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만 - 완결 by 迪倫

19세기의 부산 -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에서 글이 길어져서 뒤로 미뤘던 후편입니다.

여기서 대략 생각을 마무리 해봅니다.

기존의 거의 대부분의 왜관을 중심으로 한 조일관계의 서술은 상당히 부정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영향 자체를 다룬 연구도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최근에 들어서야 왜관 자체가 알려지기는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런일이 있었다 카더라 식의 흥미위주의 사건 사고 위주의 막장분위기에 대한 소개이거나, 아니면 왜관은 슬쩍 건너뛰고 이후 개항 후 일본 주도의 부산부의 전개에 대한 수탈적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부산에서 있었던 왜관과의 인터액션 자체는 경제적 측면이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농업중심의 조선 전체의 유교적 시스템에 돌발적 사례로 취급되는 느낌입니다.
한마디로 역사 속의 조선사람들이 천하태평으로 왜와 교류를 하고 있어서 어이, 조금만 지나면 일본에 침략을 당하는데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하는 심정이랄지, 뭔가 이후의 침략과 수탈에 잘 연결이 안되어서, 차라리 무시하는게 덜 골치아프다라고 할까요. 김정민 선생의 앞의 논문에서도 그래서 부산 김해 사람들이 글도 제대로 모르면서 일본 도박이랑 요리에는 돈을 펑펑 쓰더라며 이학규도 이 지역의 사치풍조를 비판적으로 봤다고 해석을 하고 애써 만연한 왜풍의 부정적 면모를 강조하려고 했지만, 정작 이학규가 유배를 마친 후 서울에 올라와서 적응을 못하고 다시 김해로 내려와서 산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독서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연구라기는 민망합니다) 이 블로그의 대부분의 내용들도 그래서 근세부터 근대가 싹을 튼 시초와 그 전개과정의 연유와 근대가 시작된 결과와 풍경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같이 스페인에서 페루의 포토시로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로 나가사키로, 마닐라와 마카오와 니우 암스테르담과 수리남을 둘러봤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조선에 들러서 이 와중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간혹 체크해봤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도쿄와 경성, 뉴욕도 둘러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모든 시간과 공간들이 서로 씨줄 날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동안 글을 쓰면서 좀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만 과연 성공적이었는지는 그다지 자신이 없군요...-_-;;

그러다 제 고향생각이 나서 사투리에 대해서 썼다가 좀 꼬리를 물고 찾아보니 상당히 특이한 변화를 겪었던 곳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부산이 마치 니우암스테르담에서 보는 것 같은 새로운 긴장감으로 가득 차서 그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상업 자본이 미약하나마 형성되기 시작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기존의 경제사들이 농업 중심의 시스템 속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아보려 하거나 찾지못했음을 밝히는데 비해, 이곳에서는 순수히 무역과 유통으로 형성된 잉여자본이 등장합니다. 상업 무역활동으로 발생한 잉여자본이 다시 이 상업에 재투자되는 과정이 보입니다. 이 자본의 형성은 당연히 국제정세와도 맞물려 부침을 거듭합니다. 그래서 당근 부작용도 무지하게 많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둘째는 그 자본의 형성이 가능하도록 이전의 조선사회로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소비"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전편에 소개했듯이 한문학자의 눈으로 해석한 19세기 초반 당대의 풍경에서도 탈역사적 소비심리밖에 안보인다고 할정도로, 새로운 소비가 출현했습니다. 이 소비추세가 자본을 형성하도록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나가는 걸까요. 하지만 이전에 인더스트리어스 레벌루션(근면혁명) 이론을 살펴보면서 설명했던 새로운 소비 즉 계급성을 띄지 않는 소비의 출현이 이 지역에서부터 퍼져나간 것도 우연이라고 간단히 말아버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더스트리어스 레벌루션 이론에 동의한다는 의미보다 심지어 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한 현상도 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담바고(タバコ)가 이곳을 통해 전래되자 반상과 귀천을 막론하고 '소비'를 시작했습니다. (**다바코가 담바고가 되는데 ㅁ 받침이 들어간 것은 탁음 バ를 유성음으로 표기하기 위해 추가된 음인것 이제 아시겠죠) 이학규는 젊은여인이 다채롭게 꾸민 긴 장죽을 물고 담배를 피는 풍경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리학적 규범으로 말도 안되는 사치풍조인것이죠. 그게 전국의 거의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탈계급적 기호품의 등장이라고 한번 우겨보고 싶습니다.

