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일본인의 디아스포라 - 일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런지... by 迪倫

이웃 블로거 헤르모드님의 "탁신 전총리가 캄보디아 경제고문을 사임 - 캄보디아.타이 관계사의 일막"에서 일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에 대한 부분을 읽고 트랙백해서 씁니다.

원래 실크 시리즈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도 하지만 뭐 시험치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진도맞춰 나가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보다 일본의 동남아지역에 대한 관심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문득 우리는 우리가 동북 아시아에 중국 및 일본과 같이 속하여 있다고 확신하지만, 일본은 역사적으로 동북 아시아에도 속하지만 남중국해 그리고 동남아시아에도 상당히 밀접하게 엮여있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잠시 17세기의 일본과 동남아시아 제국가들과의 은원을 한번 살펴보는게 어떨까 해서 글을 올립니다.

뭐 대충 이전에 쓴 17세기 경제사 부분과 연관도 되고 시리즈 글을 쓸 때 글의 흐름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미처 포함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부분이기도 해서 생각난 김에 한번 써보기로 했습니다. (실은 덧글에 언급을 했다가 헤르모드님이 부추겨서 덩달아 흥분한 겁니다 ^^)

먼저 걸리버 여행기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1726년 처음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의 3번째 부분은 원 제목이 "A Voyage to Laputa, Balnibardi, Luggnagg, Glubbdubdrib, and Japan (라퓨타, 발니바디, 러그나그, 글럽덥드립 및 일본으로의 여행)"이며, 시대 배경은 1706년 8월 5일부터 1710년 4월 20일까지의 모험입니다.

이 3부의 시작에 출항한 후 8개월 뒤 인도의 포트 조지, 지금의 마드라스를 거쳐 지금의 북부 베트남 통킹으로 간 걸리버는 통킹에서 다시 북북동으로 출항을 하다 네덜란드 해적선 2척을 만납니다. 해적선에 사로잡힌 걸리버와 선원들은 네덜란드 해적선장에게 같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으로서 자비를 구하지만 해적선장은 다른 한척의 해적선장에게 이들의 처분을 넘깁니다. 그러다 미움을 받은 걸리버는 바다에 혼자 버려지게 됩니다. 모험은 여기서 시작되어서 공중에 떠있는 라퓨타와 공상의 나라들을 거친 후 일본으로 와서 네덜란드인 행세를 하여 간신히 나가사키를 거쳐 VOC 배를 타고 유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네덜란드 해적선과 같이 행동한 다른 해적선장이 글 중에 일본인 선장으로 나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1980년판 아이작 아시모프의 주석판에는 일본의 17세기 초반 쇄국과 VOC 단독의 무역허용등을 간단히 얘기하면서 1640년 이후 실제 일본의 쇄국령으로 일본에서 외국으로 사람들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 속의 1707년 현재 동인도 해양에서의 일본인 선장은 비현실적인 소설이라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참고로 걸리버 여행기는 실은 18세기의 소설입니다만,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세력을 넘어서서 점차 세력을 늘려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점차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18세기 초반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정치풍자 공상소설이기는 하지만 상당 부분 당시 동인도 해양의 상황에 대해 의외로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석과는 달리 혹시 실제 네덜란드인들과 일본인들이 동인도 바다에서 같이 해적질을 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17세기 동남아시아 특히 지금의 태국인 샴왕국의 아유타야, 스페니시 필리핀의 마닐라, 베트남의 통킹 및 캄보디아에 각각 거의 1세기에 걸친 정착 일본인 마을 스스로 니혼마치라고 부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일본인들은 이르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체로 3가지 분류의 사람들입니다. 즉 주인선 무역 상인, 키리스탄이라고 불린 카톨릭 신자, 그리고 전국시대 이후 낭인이 된 사무라이 무사, 물론 명확하게 카테고리가 나눠지는게 아니라 상인-무사, 키리스탄-무사, 키리스탄 상인, 또는 키리스탄 상인 무사와 같이 속성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도 17세기 동안 일본과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VOC와의 관계변화에 따라 대략 3개의 시기로 구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태국인 샴왕국의 수도였던 아유타야에 정착한 일본인 커뮤니티의 경우 1580년대 후반에서 1630년대까지 번성을 합니다. 특히 최고 전성기였던 1620년경 1000~1500명이 정착하여 실제 샴왕국의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아유타야에 도달한 일본인들은 16세기말 주인선 무역을 통해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대략 1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일본 본국과 연결이 강하게 되어서 일종의 일본의 대표같은 신분이었습니다. 북 베트남의 통킹 역시 초기에는 이런 상업 인원들이 정착한 지역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의 유입인원들은 일본에서 박해를 피해 추방 또는 탈출한 카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쇄국과 맞물려서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원래 카톨릭 신자들이 이주한 최대 지역은 스페니시 필리핀의 마닐라였습니다. 원래 이들이 스페인-포르투갈의 이베리안계열의 카톨릭 전파의 세력권에 있었던 사람들이라서 더더욱 스페니시 마닐라로 쉽게 이주하였는데, 최대 3000명 가량의 일본인 인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수는 당시 스페인인들보다도 많은 숫자입니다.)

