덜란드가 훼방을 놓았다고 소문이 쫙 퍼집니다. 두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상당부분을 '진실은 내가 훼방놓은게 아니란 말이야'에 할애하고 있습니다마는…이미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상관의 독점유지 방해공작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기는 나가사키에서는 데지마쪽 항구 반대편에 그들을 수용하고 극히 두프와 레자노프의 접촉을 극도로 제한합니다. 그래서 두프는 몰래 몰래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면서 유럽사정을 듣고 일본 사정을 알려주면서 대충 포기할 것을 권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점잖게 접근한 러시아는 예상외로 황당한 방식으로 일본의 완강한 거절에 부딪히자 1807년 이후 지금의 북해도 마쓰마에번 관할의 에조지에서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소규모 군사행동이라던지, 서로 배를 억류하거나 골로브닌(일본에서는 고로닌) 사건처럼 직접 러시아 함장을 인질로 잡는다던지 하는 일들이 상호간에 발생하면서 공로증이랄지 러시아에 대한 경계는 근세에서 근대로 옮겨가던 일본에 체증과도 같은 증상을 심어둡니다. 잘 길들여진 기존의 오란다와는 다른 영국과 러시아라는 새로운 강적들 앞에 패닉한 바쿠후는 결국 1825년 이국선타불령(異國船打拂令)을 공포하여 근해에 접근하는 이국선은 무조건 발포하여 쫓아내고 상륙한 외국인은 체포하도록 합니다. 뭐 어찌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척화비만 뭐라고 할 게 아니죠. 조선책략이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경계와 정보로 점증하던 1880년대 일본에 외교관으로 주재하던 황쭌셴(黃遵憲)에게서 시작된 것도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불안감은 결국 조선반도에서의 러시아의 패권과 한판 전쟁으로 곪아터져 나갑니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아시다시피 노일전쟁으로 노몬한전쟁으로 결국 2차 대전의 일쏘전쟁으로 심지어 북방 5개도서의 형태로 현재진행형입니다.

한국사람에게 일본의 난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위에서 보셨다시피 단순한 이웃나라의 일개 유행처럼 지나간 사회현상은 아닙니다. 이 난학이 근세 일본 사회를 근대로 이끌어나간 바로 그 원동력이라고 하는 것 역시 실상은 아닙니다. 난학이나 양학에 대비될만한 조선의 움직임은 서학이나 북학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정부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작은 그룹에서 훗날 일본을 변모시킨 사람들이 가지쳐서 나왔을까요? 왜 그들은 성공하고 북학이나 서학은 실패하였을까요? 이 글들을 쓰고 있는 저도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많은 전문가들이 완성형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란도에서 모두 모여 바다 바깥 책으로만 아니면 데지마의 상인들을 통해서 완전하지않은 통역으로 전해 들은 얘기들에만 지식을 목마르게 갈구하던 사람들에게서 불과 2세기 후 아시아와 세계의 반을 고통으로 몰아간 일본의 제국주의가 연결되는 아이러니입니다.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이 이렇게 허망하게 공포와 적대감으로 바뀌는 인간의 내면은…

1805년 이후의 헨드릭 두프의 얘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제는 레자노프 사절단도 파에톤호 사건도 무난히 넘긴 두프의 앞에 더 큰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두프의 진정한 라이벌 래플스와 눈물의 맥주 얘기가 펼쳐집니다. (네 바로 그 싱가포르의 래플스경입니다.)

**다이코쿠야 고다유가 그림 속에서 들고 있는 종이를 확대해서 글자를 판독하면 대략 "Енуияръ"와 "Даыкоо"라고 적혀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단 기존의 설명은 1월을 의미하는 Ianuary와 Daikoo라고 보고있습니다. 실은 러시아어의 1월은 Янва́рь(얀바르 비슷하게 읽습니다)입니다. 첫번째의 글은 대략 에누이야르라고 읽게되는데, 러시아어의 1월이라기보다 네덜란드어 Januari 를 러시아문자로 적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두번째 글은 아마 그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시란도신원회도의 오른쪽 상단 서양복식과 모자를 쓰고 의자에 앉은 사람을 고다유라고 보는 소수 견해도 있습니다만, 이 사람은 모리시마 주료(森島中良, 1754-1809)로 비정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모리시마 주료는 본명이 가쓰라가와 호산(桂川甫粲)으로 바로
가쓰라가와 호슈의 친동생입니다. 지난번 포스팅 18세기 동아시아 크로스보더 파티장 에서 형의 친구였던 오쓰키 겐타쿠를 따라 나가사키에서 진짜 오란다 정월 파티에 참가해서 뭘 먹었는지 "홍모잡화(紅毛雑話)"라는 책에 자세한 기록을 남긴 난학자입니다. 홍모잡화 (1787)는 그야말로 잡다한 네덜란드 및 유럽관련 잡학 정보를 모아둔 책입니다. 바로 迪倫齋가 추구하는 방향이지요. 고다유가 러시아에 갔을 때 이미 유럽의 박물학자들이 가쓰라가와 호슈와 모리시마 주료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다방면에서 활약을 했는데, 신원회 그림을 보면 코스프레를 한다던지 실제 난학 및 의사이면서도 신라반쇼(森羅万象)라는 필명의 극작가이기도 했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유쾌한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프의 회고록을 보면 레자노프 대사는 그래도 한 국가를 대표한 사절단으로 나름대로 정중하게 일본과 통교를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두프와 통사들이 일러주는 무기와 화약을 모두 압수 보관한다던지 하는 일본의 관례에 처음에는 상당히 반발을 하기도 합니다. 일본측의 패닉에 가까운 책임 지지않기 초식에 의해 안건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누가 결정하는지 누가 담당하는지 알 수 없게 되다 반년넘게 나가사키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다 결국 안된다는 답장을 받고 돌아갑니다…-_-;; 그래도 이때만 해도 러시아도 바로 뒤이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파에톤호의 영국같은 안하무인은 아니었습니다.