셋째는 그런 연유로 자본이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이곳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구조의 사적 채무관계가 형성됩니다. 예, 지난번 언급했던 피집(被執)을 말합니다. 이러한 노하우의 축적은 개항 이후 최초의 지방 민간 자본에 의한 근대적 금융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원래 조운의 연결점이던 구포나루의 객주를 중심으로 근대적 대출업을 전개한 구포저축주식회사(1908)가 발생하고 이 회사가 관의 지원을 받지않는 근대적 민간은행으로 성장합니다. 물론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 일본도 당시 서양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했단 것을 고려하고, 거슬러 올라가면 암스테르담 은행말고 도대체 누가 스스로 근대적 은행을 시작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런 요인들의 현상은 목숨을 건 잠상과 밀무역의 성행과 국기를 어지럽히는 정보의 유출과, 왜래(倭來)도박의 성행으로 인한 파산사건들과, 교간사건들과 사치풍조와 고리대금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언제 인간의 얼굴을 한 금욕적이고 도덕적 근대가 존재한 적이 있었나요?

여기 迪倫齋에서 중점적으로 많이 다룬 네덜란드에게는 이런 굴욕적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650년대 스웨덴 왕이었던 카를 10세의 궁정에서 네덜란드 대사가 정치적 종교적 자유에 대해 말을 꺼내자, 왕이 주머니에서 네덜란드 레익스달러를 꺼내 'Voila votre religion' 라고 했다 합니다. 번역하면 '보라, 네 종교를' 즉 니네들이 숭배하는게 돈이 아니고 뭐냐라는 비아냥이죠. 이 에피소드가 자본주의와 그 소산물 근대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겠죠. 얼마전 폴크루그만 교수의 블로그 "Consience of Liberal"에 올린 5월 1일자의 "A Goldman Observation"의 내용을 보면 그 오랜 기간동안 자본은, 그리고 사람들은 그다지 변하지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식민지화와 현재의 대한민국이 이 단순한 진리와 그리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운지 흉한지를 떠나서 부산에서 어쩌면 피할 수 없었던 이 근대의 시작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를 혹시 기억하시는 지요. 이 괴악한 자본주의와 배금주의 문화가 조선에서 가장 먼저 상륙한 곳에 오래된 동래기영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기영회라는 이 단체는 원래 동래 육방 퇴임자 이임(吏任)들의 모임인 대동회(大同會)와 동래부에 원래 많던 무청(武廳) 퇴임자 무임(武任) 중심의 만동회(萬同會)가 1846년 기영계(耆英契)라는 이름으로 합쳐져서 시작된 단체로 동래상인들과 동래부사까지 포함한 동래 유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미 상인이 관리들과 함께 단체를 조직할 정도로 계급간격이 좁혀진 거죠. 이들이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을 대구보다 먼저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근대식 사립학교를 시작한 곳도 이 단체입니다. 왜정 동안 송상현 동래부사에게 제사를 지낸 이들도 바로 이 단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체가 19세기 중반 아직 조선이 전근대적 체제에 있을 동안 반-상이 동회하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뿐일까요. 무임집안의 소통사출신으로 나중에 조일수호조약에 따라 처음으로 도일한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통사 4명 중 하나였던 박기종은 동경대 전신인 개성학교(開成學校)와 같은 이름의 학교를 세우고, 기선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그리고 1906년 죽을 때까지 철도를 부설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 없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구포주식회사의 후신 경남은행에는 독립운동에 자금을 댄 백산 안희제 선생이 주주와 감사로 역임했습니다. 경남은행의 핵심 인물이자 주주였던 윤현진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맡아 공채발행 등으로 자금조달에 힘을 쓰신 분입니다.

물론 이런 환경 속에서 남보다 잽싸게 친일파 노릇을 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기영회의 유지들이나 구포주식회사라고 항일투사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올라타든지 꼬리를 붙잡든지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한말 격랑의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화시키려고 한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온갖 악덕이 세상에 퍼졌지만 마지막으로 그래도 희망이 남았더라는 것처럼 자신을 잃지않고 변화하는 세상을 맞이해서 주체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응해 나간 모습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왜관을 화관(和館)으로 불러줄 수 있을 만큼 이미 오랫동안 열린 삶의 태도를 유지해온 사람들이었구요.