마지막 유형인 사무라이 낭인들은 실제로 위의 두 부류와 그다지 딱 구분되지 않습니다. 왜구와 일본 무역상이 그리 명확하게 구분이 안되는 점과 같다고 할까요...아무튼 아유타야의 경우 이 사무라이계통의 일본인들이 상당히 태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마다 나가마사의 초상

야먀다 나가마사는 대략 1585년 무렵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611년 또는 1612년 경 포르모사로 갔다가 다시 아유타야로 갔습니다. 포르모사는 지금의 타이완이고 의외로 큐슈에서 동중국해의 류쿠열도를 통해 일본인들이 쉽게 배로 오가던 곳이었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얘기한 적 있는 1620년대 후반의 VOC와 일본의 충돌도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1620년대 초반 아유타야의 일본인 커뮤티니의 수장으로 부각된 그는 마침 전운에 휩싸인 동남아시아의 정세를 타고 송 탐(Song Tham)왕에게 발탁되어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VOC 조차도 당시 일본과의 1620년대의 갈등으로 본격 직교역을 하지못하고 있던터라 대일본 무역 즉 일본의 은을 확보하려고 야마다 나가마사세력을 후원하게 됩니다. 아, 아유타야를 중심으로 한 샴왕국의 수출품은 사슴가죽이었다고 합니다.

1628년 샴왕국의 오프라(Opra)라는 정부 고위직에까지 오른 야먀다 나가마사는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휘하의 일본인 군사도 800명에 도달했다고 합니다......만, 1630년 그의 정적에 해당하던 시 워라웡(Si Worawong)의 간계로 남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동한 후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죽고 맙니다. 그리고, 시 워라웡이 송탐 왕을 뒤이어 새로 쁘라삿 통(Prasat Thong) 왕이 된 후 그동안 야마다의 후원으로 번성하던 아유타야의 일본인들을 모두 캄보디아로 추방당하거나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후 일본과의 무역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유화정책으로 일부 일본인들이 캄보디아에서 다시 아유타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전의 샴왕국 국내 정치에서의 영향력은 없어지고 대신 일본관련 무역에만 종사하다가 그나마도 이후 태국인들이 스스로 이 무역을 차지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대신 VOC가 바타비아-아유타야-나가사키 라인을 맡아서 중개인 역할을 하다가 그나만도 아유타야가 버마에 망하면서 일본과의 무역역사는 끝이 납니다.

