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헤르모드 김시덕 선생의 새책 『이국정벌전기의 세계 - 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에 대한 소개를 읽다 이전부터 생각해보던 문제에 대해 글을 써봅니다. 아무쪼록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VOC와 일본, 조선을 얘기하면 한국에서는 아직 하멜의 얘기가 대세입니다. 대부분 하멜을 활용못하고 서양의 앞선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물안의 개구리 조선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멜이 돌아간 후 하멜의 표류기때문에 조선이 알려졌고 VOC에서도 특별히 조선과도 교역을 하려고 했는데, 일본이 방해를 해서 그만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은 이런 사정도 알지 못한채 점점 나락에 빠졌다는 것이지요.....-_-;;
과연 그런 것일까요?
실은 전혀 다른 책에서 상당히 읽기 꺼끄러운 이론들을 종종 접합니다.
경제사에서 수정주의학파라면 캘리포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한 중국 및 일본의 근세 경제가 동시대 유럽보다 못하지 않았다거나 능가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을 주로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글들 중에 동아시아의 경제 시스템으로 조공체제를 주로 얘기하고 이 조공체제가 유럽식 시장경제만큼 효율적으로 작용을 했다는 식의 주장들을 합니다.동아시아 조공체제의 핵심은 물론 중국이죠. 그런데 2차적 핵심으로 일본을 주로 얘기합니다. (실은 19세기 이후의 일본 근대화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즉, 일본 역시 작은 규모의 중국 바깥의 조공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지요. 중국과는 오랜 단절 이후 18세기에 상호 조공체제를 눈감고 실질적 교역을 하였는데, 이 두 체제간의 충돌이 가시화 된 첫 사건이 바로 모란사 사건인셈입니다. 두군데 조공체제에 모두 속한 류큐인에 대한 소속 클레임이 충돌한 사건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캘리포니아 학파에서는 일본의 조공체제에 류큐와 에조, 그리고, "조선"(!)을 두고 있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조공체제에 속했다라....
원래 이 이론은 하마시타 다케시(浜下武志) 선생의 소위 "조공무역체제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즉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이중적 조공체제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VOC와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VOC가 처음 동북아시아 바다에 등장한 시기인 17세기 초반은 조선은 아직 여력이 닿지않았다고 해야할 정도입니다. 우선 동인도 해상에서 포르투갈을 지속적으로 쳐야했고, 일본과도 나위츠 사건등으로 우여곡절을 겪고 일본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햇습니다. 오히려 수익성이 더 뛰어난 타이완을 통한 대중국 비즈니스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가사키 데지마의 상관장(Opperhoofd)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은 일본에 속해있어서 쓰시마를 통해서 조공을 하고 있다고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일본에 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무역에 끼어들기 무리라는 것이죠.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초창기 나가사키의 상관장이 일본인들에게서 듣기로 '어느 여름날 조선에 대한 승전 축일이었는데, 그 전쟁으로 인해서 조선이 일본의 조공국가가 되었다'고 듣습니다. (마리우스 B. 젠슨의 "Making of modern Japan 에서 인용)
1643년 난부(南部, 즉 모리오카 번盛岡藩)에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송환 처리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 한번 일본측에서 조선은 일본의 조공국가라고 확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표류 선원들은 일본 북부에 있다던 금과 은의 섬(지난번 1610년대 돈 로드리고의 난파기에서 언급한 리카 데 오로(Rica de Oro)와 리카 데 플라타(Rica de Plata)입니다)을 향해 가던 중이었데, 미션의 일부는 타르타리와 조선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은 조공국가라도 쇼군을 직접 만날 수 없는데 오란다인들은 조선이나 류큐보다도 더 상석에 배치해서 특전을 주는데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경고를 줍니다. (Reiner H. Hesselink, "Prisoner from Nambu: Reality and Make-Believe in 17th century Japanese Diplomacy", 2002)
이런 VOC의 대조선 인식은 완전히 공식화 되어 1799년에서 1817년까지 19년동안 예외적으로 오래동안 상관장으로 머무른 헨드릭 두프(Hendrik Doeff)가 귀국후 남긴 일본 회상기(Recollections of Japan, 1833)에도,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정복하려다 부분적으로 성공한 일본은 대신 조선을 조공국으로 만들었고 쓰시마번이 대신 부산에 쇼군의 이름으로 땅을 점유하고 있다. 쇼군이 바뀌면 조선은 반드시 사신을 보내 축하를 해야했고, 에도 조정이 이런 조공사절이 에도에 오는 것을 대신 관할 영주인 쓰시마번에 오도록 처리하자, 조선측은 자존심 문제로 거부하여, 1811년 대신 조정의 사절을 고쿠라(Kokura) 번주와 휘하 재무담당 등으로 구성하여 쓰시마에 가서 조선 사절의 조공을 받았다. 이들이 돌아오는 길에 고쿠라 번주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나가사키의 거버너(부교奉行?)와 함께 나를 방문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쿠라는 북큐수 小倉번을 의미하고 이 당시의 번주라면 오가사와라 다다카타(小笠原 忠固)인 것 같습니다. 