부산은 오랫동안 문명은 있지만 문화는 없는 곳으로 조롱 받았습니다. 부산의 문화라고 한다면 그나마 왜색문화라고나 불렸고요. 뒤집어서 봅니다. 우리는 역사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크고 아름다운 역사 뒤에서는 영혼도 증권화해서 사고 파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유럽 근대 최초의 골든 에이지 공화국은 노예무역의 최강자였습니다. 후발주자 잉글랜드를 지탱한 것은 아편수출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까지는 갈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추악함의 역사들 중에서도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는 희망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니우암스테르담에서 본 것처럼 당시 유럽 계급사회적 기준에서 그야말로 막장 같은 인생들의 때로 잔인하고 치졸한 삶들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누구보다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삶들이 영위되었습니다. 하르만 판 더 보가르트처럼 미지의 세상에 나아가 다른 사람을 접하고 이해시키고 Netho netho netho의 인증을 받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왐품 같은 조개껍질의 확보에 수없는 원주민을 학살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허드슨강 건너 야간의 기습에 그 원주민들의 마을이 불타는 것에 잠을 못이루고,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제발로 니우암스테르담으로 구해달라고 찾아온 이들을 숨겨주고 몰래 탈출시켜준 이들도 있었습니다.(이 얘기는 지난번에 미쳐 자세히 쓰지못하고 한줄로 처리한 슬픈 이야기입니다. 언제 다시 기회가 있겠지요.) 혈혈단신의 어린 부부 18세의 카탈리나 트리코와 플랑드르 직공출신인 19세의 요리스 라팔리에는 첫 배로 니우암스테르담에 건너와서 이제 그들의 후예가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반도의 끝 한자락 어린 백성들을 분리해야 할 정도로 어수선하고 비도덕적인 풍기문란 사고 다발의 조그만 지역에서 어쩌면 그 다음 세대를 준비할 수 있을만한 개방성이 싹트고, 그 성격이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는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서로 충돌하고 속이고 또 그러면서 함께 산에 올라 화전을 부쳐먹고, 대한해협 양쪽의 스타일로 생선찌게를 끓여 서로 맛을 보게 하고 이해하는 삶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개방성과 수용의 태도가 부산의 정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저 수구적으로 완고하게 지키는 것보다 개방성을 유지하는 게 여러모로 더 어렵습니다. 여차하면 풍랑에 휩쓸려 스스로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을 닫지않고 오래 개방성을 유지하고 살아오면 내성도 생기고 휙휙 지나가는 겉면 아래 오히려 강건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제 고향에서 찾은 모습이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몽골김씨 어린이가 김해김씨 어린이와 다르지 않게 크는 나라말입니다.

고향생각에 올렸던 얘기를 타고 흘러 흘러 멀리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기 이래 이 뜬 세상의 부와 허영을 대표해 온 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이곳에서 떠나지 않고 몸 붙이고 있는 이유는 그 개방성이라고 해야 할까 싶네요. 그렇지만, 고향의 밤바다 풍경을 늘 지니고 다닙니다...

글을 그래도 이렇게 올리다보니 센세이셔널리즘이랄지 조급증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접어두고 숙성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일들도 있겠지요. 이번에도 원래 글을 다 써두고 그래도 아예 몰랐다면 몰라도 알고서 확인 안 할 수는 없지 하면서 원 자료를 최종적으로 확인을 늦게 했다가 지난 주말에 상당부분을 고쳐썼습니다. 덕분에 글을 잘라서 근 2주간 두 번으로 나눠 싣게 되었습니다만. 그동안 여기 글을 좀 올리면서 과분한 칭찬들에 그만 우쭐해있었나 봅니다. 쪽대본 같은 글을 써서 올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대화를 건내고 있습니다. 의외로 대답을 바로 바로 잘 해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대화를 기다리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이번 글들을 쓰는 동안 참고한 자료입니다:
양흥숙, "17~18세기 譯官의 對日貿易", 지역과 역사 제5호, 부경역사연구소, 1999.2.
차철욱, "구포(경남)은행의 설립과 경영", 지역과 역사 제9호, 부경역사연구소, 2001.12.
최종고, "17-18세기의 한일간 법률사건고",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01
김성진, "19세기초 김해인의 생활을 침식한 왜풍", 경남지역문학연구회발행 지역문학연구 3, 1998.9
다시로 가즈이, "왜관 -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 (원제: 田代 和生, 倭館―鎖国時代の日本人町, 文春新書)
김정동,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중에서 제2부 '2백여 년 간 존치되었던 부산의 왜관들', 대원사, 2000
스기야키 관련 자료는 다시 올리지 않습니다.

