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젊은 부부의 초상, 그리고 woorden van liefde(사랑의 말) by 迪倫

蘭學雜典(2)

VOC에 관한 얘기를 하겠다고 여러번 언급을 하였지만, 실은 그저 잡담에 가까운 얘기들입니다. 시리즈라고 하기에는 큰 주제나 기승전결따위는 없으니 그냥 중구난방의 얘기들일 거라는 점 미리 밝힙니다. 어제의 일로 멀리 떠나있는 마음도 뒤숭숭합니다만, 어떻게든 잘 헤쳐내어왔다는 낙관적인 마음에 그럴수록 일상을 지켜나가는게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9/11도 겪어봤으니까요...그래서, 원래 하려던 일들 그대로 지속합시다. 아무튼...

인터넷의 지식용자들에게 "은하철도 999의 메텔의 실제 모델이 있나염?"하고 물으면 "님하, 그것도 모르셈. 마스모토 레이지가 다카코 쿠스모토라는 일본 의학계에서 굉장히 권위있는 여인을 모델로 그렸다고 했음..."운운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인명표기는 인터넷 지식인분들의 표기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뭐 마쓰모토 레이지(松本 零士) 본인이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실은 그림을 먼저 그리고 한참 뒤에 사진을 보고 나는 이 여인을 이상의 모델로 그려온 것이다...라고 하는 상당히 아티스트다운 아스트랄한 설명을 했으니 뭐라 하기 참 난감합니다.


좀더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면 마쓰모토 레이지의 선조의 동료 부인이 이여인인데, 마쓰모토의 어릴적 친구가 발견한 이 여인과 그 남편 부부의 사진을 보자마자, 자신이 그동안 그려온 여인의 프로토타입이 바로 이사람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어 위키에도 이 얘기가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사진은 시코쿠(四国) 우와지마(宇和島)에 있는 것이고, 굳이 따지자면 마쓰모토의 출자는 알려지기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즉 이전의 구루메(久留米)번인데, 게다가 구루메번은 19세기 막부파-근왕파-반란파로 계속 반전에 반전을 하던 곳이라서 이 여인의 남편이었던 사람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솔직히 고리가 좀 허술하다는 느낌은 듭니다...(뭐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라하기도...)

자, 그 사진을 한번 보십시다:


실은 이 사진 속의 젊은 부부를 소개하려고 얘기를 장황하게 꺼냈습니다.

이 부부는 둘다 19세기 중반 바쿠후 말기 난학(蘭學)의 전개에 그야말로 깊숙히 개입되어있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들 자체가 바로 난학 그 자체의 실상일지도 모릅니다.

여인의 이름은 다카코(高子, 1852-1938)입니다. 원래 결혼 전의 성은 어머니의 구스모토(楠本)이었고, 정식 결혼이 아니었던 아버지 성 이시이(石井)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후 2번의 결혼과 그외 연애사건을 통해 가타기리(片桐), 야마와키(山脇), 그리고 미세(三瀬) 등의 성이 서양쪽의 자료들에 등장합니다. (일본어 위키에는 三淵高子=미후치 다카코가 올라가 있는데 미세 모로부치(三瀬 諸淵)를 이렇게 변형시킨 것인가 싶기는 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다카코나 다카라고 나중에 불렀지만, 원래 다다코(タダ子)라고 했었고, 이 사진을 찍을 당시는 다다코라고 불리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다다코로 통일합니다.)

옆에 앉은 젊은 남편의 이름은 미세 모로부치(三瀬 諸淵 1839-1877)라고 합니다. 메이지 이전의 원래 이름은 周三(슈조)이었습니다. 아명은 벤지로(弁次郎). 지금의 아이치현에 속하는 이요노쿠니(伊予国) 오주(大洲) 사람입니다. (이 글에서는 사진의 당시 이름인 미세슈조로 부르겠습니다.)

다다코의 어머니는 구스모토 이네(楠本 イネ 또는 구스모토 이토쿠楠本 伊摩)입니다. 서양쪽 자료에는 주로 오이네(Oine)로 등장하는 이네는 1/2 독일인입니다. 그래서 다다코는 1/4 독일인 혼혈인 셈입니다.