연도가 조금 틀리지만 일본어 위키에 그가 1807년 조선통신사 정사를 접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VOC측의 인식은 지속적인 일본측의 확인을 통해서인데, 기본적으로 Making of Modern Japan 책에 인용된 것처럼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부분적인 승전으로 인식하고 이로 인해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조공을 받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시덕 선생의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에도 보면 상당수의 내용에 신공정벌기가 같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면 임진왜란 자체를 일본중심의 조공체제의 회복으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특히 하야시 라잔계통의 국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통신사라던지 왜관을 이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엇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 포스팅의 주제인 VOC와 관련해서, 이 인식이 VOC에도 전해져서 대체로 VOC는 조선은 류큐와 사쓰마번의 관계와 유사하게 조선-쓰시마번을 간주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굳이 조선을 교역대상지역으로 시도하지 않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붙이자면 일본이 하멜 표류기 직후 새삼스레 조선에 대해 알게된 VOC의 진출 움직임을 "방해'해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긴 확신범을 상대로 네가 방해했다고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런 이유로 VOC가 조선을 무시한 것만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은 다행이랄지 요즘의 VOC 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서 쓰시마가 행한 외교적 기만이라던지, 조선의 통신사 파송에 대한 의식이라던지,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당시의 외교적 수사들을 걷어낸 실상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이 지역의 분야에 대해 덜 세밀하게 알고있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글들에서는 아직도 일본쪽의 조공무역체제같은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조선이 2중 조공체제에 속했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학파는 간혹 테제가 앞서서 실증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시아인의 한사람으로서 주장 자체는 기분 좋지만 어설프게 전개시키다 실패를 하게되면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을 고착 강화시킬 우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한 후 일본과 조선간의 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오히려 오란다는 일본의 조공국이라며 이들을 숨키고 있었던 것에 대해 질책성의 항의를 합니다. 하지만 조선도 만만찮아서 벨테브레이(즉 박연) 표착 당시의 처리과정에서 왜관-쓰시마에서 취한 태도를 빌미로 '웃기지 마라능, 그걸 왜 우리가 알아야 하낭'식의 대답으로 킬해버립니다. 하멜 얘기는 될 수 있으면 하지않을 작정입니다만...대신 신동규 선생의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경인문화사, 2007년 8월 20일)을 추천합니다. 다만 신동규 선생은 VOC의 대조선 무역시도의 포기는 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조선과 교역을 하면 기본적인 일본 무역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크게 실익이 없다라는 판단이었다고 보고있습니다.
김시덕 선생의 신간을 통해 일본인들의 대임진왜란 인식을 엿볼 있다면 어쩌면 좀더 근원적인 동아시아 내의 관계와 무역의 전말을 알 수 있게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블로그 글로 무슨 역사의 해석이나 주장을 하지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제 주장이라기보다 독후감 정도로 간주해주시고, 대신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의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실크무역 얘기를 끝내면 책을 읽다 주워들은 난학과 VOC 얘기나 좀 올려보면 어떨까 하는 중입니다. 재미있을런지요?
덧글
그런데 이 Corea호도 국내 학설은 하멜의 보고를 받고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건조했다가 일본의 방해로 조선에 오지도 못했다가 정설인데, 시기적으로 좀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멜이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부교의 조사를 받고 데지마로 이송된 후 바타비아로 막 건너간 직후 배가 건조됩니다. VOC에 하멜의 보고서는 오히려 코레아호가 동인도로 출발한 이후에 제출된 것이죠....어쩌면 정설과 다른 얘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아무튼 될 수 있으면 하멜은 건드리지 않으려는 방침입니다...
우선 졸저들(아직 간행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을 인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그리고, 소개해주신 내용들은 하나하나 깊이 고찰해야 할 꺼리들이군요. 향후 하나하나 논문으로 답하겠습니다 ㅡ.ㅜ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는 迪倫님의 여러 이야기꺼리 가운데 VOC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추후 여러가지 연구 결과들 기다리겠습니다!
VOC 얘기를 하다보면 에도 일본의 얘기가 많이 나오게 되는데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채찍(?)을 부탁드립니다 ^^
식의 글이 얼마전부터 종종보이는던데 아마 그분들은 외교, 무역의 복잡함까지 헤아릴 두뇌는 없는 모양인듯 합니다.(얼마전에 소개해주신 국내책도 그렇고요)
19세기 후반의 전세계적으로 진행된 진화론적 질서 개편에 밀린것으로 이전의 몇백년을 거꾸로 비난하는것도 참 안스러운 태도입니다....뭐 무조건 훌륭하다고 우기는것도 문제지만 못낫다고 우기는 것도 문제며.