핑백

  • 迪倫齋雜想 : 근대 부산: 전시회 추천입니다. 2010-09-03 16:06:18 #

    ... 서 민족주의 우파로 분류할만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초기 자본가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지난번 쓴 부산 얘기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만"을 읽으신 분들은 아마 왜관통사 마지막 세대에 해당하는 박기종에 대한 언급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포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 ... more

  • 남중생 : 10. 제갈공명의 진태고 (나가사키) 2017-06-22 15:08:23 #

    ... 한 "탈역사적 소비심리"가 보인다고 하셨습니다.19세기의 부산 -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만 - 완결 16세기 난징, 18세기 나가사키, 19세기 부산... 음 ***이 공명의 진태고라 ... more

덧글

  • 네비아찌 2010/05/29 14:12 # 답글


    제가 태어나고 살아온 광주라는 도시는 매우 동질적이고 변화가 더딘 도시여서 그런지,
    부산의 역동성과 다양성이 매우 부러워집니다.
    차라리 6.25 전쟁 후에 서울로 환도하지 않고 부산을 계속 수도로 삼았다면,
    "몽골김씨 어린이가 김해김씨 어린이와 다르지 않게 크는 나라"는 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정녕 그런 나라가 이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迪倫 2010/05/30 12:09 #

    하지만 광주와 부산과 서울과 대구 그외 다른 특색과 문화가 서로 공존하는게 더 큰 시야에서의 한국의 '다양성'이 되지않겠습니까? 저는 광주가 한국 문화의 지평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부럽습니다.
    아무튼 "정녕 그런 나라"가 더디게 보여도 조금씩은 되고 있는 중이리라 믿고 있습니다.
  • 헤르모드 2010/05/29 15:04 # 답글

    이제까지 읽었던 많은 글 중에, 가장 설득력있는 부산(옹호)論이었습니다.

    왜관의 다문화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임진왜란과 식민지화라는 결과가 역으로 투영된 결과이리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동의하면서, 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소서^^
  • 迪倫 2010/05/30 12:22 #

    설득력이 있다시는데 '급우쭐' 입니다 ^^ (농담입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 임진왜란의 기억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어떻게 남은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 아무 자료도 못찾아보았습니다. 7년동안 실제 왜군의 지역 하에 있었고 (지금도 '자성대'라는 이름으로 왜성 흔적이 남아있는데) 전쟁이 종료된지 불과 채 10년도 안된 시점에서 다시 왜인을 접하게 된 일반 지역인들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그들의 기억은 어떤 형식으로 전해지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 기억과 반응이 실제 이후 조선후기의 군담소설들에 비친 일반적인 조선인들의기억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도 찾아보면 상당히 흥미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 차이가 어느정도 제가 찾아본 내용들에 영향을 미치지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듭니다만...

    아무튼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밥과술 2010/05/29 16:15 # 답글

    경계인이라는 표현이 생각이 납니다. 네이버 사전을 검색하여보니 경계인은 주변인 marginal man 이라하여: 오랫동안 소속되었던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겼을 때, 원래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금방 버릴 수 없고, 또한 새로운 집단에도 충분히 적응되지 않는 사람이다. 신체적 성질·언어·의복·습관 등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라고 부정적인 서술이 되어있더군요.

    한때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가 사용하여 이념논쟁의 가운데에서 경계인은 회색분자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해석되었는데, 그는 경계인을 border rider라고 불렀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해석하고 있는) marginal man이란, 두개의 다른 문화의 접점에서 양쪽 모두를 appreciate 할 수 있는 특권(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자, 그 댓가로 두 이질문화가 충돌할 때( cross cultural conflict) 양쪽을 이해시키는 중재자(mediator)로 나서야 할 책무를 지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잘못하면 identity crisis 에 빠질 수도 있는데 이는 소수에 해당하구요.)

