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실크무역: 외전 - 1863년 프랑스 중위의 죽음과 이케다 사절단 by 迪倫

**지금 쓰고 있는 근대화와 실크 시리즈 글과 관련이 있어서, 월광토끼님의 포스팅"1863년 8월 15-17일, 포격 당하는 카고시마"에서 트랙백하여 쓰는 글입니다.

월광토끼님이 지난 8월 16일 올린 가고시마 포격사건은 일본 막말의 회오리를 시작하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직접적인 원인이 된 영국인 리차드슨의 살해사건은 보통 나마무기 사건이라고 불립니다. (나마무기는 지금은 가나카와현 요코하마시 쓰루미구에 속한 당시 사건이 일어난 마을의 이름입니다. 生麥(나마무기)이라는 이름따라 그런지 지금은 일본 최초의 맥주인 기린맥주의 양조공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맥주 역시 요코하마에서 서양인들이 처음 양조를 시작하였고 그 회사가 오늘날의 기린맥주가 되었습니다. 그냥 맥주얘기로 옆으로 빠지고 싶은신 분은 여기 클릭)

나마무기 사건은 실상 위협적인 서양세력에 대한 일본 사회 전반의 반감과 두려움이 터져나온 사건같습니다. 실제 9월에 이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이듬해인 1863년 3월 에도가 아니라 교토 텐노의 조정에서 '양이실행의 칙령攘夷実行の勅命' 즉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쇄국을 지키라는 칙령을 포고하고 에도 바쿠후에 요코하마를 폐쇄하라는 압력을 넣습니다.
월광토끼님이 쓰신 사쓰마번과 영국이 서로 교섭하고 포격하고 하는 일들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이 칙령이 선포되었지만 물론 에도 바쿠후는 이를 실행할 의도도 그리고 이제 밝혀진 것처럼 실행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측에 사쓰마번을 공격하면 바쿠후와 다른 다이묘들이 지원을 하겠다는 제안까지 넌즈시 하게 됩니다. 영국과 요코하마의 다른 서양세력은 강경일변도로 밀어붙여 에도와 요코하마 인근의 사람들이 재산을 챙겨서 시골로 피난가는 사태가 연일 벌어집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그러자 외국인을 공격하고 배격하는 일들이 급속도로 펼쳐집니다. 예를 들어 1863년 5월 6일 아침 프랑스 상인이 물건값을 치러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다가 공격을 당해 총을 쏴서 일본인을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미국인 두명은 목을 쇠 갈고리로 걸고 끌려가다가 요코하마주둔 호위무관에게 간신히 구출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1863년 가을 또 한건의 중요한 사건이 터져나옵니다. 이번 희생자는 요코하마 주둔의 프랑스 엽기병(Chasseurs) 장교 카뮈 중위(M. de Camus) 입니다. 트랙백을 한 이유는 실은 이 사건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 이 당시 요코하마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한 외교관을 소개합니다.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 경(Sir Earnest Mason Satow, 1856-1927)는 1861년 막 18살이 될때쯤 영국 외무성으로부터 견습외무통역관 후보의 자격으로 일본어의 학습을 명받습니다. 그 이듬해 일본으로 부임한 햇병아리 사토는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일기에 위에서 언급한 리차드슨의 살해에서부터 '사쓰마 정벌'에 출동한 증언, 그리고, 요코하마 외인 거류지에 전달된 충격적인 카뮈 중위의 살해 사건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1863년 10월 15일자 일기에 '어제 가나가와로 말을 타고 가던 프랑스 엽기병 장교 M. 드 카뮈가 공격을 받고 살해를 당했다. 그의 오른팔은 아직도 고삐를 쥔채 좀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상처는 코, 턱, 오른쪽 정맥, 척추등에 나있었고, 왼쪽 팔은 피부만 붙어있었으며, 몸통의 온쪽은 심장까지 절개되어있었다. 모든 상처는 악당의 손에 어떤 강력한 칼이 들려져있었는지 보여주듯이 완벽하게 깨끗이 잘라져있었고, 거의 모든 상처가 치명적으로 보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치 '에도판 악마를 보았냐'라고나 할까요 ㅎㄷㄷ...