부연설명으로 언급해주신대로, 일본 역시 역으로 조선에게 네덜란드가 자신들의 조공국이라고 통지하고 있었고, 조선 역시 어딘지 모르는 미지의 나라가 일본의 조공국이라는데, 기존 일본과의 관계망에 클레임이 생기기보다는 포기하는 편을 택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비슷한 예가 류큐왕국과의 교류인데,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류큐와 다대한 교류를 해왔지만 류큐가 사쓰마의 속령이 된 이후부터는 일부러 사신이나 국서를 보내지 않고(국서를 보낸다는 것은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북경에서 마주친 류큐사신과도 일부러 접견 혹은 정치적 대화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ㄷㄷ
결국 네덜란드측이 조선과의 통상을 포기한 요인을 迪倫님께서 서술해주셨다면, 저는 조선이 네덜란드와 통교를 굳이 맺지 않으려 한 까닭은 이런 류큐의 사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하멜은 건들지 않으시려는 방침에 비해서 저의 조야한 덧글로 의도치 않은 분란(하멜에 관한)이 발생할까 두렵군요. 죄송합니다. ㄷㄷ
류큐왕국의 케이스는 상당히 흥미있습니다. 상당히 저의 의견을 보완해주신 사례를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인식으로 인해 상업적 손익계산을 내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실제 조선에서도 류큐에 대해서 그런 디스를 했다는게 상당히 놀랍습니다. 어쩌면 동아시아는 각각 중국을 정점으로 하위 조공체계를 무수히 만들고 서로 소중화라던지 자체적인 외방의 중심임을 자처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조선조차 초기에는 류큐나 여진 (심지어 왜국도!) 을 속방으로 두고 서브센터를 자처했지않았던가 하는 예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좋은 말씀 더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주 따뜻하고 생산성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VOC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사람들이라서 돈이 되면 뭐라고 하든 노 프라블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조선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하니 그렇게 인식을 하고 그렇다면 기존의 거래선과 트라블을 만들지않겠다는 방향으로 나간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일본이 자기들을 속방으로 여기는 것조차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19세기 들어서 그렇게 머리를 조아려왔던 혜택을 한번 크게 써먹습니다....이 얘기는 언제 따로 하겠습니다.
스페인인들이 흔히 그렇듯 종교적 열정을 앞세워 외교관계를 그르친 경우가 많은데, 네덜란드인들은 경제적 관계만 따질 뿐 막부에게 철저하게 비종교적 태도를 어필했다고 하죠. 책에서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역시 네덜란드인들은 뼈속 깊이 장사꾼 마인드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생각 못한 경지가 또 있었군요. ^^
동아시아와 관련된 애기들 다음에 올려보겠습니다. ^^
비슷한 인종인 벨기에와는 몇배의 기록을 가지고 있죠.
그러면서 혼자 리버럴 한 척은 또 다해요...
그리고 인도네시아 식민지 토벌 전쟁이나
그들의 후예인 보어인(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인도도 무릎 꿀리고 순장제를 없앴던 영국인들도 손을 못대게 만들던 인종 차별 등등(아파트하이드)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죠.
그래도 돈만 주면 지옥까지도 갈 수 있다는 Flying Dutchman의 신화여!!! 영원하라...
한가지 여기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노는 곳입니다. ^-^ 그러니 부담갖지말고 재미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조공국으로 주장했던 것이 조선에 공식적으로 통보되었다던가, 알려진바가 있었는지가 알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반응도 궁금하군요. 왜냐하면 17세기초-18세기 실학자들이 나올때까지도 조선은 일본을 소중화주의에 근거해서 무시하고 있었다는 전반적인 관점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현재 우리가 많이 가지고들 있는 '일본은 원래 야만스러운 국가인데, 조선이 정치/도리/문물을 전수했다'는 문화전수의식이 체계화된 시기 역시 17세기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러한 조공국발언이 공식적으로 조정에 알려졌다면 어땠을지 많이 궁금해지는군요.
후일 포스팅해볼 예정인 호사카 유지(정외과출신박사긴 하고, 교양서에 불과하지만) 조선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한 부분에도 일본의 조선관이 17세기초반까지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조선을 선진적 예교국가로 인식하고 있었고, 17세기 후반-18세기전반에 걸쳐 비로소 모순적인 시각 (즉, 선진국으로 존경하는 자세와 일본이 더 우수하다는 인식)이 대두된다고 적고 있어서, 꽤나 궁금한 점이 되었습니다.
계속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질문하신 내용은 제가 알고있는 한도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쪽의 인식을 알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통신사들은 소중화주의로 인해서 보이지않았을 수도 있고, 왜관을 상대하는 동래에서는 쉬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저는 그런 일본의 대조선 인식이 조선에 알려진 것은 아직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다만 제가 알기로 17세기를 전후해서 양국에 상당히 혼란스런 상호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접하는 정보의 채널에 따라 상당히 모순적인 태도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적인 인식은 양국 모두 인진왜란의 경험을 반복강화하는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고보니 별로 대답이 안되는군요....아무튼 자주 들러 대화나눠주시기 기대하겠습니다!
링크신고합니다~.
저도 따라서 링크 하겠습니다. 한 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김시덕씨의 책은 매우 흥미롭지만, 로널트 토비의 글 <쇄국이라는 외교>의 번역본과 야마구치 게이지의 <일본의 쇄국과 개국> 번역본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마시타의 이론도 선후관계가 뒤집힌 감이 있습니다.
선후관계가 뒤집혔다는 건 조금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셨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