오이네의 어머니는 구스모토 다키(楠本 滝)는 나가사키의 유녀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쿠후 말기 역사를 아시는 분들께는 상당히 유명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입니다. 실은 우리에게 알려진 소위 "난학"은 어쩌면 이 사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난학이고, 이 사람 이전의 에도시대의 난학은 어쩌면 우리의 통념과 상당히 다를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VOC가 아니라 네덜란드 정부가 나가사키로 파견한 인물입니다. (지볼트는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남독일 즉 고지독일어 사용 지역 출신이므로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발음했기 때문에 "시볼트"로 표기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일단은 표준 외래어 표기법의 독일어 용례를 따라 '지볼트'로 표기합니다)


가와하라 게이가(川原慶賀)가 그린 네덜란드배의 입항을 살펴보는 지볼트와 구스모토 다키, 그리고 업혀있는 아기 오이네의 모습입니다. 지볼트 추방 이전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1641년부터 데지마에 네덜란드인들이 주재하기 시작한 이후 줄곳 200년 동안 굉장히 엄격하게 이들이 데지마 외부로 나가는 것을 단속하였는데. 지볼트의 경우, 예외적으로 데지마 바깥에 나루타키주쿠(鳴滝塾)라는 장소를 확보하고 일본 전역의 난학자, 지볼트 이전의 난학자 즉 난통사(蘭通詞)나 난방의(蘭方醫)들과 접촉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상당히 일본식으로 문파를 형성합니다.

나가사키 인근의 나루타키주쿠의 모습입니다.
여기 이요의 우와지마 출신의 니노미야 게이사쿠(二宮敬作, 1804-1862)라는 수석제자가 있었습니다. 지볼트가 1826년 에도 참부(江戸参府 = de Hofreis)를 갈 때 수행을 하기도 했던 니노미야에게 고향 우와지마 인근 오주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니노미야에게 의탁한 총명한 조카가 있었습니다. 이 조카가 미세 벤지로, 바로 미세 슈조입니다. 미세도 역시 니노미야와 함께 지볼트의 문하로 들어가 의술, 난어, 영어를 배웁니다. 그리하여, 지볼트가 1861년 바쿠후의 고문이 되어 에도로 갈 때 니노미야를 대신하여 수행을 합니다. 당시 에도의 통역은 훗날의 막말인물들인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郎)와 후쿠자와 유기치(福沢諭吉)...그런데, 서양사정에 능통하기로 동아시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OTL 지볼트의 통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실은 바쿠후 말기 소위 난학계열의 인물들의 외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소양은 알려진 바와 달리 초급 수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모든 난학자가 "Ontleedkundige Tafelen = 해체신서"를 번역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이 미스트랜슬레이션 에피소드는 다음으로 미루고, 아무튼 이때 약관 22세의 미세슈조가 통역을 맡아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지볼트는 지금은 일본 서양의학의 아버지처럼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흐음...확실히 지금 기준으로는 산업 스파이가 아닌가 싶은 느낌입니다. 이 얘기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의 네덜란드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이미 재정적으로 파산에 이르른 VOC를 국유화하고 동인도회사령을 180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즉 네덜란드 국가의 식민지로 전환하면서, 지볼트는 육군 군의관 자격으로 일본으로 오면서, 특히 일본의 천연자원과 지리 등의 자료 및 정보 수집을 열성적으로 하였습니다.

일본의 쇄국은 정작 서양에 대해 항상 완전히 닫힌적 없고 에도 사회는 열광적이고 광범위하게 서양문명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다는 통념에는 좀 미안하지만, 19세기 중반 페리제독의 흑선이 도래하기 이전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서양세력에 대경실색한 바쿠후는 전면적인 난학금지를 실행합니다. 그리고, 이 금지령의 발단이 바로 1828년의 지볼트사건입니다. 지볼트가 수집한 품목 중에 이노 다다카타(伊能忠敬)의 당시 최고의 정밀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도 있었고, 일본의 역사책도 있었던게 발각이 나면서 지볼트는 추방을 당하고, 니노미야를 포함한 지볼트 문하의 수많은 난학자들이 투옥되고 상당수의 책들이 수거 및 금지를 당합니다. 이때 일본에서 추방당하던 지볼트는 수석제자인 니노미야에게 동거여인이었던 다키와 딸 오이네를 부탁하고 지도와 정보, 초본 샘플들은 모두 가지고 네덜란드로 돌아갑니다.