나마무기 사건에 비해 가려진 느낌은 있지만 그동안 영국에 곁다리로 보조를 맞추면서 실크만 신경쓰던 프랑스가 마침내 독자적 행동에 나섭니다. 당시 주일영사 벨르코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후란스 제국도 업수이 여기지마라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분주히 막후교섭을 합니다. 일단 배상을 요구하고 한발 더나가 일본 사절단의 구미순방을 주선하여 그동안 영국에 뒤쳐저있던 세력을 만회하려 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막 진가가 밝혀진 일본 생사와 누에에 관련된 경제적 이해관계도 가장 크게 깔려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를 계기로 영어로 이케다 미션으로 불리는 제2회견구사절 第2回遣欧使節, 또는 요코하마 쇄항담판 사절단 横浜鎖港談判使節団의 파견을 프랑스가 주선하게 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절단의 이름 그대로 요코하마를 폐쇄하려는 담판을 지으려는 사절단이었습니다.
1863년 12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출발한 담판 사절단은 상하이, 인도, 수에즈에서 육로로 카이로로, 다시 마르세이유를 거쳐 파리까지 가서 나폴레옹 3세를 만납니다. 물론 요코하마 폐쇄 같은 원래 임무는 실패합니다. 아니, 아예 사절단들이 서구 문명에 경도되어버려 문명개화의 투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파리에서 프랑스가 원하던 대로 보다 강화된 새 조약을 맺습니다.
뉴욕타임즈 1864년 7월13일자에 파리발 6월 27일자 런던 헤럴드를 인용하면서 새로 맺은 불-일 조약 전문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여기 클릭)
내용은 대체로 나가토(長門 = 바로 조슈長州)에서 프랑스 전함을 공격한 것에 대한 배상금 14만 멕시코 페소 및 시모노세키 해협의 무사통과 보장, 프랑스 상인의 상업행위에 대한 보장 및 관세의 인하등이 주 조약 내용입니다. (1863년 조슈번에서 시모노세키 해협을 자나가는 프랑스 상선을 공격하여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전함이 출동하여 가고시마와 유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신 조약의 부칙으로 카뮈 중위의 가족들에게 배상금 $35,000 (192,500 프랑) 을 지급하고 살해자를 찾아서 벌을 묻기로 한 별도 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돈은 다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배상금 10만 페소는 바쿠후가, 4만 페소는 조슈번, 카뮈 중위 배상금은 바쿠후가 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심각하게 충돌을 빚은 사쓰마와 조슈가 바로 누구보다 먼저 서양의 힘을 깨닫고 바쿠후를 넘어서 근대 일본을 만드는 주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언급한 것처럼 일련의 사건들이야말로 일본을 강제로 눈뜨게 한 역사적 사건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일련의 외국인 습격 사건들이 상당히 흥미있는 이유는 실은 이후 일본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서양에 고착시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즉 체면을 건드리면 길 위에서도 칼을 휘둘러 상대방을 베어버리는 사무라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말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하지만 전혀 반대의 이미지를 실은 역사에서 보게됩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일본의 난학의 주요서적인 해체신서에 대한 책인 『에도의 몸을 열다』(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그린비, 2008)를 읽으면 상당히 다른 실상을 보여줍니다. 18세기 이후 에도시대의 사무라이의 경우 실은 칼을 빼서 사람의 몸을 베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애니와는 달리 칼을 어떻게 장식하고 어떤 각도로 차는게 간지나는지가 주 관심이었지, 심지어 할복마저도 점차 칼끝을 대기만 하는 시늉에서 아예 오우기바라(扇腹)라고 부채로 대체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추신구라의 원래 사건인 아코(赤穂) 사건의 경우 타이먼 스크리치의 해석은 '원칙적으로는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일' 권리는 있지만 '실제로는 더이상 칼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도쿠가와 바쿠후의 법체제의 뼈대를 흔들었다고 까지 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말해 18세기 이후 평화가 오래 지속된 에도 일본은 실은 상당히 '무력사용의 권리가 거세된' 사회였는데, 서양인들이 몰려오고 위협에 후달린 일본인들 특히 사무라이들의 반응으로 인해, 이 화석화된 '명목상의 권리'가 마치 일본인을 대표하는 특성으로 부각되고 스스로 이를 강화하기까지 하면서 20세기의 일본을 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형세를 타고 넘어가 "생사"와 "누에"를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게 오늘 이 포스팅의 결론입니다. 원래 실크 포스팅을 계속 연결해서 쓰고 이 복잡한 정국은 넘어가려고 했는데, 월광토끼님의 글을 읽고 으음 그만...


사토경은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담당 전문 외교관의 전범 같은 사람입니다.18세에 시작한 직업 외교관의 커리어가 1862년부터 1906년까지 44년간 중국, 일본, 샴, 우루과이, 모로코에서 걸쳐 진행되어 갔습니다. 이중 일본에는 세번이나 부임을 하면서 특히 그의 일본어 실력으로 많은 일들을 처리해냈었습니다. 게다가 18세에 동아시아로 가면서 쓰기 시작한 일기를 1926년까지 지속적으로 그야말로 무려 64 년 동안 일기를 계속 써서 당시 동아시아 외교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일기는 여러권으로 편집되어 이미 출판들이 되어있습니다, 저는 1862년에서 1863년까지 초기 일본시기의 일기를 영어로 해제한 자료를 참고 했습니다. pdf 파일은 여기 클릭.
문득 지난번 소개한 적이 있는 클래이튼의 경우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지 19세기말 20세기초 다른 세상에서 웅지를 떨쳐본 이들의 케이스입니다. 물론 제국주의 포함해서요… 그가 쓴 1895년부터 러일전쟁 전까지의 한국과 만주에 관한 보고서도 출판이 되었다고 하는데 찾아서 보고 싶은 희망 목록에 올려두고 있습니다만...

**월광토끼님의 포스팅에 감사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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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까날 2010/08/21 21:29 # 답글

    추신구라의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유가 이미 유명무실해진 무사도을 실제로 따랐기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기억이 나네요.
  • 迪倫 2010/08/22 01:55 #

    영화나 가부키와는 달리 이미 시대가 바뀌었던 때에 옛날식으로 칼을 쓴것이라는 해석을 하더라구요...
  • 행인1 2010/08/21 22:55 # 답글

    이랬던 조슈와 사스마가 막부를 때려엎고 근대화의 역군(?)이 되는 줄거리 전개는 지금봐도 참 대반전인듯 합니다.
  • 迪倫 2010/08/22 02:07 #

    게다가 어찌보면 막말시기만 해도 바쿠후와 대부분의 다이묘들이 조슈와 사쓰마를 이지메하는 형국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보고 이 둘을 치면 도와주겠다고 한다던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돌아온 프랑스 해군에 상으로 특별 기를 내렸다고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이런 압박이 막부타도 운동으로 연결되고 대반전으로 연결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내용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복잡해서 정리가 잘 안될 정도입니다...
  • 월광토끼 2010/08/22 18:54 # 답글

    제 경망한 졸문에 이리 좋은 글로 반응해 주시니 감사해야 하는건 접니다;;;

    감사히,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迪倫 2010/08/23 08:21 #

    천만에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몸조리 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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