마닐라나 마카오로 간 키리스탄 일본인들은 이들과는 물론 다른 역사의 길을 갑니다. 이 부류의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와다 리자에몬이 있습니다. 와다는 일찍 기리스탄의 박해를 피해 마카오로 탈출을 하였다가 베트남의 쾅남(Quang Nam)에 포르투갈의 대표로 생사 무역을 하러 왔다가 이후 통킹으로 옮겨 베트남에 일본의 구리를 수입하고 대신 베트남 생사와 실크 직물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무역업 에이전트로 종사하였습니다. 후반부에는 물론 포르투갈이 아니라 VOC를 위해 일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기리스탐 일본인들은 동남아시아 각국에 흩어져 일본과 직접 무역에 종사하지는 못하고 역내에서 포르투갈이나 VOC의 에이전트 역할을 하면서 점차 현지 세력에 동화 흡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쇄국 정책이 행해진 에도 일본은 이들을 해외 네트워크로 활용하면서 진취적인 일본인의 기상을 휘날리는 케이스로 받아들였을까요? 생각과는 달리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의 주인선 무역을 제외하고 실제 에도 일본에서 이들을 자국의 보호대상이라던지 활용대상으로 간주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쇄국 정책이 실행되면서 실제 무역거래는 거래선이 바뀌기는 하여도 외국 물품의 수입이 적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앞의 포스팅들에서 좀 다뤘습니다. 대신 쇄국이란 일본인들이 더이상 일본 국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리고, 외부에서 일본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인적 장벽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여기 이 동남아시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약 1세기 동안 퍼져나갔던 일본인들에게도 빗장을 걸어잠궈 이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쇄국입니다. 바깥에 남은 이들은 정말로 본국과 연결이 끊어진채 표류하게 되고, 점차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각광을 받은 것은 한참 뒤 1940년대입니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석유와 천연자원 공급선이 필요해진 일본으로서는 역사에서 찾아낸 동남아시아의 일본인들의 행적이 이야말로 대일본제국의 씩씩한 태도가 아니냐, 그리하여 야마다 나가마사는 그야말로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위인이 되고 맙니다. (전전의 나위츠가 타이완에서 반대로 다뤄진 것과 같은 이유인거죠)
동남아시아에 이런 연고를 주장하면서 대동아전쟁의 전선의 확대를 현지인들과 함께 서양세력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맞형의 자리를 주창한 것입니다.

1943년 도쿄에서 동아시아 각 대표들을 불러모아서 치른 대동아회의의 기념사진입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을 동북아시아 국가로만 간주하면 전체를 보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겠죠.

실은 오늘 아침(8월 29일) 배달되어온 뉴욕타임즈의 국제면에 상당히 당황스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본의 극우 네티즌들이 미국의 티파티를 벤치마크 삼아 세력을 확장하면서 인근 공원을 사용하는 조선학교의 어린이들을 이 공원은 일본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이라는 이유따위로 위협하는 사실들이 첫머리에 실렸었습니다. (기사는 여기)
사진에 실린 우익 네티즌 그룹이라는 자이토쿠카이 회원의 완장에 "불령선인정벌전(不逞鮮人征伐戰) 양이(攘夷) KOREAN BUSTER" 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이제 한국인들에 대해 19세기말 그야말로 위협적인 서양인들에게나 쓰던 "양이"라는 표현까지 써야할 정도로 일본의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릭해서 사진이라도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한켠의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니 정작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한국은 일본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한국은 나아가고 있습니까?

**참고한 자료는 William D. Wray, "The 17th-Century Japanese Diaspora: Questions of Boundary and Policy", Thirteenth International Economic History Congress, Buenos Aires 2002. Preconference: Corfu, Greece, 21–22 September 2001.
그리고, Cesare Polenghi , "The Japanese in Ayudhya in the first half of the 17th century", 2004 였습니다.

**역사밸리에 글을 올리고 나서 보니 오늘 거기있으면 왠지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잘 전달되지않을 것 같은 생각입니다. 역사밸리에서 다시 내렸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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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앨런비 2010/08/30 12:14 # 답글

    야마다 나가마사가 활약한 것은 아유타야의 안습한 중앙화도 한 몫을 했습니다.
    봉건제인 아유타야에서 왕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직할군중 하나가 국내거주외국인이라서 말입니다(....)
    애초부터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외국인들이 거주 허가를 받을 때 조건중 하나가 전쟁때 왕의 직할군으로 참가한다이니 이거 뭐-_-;;;
  • 迪倫 2010/08/31 10:39 #