    그런 의미에서본다면 迪倫님도 경계인이고, 이웃블로거분들 가운데에도 경계인에 해당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이라는 지역이 이미 일제 강점기 훨씬 이전부터 경계구역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경계인으로서의 즐거움과 새로운 경험을 맛보았고, 그 댓가도 치루어 왔다고 생각하면서 세상만사 쎔쎔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난폭한 사설, 양해바랍니다.
  • 迪倫 2010/05/30 12:27 #

    말씀하신 경계인의 긍정적 정의는 새삼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의미의 경계인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부산이라는 지역이 오래동안 이런 중재자 또는 버퍼링의 역할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리 주저리 주저리 길게 적은 것을 정확히 요약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세상만사 쌤쌤이라고 하신 것처럼 무슨일이든지 서로 나눌 수 없는 양면이 있겠지요. 그 정방향의 경험과 부정방향의 경험을 헤쳐나가는 힘은 역시 다양성을 포용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혀 난폭하지 않은 사설이십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까날 2010/05/29 16:22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迪倫 2010/05/30 12:28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뒤늦었지만 링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함부르거 2010/05/29 20:31 # 답글

    이번 부산 시리즈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댓글을 못 달아드렸습니다만 참 잘 읽었습니다. 모르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 어딘지 아련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실질적으로 국경이란 것을 상실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국경도시', '변경'의 이미지를 가진 곳이 부산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19세기 부산에서 일어나던 일들은 오늘날 중국-북한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중국을 욕하면서도 중국 휴대폰 망을 사용하고, 중국에서 밀수한 물건들을 장마당에 유통시키고... 조선 조정이 부산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처럼 북한 정권도 이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감정이 복잡합니다.
  • 迪倫 2010/05/30 12:35 #

    아뇨, 항상 함부르거님께서 남겨주시는 덧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딘지 아련한 느낌"을 받으셨다니 제가 특히 이번 글들을 쓸 동안의 센치멘트를 캐치해주셨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성장해서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고 다른 나라로 옮겨오고 하는 과정에서 저는 제가 변경-국경도시에서 성장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해야할지, 그 자각과 기억들이 제게 개인적 힘이 되어준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그나저나 말씀하신 중국-북한 국경의 사례는 아마 언젠가 통일이 되고 이 모든게 역사가 되면 아마 조선시대 의주에서부터 연결되는 흥미있는 "경계지역"으로 조명을 해볼 수 있지않을까 짐작해봅니다. '국경의 밤'을 따라서요. 북한이 조선만큼이라도 활용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복잡한 감정에 저도 같이 올라탑니다. 감사합니다!!
  • 들꽃향기 2010/05/30 12:07 # 답글

    아아! 그동안 올리신 글에 대한 '일이관지'가 두드러지는 훌륭한 마무리였습니다. ^^ 진심으로 올리신 글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저는 스스로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 부끄러움이란, 결국 지금까지의 역사학도 과거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처럼 자신들의 사학적 의도를 위해, 迪倫님의 고향과 그 역사적 맥락을, '반도 한 끝자락에 접어두고 싶은 기억'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입니다.

    국내유통의 메이저로서 송상과 경강상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자본가화를 '어떻게든 보여주려는' 글들은 상당하지만.....내상을 포함한 국제유통의 담당자들 자체에 대한 연구와, 그들 사이에 있었던 국제적인 경제관계와 문화적 교류는 심도있게 다룬 연구가 적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라는 말씀을 하시니, 사실 저같은 '야매'조차도 이에 대한 환상 혹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 엄청나게 괴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지금도 버리고 나서 방황하고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포함하는 다양한 근대의 얼굴과 진행과정 속에서, '근대의 얼굴' 속에 포함된 부정적인 면모를 극복하고자 하는 조류와 몸부림을 보면서, 찾고자 하면서.....