1821년 완성된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조선으로 치면 대동여지도(1861년)에 해당하는 지도입니다.

지볼트가 일본에서 추방된 기간 동안 옥에서 풀려난 니노미야는 고향 우와지마로 가서 다키와 오이네를 키우며 그 스스로 난방의원을 개업하면서 지냅니다. 그동안 미세슈조가 태어나서 니노미야의 우산에 들어오고 다시 오이네가 다다코를 낳습니다. 1856년 우와지마번주의 지시로 다시 나가사키로 오이네와 미세슈조를 데리고 갑니다. 그사이 세상이 바뀌고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일본과 이제서야 국교를 맺으면서 지볼트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왕좌왕하는 바쿠후의 고문이 되어서 코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미세슈조가 지볼트에게서 난학을 배우고 통역을 한 것은 지볼트가 두번째로 일본에 왔을 때입니다.

지볼트가 고문활동을 한 에도 아카바네(sic.)의 세쓰고쇼 (赤羽根接遇所)에서의 통역성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미세슈조는 그런데, 돌연 바쿠후에 의해 우와지마에 6년간 투옥됩니다. 일설은 지볼트에게 일본의 역사와 같은 민감한 정보를 번역해서 제공한 사실이 발각되어서라고도 하고, 다다코가 남긴 회고에서는 죠닌의 신분으로 번사를 자칭하며 대도를 차고 다녔다가 형을 살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실은 상당히 동아시아적 사법처리 관행이라고 생각되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첫번째 이유에 한표를 던집니다. 바쿠후는 1860년대 극도의 패닉 상태에 있었다고 보입니다. 또한 지볼트가 주로 활동한 장소가 제가 참고한 서적「江戶洋學事情」에는 "赤羽根接遇所"라고 되어있지만, 찾아보니 아마 "赤羽接遇所"의 오기인 것 같습니다. 실은 우와지마 인근에 "赤羽根"라는 지명이 있어서 발생한 혼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단은 참고한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

미세 슈조는 외삼촌 니노미야의 휘하에서 그가 돌보는 오이네와 딸 다다코와 가까와 지면서 아아, 다다코와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우와지마에서 형을 마치고 나온 1866년 그들은 축복 속에 결혼을 합니다. 위의 사진은 이때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년간 결혼 생활동안 미세슈조는 우와지마에서 오사카로 옮겨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하며 책으로만 배운 해외 즉 서양에 가보려는 꿈을 키워나갑니다만, 그만 콜레라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슈조의 임종의 순간 다다코의 손에는 병 중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치않았던 슈조가 서재에서 부탁하여 들고 온 책이 들려있었습니다.

메이지 이후 양복으로 갈아입은 이제 미세 모로부치와 미세 다다코의 사진입니다.

원래 인터넷에 떠도는 처음의 사진에는 보이지않지만 「江戶洋学事情」의 저자 스기모토 쓰토무(杉本つとむ) 선생이 1967년 우와지마에서 확인하였던 원본 사진에는 오른쪽 아래 비스듬히 유려한 필기체로 "Lief Otada / I love you in all times"라고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미세 슈조가 다다코에게 남긴 글이 있습니다. (**lief = love)

다다코의 뒷얘기는 아껴둡니다. 다만 서양 의학을 공부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본 의학계에 중요한 인물은 어머니였던 오이네이고 그는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예능인이 되는 삶을 택합니다. "混血児というものは、いつの世にも生きづらいことの多いものでございます。"라고 한 그의 표현대로 혼혈아의 삶은 녹록치않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를 이후 살아나가게 한 중요한 요인의 젊은 시절 미세 슈조의 사랑의 말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저 재미로 읽으셨기 바랍니다. 연도와 사람이름은 일본어, 영어 위키피디어를 교차 확인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참고한 자료는 스기모토 쓰토무(杉本つとむ) 선생의 "江戸洋学事情", 1990년 八坂書房 중의 3. "ばってんことば”と 三瀬 諸淵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다코가 나중에 쓴 회고 "私のこと"는 여기를 클릭하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볼트가 데지마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여러가지 일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해프닝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볼트가 일본에 처음 오기 고작 15년 전에 나가사키를 책임진 부교(奉行)이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했었습니다. 다음 편으로 이 얘기는 미룹시다.