    안녕하세요. 동남아 전문가께서 몸소 납셔주셔서 감사합니다!! ^^
    베트남사 종종 올리시는 것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그쪽을 잘 몰라서 항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아유타야측에서는 이런 배경이 있었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 라라 2010/08/30 12:29 # 답글

    와 좋은 글입니다.
  • 迪倫 2010/08/31 10:39 #

    감사합니다!
  • 밥과술 2010/08/30 13:02 # 답글

    대만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실제 오늘날의 대만의 시조 정성공(쩡청꿍)은 나가사키에서 중국해적과 일본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요. 그 당시는 해적이냐 상인이냐가 애매하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대만의 친일본적인 태도는 일제 식민지가 긴 것도 있었지만 정성공이래의 해상교류그리고 그로 인한 혈연교류에서도 온것 같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Zheng_Chenggong 참고로 넣었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참, 일본교토발 기사는 잃어버린 일본의 자신감, 위기감에서 온거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글 올리겠습니다.
  • 迪倫 2010/08/31 10:49 #

    정성공의 예도 그렇고 심지어 VOC도 초창기에는 사략선 즉 privateer 사업이 최고 수익률이었다고 하니 해적이란게 상인의 다른 말이 아닌지 싶습니다. (약간 깍두기 스타일의 상인이랄지...^^)

    대만친구들과 처음 애기를 하게 되었을 때 실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책이나 영화로 알고있던것과 직접 그런 친일성향의 개인들을 만나는 것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더군요. 글에도 적었지만 일본의 동남아 및 대만과의 역사적 인연은 간혹 우리와 상당히 다른 컨텍스트라서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우가 좀 많습니다.

    아, 그리고 정성공 위키 링크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VOC의 자료에서도 코싱아로 계속 나오는 기록들이 있어서 처음에는 이게 누군가 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國姓爺를 말하더군요..

    뉴욕타임즈 기사관련된 글은 그럼 나중에 올리시는 글 기다리겠습니다. (바쁘실텐데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실은 한참 바쁘실텐데 읽고 덧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헤르모드 2010/08/30 15:10 # 답글

    일본을 동북아시아에만 속한 국가라고 생각해서는 일본의 전체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야마다 나가마사에 대하여는 에도시대에도 적지 않은 수의 문헌이 기록되지요. 많지는 않지만, 독특한 문헌들이라, 관심을 갖고 조금씩 수집하고 있습니다.

    수 년 전에 학회 참석차 시즈오카에 가보니, 거기가 야마다 나가마사의 고향이라더군요. 타이풍으로 장식된 그의 흉상을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적륜님을 부추겼다니, 책임감을 느..껴야 하나요 ㅋㅋㅋ
  • 迪倫 2010/08/31 10:51 #

    헤르모드님께서 야먀다 나가마사에 관심이 있으신줄은 몰랐습니다. 트랙백해서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관련된 도서 정보가 있는데 그쪽 포스팅에 덧글로 남기겠습니다.

    트랙백 글로 멋있게 마무리해주셔서 책임감은 안가지셔도 됩니다 ^^
  • 들꽃향기 2010/08/30 15:17 # 답글

    아사이 나가마사 자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근대에 들어와 '진취적인 일본인'의 사례로 대동아 공영권과 연결된 것은 처음 알게 되었군요 (....)

    그러고보니 일본이 그나마 나가사키 교역으로 유지되던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근대기에 들어와 다시 제한하면서, '그들이 없었을때 우리는 평화로웠으니, 그들이 없다면 다시 평화로워질 저인저'라는 식의 '자신감 없는 논리'로 회귀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어쩌면 언급하신 일본 우익들의 '양이'라는 표현의 '부활(?)'도 그런 자신감 결여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도 가질 수 있다는 문제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 迪倫 2010/08/31 10:57 #

    대동아 공영권도 그렇지만 실은 이번 글에서는 좀 너무 멀리가는 것 같아 쓰지않았는데 이차대전 후 버마에서의 독립운동에 구 일본군 출신들이 또 많이 참가하였던 사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오호!' 스러운 사례만 있으면 뭐든지 활용하는게 민족주의의 한 경향이기도 해서...-_-
    (우리도 일단 안토니오 코레아를 밀어붙여서 인도 고야에 종주권을 한번 노려보는 것도 ^^)