**1825년의 異國船打拂令은 1840년대 청이 아편전쟁에 참패한 소식에 대경실색 놀란 바쿠후가 조금 완하하는 정책을 바꿉니다만, 이국선이 자주 출범하던 규슈의 사쓰마/도사를 중심으로는 기존의 완강한 양이정책이 결국 19세기 후반의 영불과의 함포 교환과 배상금의 막말(幕末) 정국으로 이끈 그 바닥 정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오로시야국 취몽담(おろしや国酔夢譚)의 예고편 화면입니다.


**두프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동시대의 조선을 한번 짚어보고 갈까요? 의견 주시면 합니다! 아, 그리고, 아직은 인문사회밸리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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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1/01/15 18:54 # 답글

    표류했다가 겨우 돌아오니 보호감호 처분이라... 아주 제대로 된 쇄국정책이군요.
  • 迪倫 2011/01/17 05:06 #

    에도 일본의 서양에 대한 정책은 시기에 따라 여러번 변하고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주교에 대해서는 조선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엄격하기도 했었구요.
    고다유는 공식적으로는 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그런가 하면 가족들을 만난다던지 하는 것정도까지 엄금당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Jes 2011/01/15 19:53 # 답글

    아, 정말 포스팅 하나하나가 멋지군요. 조선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 迪倫 2011/01/17 05:06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로거북이 2011/01/15 21:49 # 답글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동시대 조선 이야기도 꼭 보고 싶습니다. ^^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일본인들은 - 중국 처럼 허풍도 아니면서 - 무언가 망상적인 상상력이 있고 이것이 기발한 창조력으로 작동하는 성격이 있는 민족 같습니다. 한의학을 봐도, 일본 상한론 이라고 해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이론 체계를 완성시켰던 게 근대일본(에도시대) 의 역량 입니다. ( 소위 '칸포 메디신' 을 없애버린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그 책들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있죠 )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유일한 근대화 성공,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뒤엎을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 해 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중국과 한국이 기존 세계관을 버리지 못했을 때 말입니다. ( 물론 그 성공 뒤에 따랐던 각종 비도덕적 행위들도 있었습니다만 )
  • 迪倫 2011/01/17 05:14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 얘기를 간단히 해볼까 합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참 간단하지않은 주제인것 같습니다. 상당히 동아시아의 전통체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로 넘어가는 근대화의 경우 일본이 실제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했다고 까지는 생각이 들지않습니다. 저는 그보다 따라잡기에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먼저 나갈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모델을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수용'과 '응용' 단계에 머물러 그 부작용을 인근과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런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말씀하신대로 에도 일본의 활력은 상당히 흥미있는 것 같습니다. 칸포 메디신은 漢方 醫藥을 말하나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최근의 듣는 얘기로는 한국에서 동의학을 선도하기 오히려 더 유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迪倫 2011/01/17 05:29 #

    덧글을 보고 안그래도 예전에 올리신 '복진, 일본식 상한론'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흥미가 있네요. 어쩌면 난방의 계통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한의학과 체제가 서서히 달라졌을 수도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글 중에 간혹 소개한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를 추천드립니다. 아마 저와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이 책이 읽어지실 것 같습니다. 언제 일본 상한론에 대한 소개글 한번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 에로거북이 2011/01/17 12:54 #

    제 글은 개인 정리용으로 적어 놓은 졸필이라 오히려 잘못된 이해만 심어드리는게 아닌가 하고 두렵습니다. ^^;

    일부 연구자들에 따르면, 에도시대 한방의들의 독특한 견해는 실로 의학의 정종을 꿰뚫었다고 하는데 ....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국내서적으로는 법인문화사에서 나온 "일본의학사" 이라는 책은 일본의학사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책 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 황한의학을 조망한다 " 라고 중국 연구가가 쓴 책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쪽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연구하시는데 한 갈래라도 도움 드리는 면이 있을까봐 말씀드려 봅니다.
  • 迪倫 2011/01/17 14:17 #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전문적인 책들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듭니다 -_-;;
    연구라고까지 할 정도는 못되지만 기회되면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1/01/16 02: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迪倫 2011/01/17 05:23 #

    긴 덧글 감사합니다.

    난학뿐 아니라 일본 근세의 여러가지 움직임이 지나치게 근대화라는 이슈와 연계되어 원래의 본질적 모습과 전개과정이 왜곡 해석되는 경우가 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근대화와 연결짓지않아도 충분히 활력있는 흥미로운 움직임인데도 말입니다.

    북학도 실학으로 뭉뚱그리지않고 그 자체로 다시 당대의 컨텍스트에서 파악을 할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서학도 서구 사상체계의 수용의 측면에서 여러가지 다른 측면으로 볼 수도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 당시 서학을 접한 사람들은 서양이 앞섰기 때문에 수용을 한게 아닌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만...)

    아무튼 흥미는 있는데, 저야 당연히 이런 재미있지 않나용 정도뿐일 레벨이라서 아쉽습니다. ^^

    닐씨가 무지하게 춥다던데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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