**예고를 여러번 했는데 반해 막상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의견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제 땡스기빙 새벽입니다. 한국을 둘러싼 우려와 긴장이 모두 (방법상으로나 효과상으로나) 바르게 해소되고 평화를 되찾기 바랍니다. 해피 떙스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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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jane 2010/11/25 19:28 # 답글

    오옷. 기대됩니다. +_+
  • 迪倫 2010/11/28 13:43 #

    감사합니다. 자주 뵙게되기 바랍니다!
  • 에로거북이 2010/11/25 19:28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개화파 의생 유홍기가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의생 계층이 은근히 혁명 개화 같은 거 좋아하거든요.
  • 迪倫 2010/11/28 13:45 #

    유홍기와 이동인같은 인물은 훗날의 개화파보다 더 매력적인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의생이 아무래도 자연과학자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되면 받아들이는게 더 수월하지않은가 싶은데가 있습니다.
  • 들꽃향기 2010/11/25 19:5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사실 어느분의 블로그에서 다카코의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고 계시길래, 이 여인은 누구지?하고 있었는데 오늘 포스팅을 통해서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군요. 그리고 은하철도 999와 연관이 있을 줄은......ㄷㄷ

    그러고보니 올려주신 이노 다다타카의 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역시 처음에는 난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다가, 일본 전통의 회도(繪圖)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효덕 선생의 『표상공간의 근대』에서 나오더군요. ㄷㄷ
  • 迪倫 2010/11/28 14:01 #

    아무래도 메텔의 모델이라니 화제의 주목이 될 수도 있겠죠...은하철도 999와의 관련은 마쓰모토 레이지의 약간 오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만....*_^

    그나저나 이 표상공간의 근대라는 책 재미있어 보입니다. 위시리스트에 추가해둬야겠습니다.^^
  • 행인1 2010/11/25 23:40 # 답글

    '난학'도 의외로 우여곡절이 많았군요.
  • 迪倫 2010/11/28 14:03 #

    난학자체가 실은 실체보다 좀 부풀려지면서 일사천리로 지원만 받고 흥성한 것처럼 잘못 알려진 부분이 좀 있습니다. VOC가 일본에서 300년 넘게 있었으니 당연히 여러가지 곡절을 겪었지요....그중에 좀 재미있는 얘기들 조금씩 올려보겠습니다.
  • 밥과술 2010/11/28 14:29 # 답글

    일본의 여러지방이나 온천지대에 가면 양식건물이 있어 '館' 이라는 글자가 붙는 건물이 많고, (훈독으로는 야가타라고 읽습니다) 일식건물에도 서양식 가구가 많이 들어차 있거나, 샨들리에, 유리스탠드, 스테인드 글래스로 된 창문등이 유서깊은 역사를 말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어 개화를 일찍한 일본의 모습을 여기저기서 엿볼수가 있지요. 전쟁의 참화는 함께 겪었는데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는게 부럽기도 합니다.

    영화 '로쿠메이칸(鹿鳴館)'을 혹시 구하실 수 있으면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당시 의상과 건물을 재현한 미술만도 볼거리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迪倫 2010/11/28 16:27 #

    말씀을 들으니 문득 사당동 사거리에 있는 구 벨기에 영사관 건물이 생각납니다. 한국에서는 자꾸 구한말의 실패와 식민지가 오버랩되는 바람에 이런 개화 풍경이 왠지 씁스레한 기억으로 자꾸 변해버려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소개해주신 영화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구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쿠메이칸이라면 그동안 사진들은 좀 몇장면 봤는데, 저는 원래 정치나 군사같은 것보다 이런 쪽이 더 흥미가 있는터라 ^^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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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쿠루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