    그나저나 말씀하신대로 우리도 사회의 문제를 이런 '양이'적 성향으로 풀려는 경향이 없는지 반면교사에게 배워야할텐데요...요며칠의 역밸을 보니 좀 시간이 더 걸릴까 싶기도 합니다.
  • 앨런비 2010/08/31 11:21 # 답글

    추가로. 아유타야가 일본과 직교역을 하긴 했습니다. 17세기 말 나라이 왕때 말입니다. 전쟁자금 부족하다고 직교역을 했는데, 일본은 쇄국정책을 쓰니 중국배인 척 하고 일본에 가버린거죠(....) 그 결과는 동 싹쓸이.;; 일본은 대충 어딘가 알아먹으면서 모른척 하고, 아유타야도 뻔히 들킬 사실이지만 중국인인 척 하면서 엄청난 양의 동을 싹쓸이합니다(....) 관련논문으로 조흥국교수의 논문을 본 듯 한데... 조흥국교수의 논문이 모 선교단체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으니 다시 한번 찾아보죠.;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외부인 영향으로 야마다 나가마사가 주로 언급되는 것도 불만인 것이, 영향력이라면 콘스탄틴 풀콘이나 필리페 브리투가 압도적인데 이거.; 아유타야-방콕 시기에 활약했던 페르시아계의 분낙가도 있고.; 윗 글에서 쓰인것처럼 야마다 나가마사가 띄워진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가 매우 큽니다. 그에 비해서 지금의 포르투갈이나 버마는 국력이 안습이니 버마 남부를 실효지배했던 필리페 브리투는 아예 잊혀진거죠 뭐.;
  • 迪倫 2010/08/31 11:48 #

    아, 이 직교역 에피소드는 제가 참고한 논문에도 나와있었습니다. 1661년에 '당선'으로 등록된 샴 배가 내항한 이래, 가이헨타이(華夷変態)라는 자료에 1687년부터 1723년까지 샴에서 48척, 또다른 기록인 "도선부세쓰가키"에는 1674년에서 1723년 사이에 64척이 입항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구리는 원래 17-18세기 동남아시아 지역의 최대 무역상품이었다고 하더군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나가사키에서 아예 배의 발라스트로 동전을 실고 나갔다고 하고, 베트남의 현재 통화인 "동"도 원래 동전의 동티엔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더라구요.

    말씀하신대로 일본이 더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영향이 크지요. 포르투갈이나 버마는 지금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그나저나 말씀하신 필리페 브리투같은 이름들은 저도 상당히 낯선 인물들입니다. 흥미가 끌리는데 좀더 찾아봐야겟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앨런비 2010/08/31 11:57 #

    http://hyukjunseo.egloos.com/2804849
    http://hyukjunseo.egloos.com/2804852
    예전에 군대에서 쓴 글이 있습니다.
    이이상 찾아볼까도 했는데 구할 수 있는 자료가 오프라인에 있는 천조국의 한 대학도서관에 OTL
  • 迪倫 2010/08/31 12:40 #

    링크해주신 글 잘읽었습니다. 상당히 흥미있는 인물이군요...
    이번 글은 원래 일본에 대한 글이다보니 실은 상당부분 그쪽으로만 초점을 맞춘것 양해바랍니다.
    덕분에 새로운 방향의 주제들에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참에 링크 하겠습니다. ^^
  • 앨런비 2010/08/31 11:26 # 답글

    태클 추가. 베트남의 쾅남, 통킹이라고 하셧는데, 꽝 남은 남베트남의 통칭, 통킹은 북베트남의 통칭이니 차라리 남베트남, 북베트남으로 구분하는게 나을 듯 합니다. 이즈음 남베트남이 떨어져 나가면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아예 다른나라로 보고 광남국이라고 했습니다. 이런면에서 북베트남의 통킹이라는 표현도 좀 어색하군요. 북베트남이나 남베트남이나 주로 쓰던 항구나,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은 따로 이름이 있습니다. 북베트남은 기억이 잘 안나고(...) 남 베트남은 일본인 다리로 유명한 호이 안이죠. 유럽인들에게는 Faifo라고 불리던 곳이고.
  • 迪倫 2010/08/31 11:53 #

    태클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저는 이 지역 사정에 좀 어두워서 쾅남과 통킹을 논문에 소개된 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통킹은 그런데 컬리버 여행기부터 특히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자료에 그대로 많이 나와있어서 그냥 지명으로만 사용을 한 것입니다만. 북베트남의 통칭이군요...호이 안은 들어본적 있는데, 부그럽게도 Faifo는 오히려 못들어봤습니다.

    역시 동인도를 깊이 들어가려면 동남아를 건너뛸 수가 없겟군요...공부가 부족해서리 -_-;;
  • 앨런비 2010/08/31 12:05 #

    잡설이라면 17세기 초반 북베트남과 VOC와의 관계는 부자관계라고 심하게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북베트남 왕이 아버지, VOC 바타비아 상관장이 아들내미(....) 이 야기가 적힌 책이 영길리어고 값도 100달러쯤 되서 보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있긴 한데, 동남아의 경제사 관련해서는 상당히 괜찮은 책일 듯 합니다. Hoang Ahn Tuan의 Silk for Silver입니다. 아마존에서 쉽게 구입 가능합니다. 다만 배송비까지 생각하면 OTL일 뿐.

    서평은 일단 공개되어 있고, 그 서평만으로도 꽤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링크하겠습니다.
    http://kaseas.org/reviews/2008_18_1/8-review.pdf
  • 迪倫 2010/08/31 12:59 #

    서평 글 잘읽었습니다. 제가 좀 관심을 가지고있는 VOC 관련된 책이라서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아마 도서관에서 어쩌면 빌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TANAP 의 자료들이 재밌는게 많아 나도 읽을 수만 있다면 하고 늘 상상만 하는 자료들인데..
    이책말고 제가 헤르모드님의 트랙백 글에 덧글로 쓴 또다른VOC 요원의 샴 왕국 기록에 혹시 흥미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책 제목은 Vliet's Shiam입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 앨런비 2010/08/31 13:49 #

    판 플리엣의 내용은 이미 유명합니다. 동남아사 관련책에서 수도없이 인용하는 기록이 판 플리엣의 기록이니까요. 다만 전 한국에 사는 평범한 공돌이(...)다보니, 영어책을 읽는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주문할 때 배송비가 더 많이 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있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죠(먼산)
  • 앨런비 2010/08/31 13:53 #

    동남아의 무역 관련해서는 우리나라의 최병욱 교수의 논문도 읽을 만 할 것입니다. 논문검색시스템으로 쉽게 검색가능한데... 교역, 경제 관련이라면 19세기 초반 베트남의 관선무역 및 증기선 운용에 관한 내용이 좀 보입니다. 그 외에는 요즘 토익공부니, 복학공부니 바빠서 역사공부를 거의 포기상태인지라 좀 뒤져봐야겠네요(.....)
  • 迪倫 2010/09/03 10:19 #

    딥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북베트남과 VOC 간의 부자관계는 분명히 그랬을 거라고 생갑합니다. 제가 아는 VOC는 돈만 되면 뭐든지 하는 족속들이라서 일본에서는 에도참부를 해가면서 마치 번신처럼 행동했었죠. 당연히 후미에까지 하면서요. 뭐 실제 VOC의 입장에서 북베트남이 어느정도 이익 창출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저도 책을 봐야겠지만 필요하다면 할애비 손자도 했을 겁니다^^

    최병욱 선생의 논문들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앨런비 2010/09/03 11:02 #

    개인적으로 그것때문에 조선과 VOC가 1:1로 통교한 봉황의 비상 설정을 굴욕에 가깝게 보고 있습니다(먼산) 돈만되면 칭신도 하고 아들내미도 하는 족속이 VOC인지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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