    감히 저 역시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는 꿈은 결코 버린 적이 없었고, 그러한 '희망' 역시 '근대의 얼굴'이자 '역사의 도도한 조류 중의 당당한 하나'일 것이라는 망상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씀에 왜이리 가슴 한켠이 찡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언부언 해봐야 앞뒤가 맞지 않겠군요. 다만 여러가지로 깨닫는게 있어 이처럼 괴악하게나마 적어봅니다. ㄷㄷ
  • 迪倫 2010/05/30 13:23 #

    과찬의 말씀을 남겨주셔서 부끄럽군요. 그저 '현학적'이기 좋아하는 스타일의 '망향가'쯤으로 간주해주십시오....-_-;;

    저는 개인적으로 외국의 경제사관련된 책들을 읽다가 보니, 한국 경제사 동향에서 뭔가 "활기"를 찾지못하겠는데, 도대체 왜그럴까 하고 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체로 모든 근세, 근대, 현대가 1910년이라는 너무 큰 팩트를 벗어나지 못해서 마치 '뭔 말을 해도 아마 안될꺼야 우리는'이 되어버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뭐. 다른 시점으로 보는 시도가 좀 있을 필요가 있지않을까 하는 문밖에 서성이는 사람의 아쉬움정도 됩니다만..(물론 다른 시점에 유사Q사는 전혀 아닙니다 -_-;;)

    그런 점에서 보면 지방사 그중 근대화에 집중적인 그리고 비틀어진 영향을 받은 지역들을 살펴보는 게 상당히 의미가 있지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막상 찾아보니 부산은 제법 심도있는 연구가 있지않을까 했지만 아직 그래도 더많은 부분들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서울과 지방의 경제적 격차같은게 이런 분야에서도 적지않게 영향을 미치나보다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들꽃향기님같은 분들의 심도있는 연구들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화는 제게도 참 딜레마입니다. 제가 17-18세기의 네덜란드를 아마 상당히 집중적으로 소개를 해왔는데, 아직 제가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못한 여러 부작용들은 소개를 하지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고 위대한 나라'에 대한 환상정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세상 (국가가 아니라)에 대한 희망조차 때로는 유지하기 쉽지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경제나 금융은 그 바닥을 찾아내려가면 정작 '믿음'의 가설 위에 서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사가 흥미있는 부분입니다. 머티리얼한 세상이 정작 '믿음' 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게요) 그 경제시스템과 금융시스템의 고장과 파국이 끊임없는 걸 보면 역시 '희망'이 없는 것인가 하는 비관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희망처럼 역사 속에서 자신을 잃지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가진 포용력과 개방성에서 혹시 하고 아직 기대를 버리지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안되면 지구따위 돌고래에게 줘버리라고 합시다ㅎㅎ)

    들꽃향기님께서 이런 제 생각을 알아주신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그래서 제가 들꽃향기님의 논문을 인용해서 오옷 이런 훌륭한 연구결과를 읽었습니다 하고 블로깅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이네스 2010/06/02 13:47 # 답글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링크해두고 한동안 읽지 않고있다가 겨우 시간이나서 몰아 읽었는데 궁금했던 많은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 迪倫 2010/06/03 10:27 #

    인녕하세요. 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링크 하겠습니다. 자주 덧글 남겨주세요.
  • Υυeℓ 2010/12/11 18:01 #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에도 한 번 덧글 남긴 적 있는 것 같은데, 최근 17,18세기의 서구와 동양(이동네?)의 만남에 관심가지고 있던 차라 이곳을 발견하고 즐거웠습니다. 차분한 여유가 날 때면 들어와서 하나씩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부산에 갔다가 배를 타고 후쿠오카에 가서 나가사키를 보고 올 계회을 세우고 있어 이쪽을 다시 열어보았습니다. 어릴 때 한 번 들러본 기억 밖에 없지만 적륜님 글에서 부산은 한층 멋진 도시 같습니다:)
  • 迪倫 2010/12/12 09:23 #

    안녕하세요. 예 전에 덧글 남겨주셨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겨울 여행 계획은 참 부럽네요.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드신 다음, 후쿠오카에 가셔서 하카다 돈코쓰 라멘을 드시고 나가사키에서는 중화 찬퐁을 드셔보시기 권합니다. 한중일 삼국이 서로 비슷하면서 다르게 '맛'을 내는 것을 한번 직접 경험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저는 오래전이라 아직 복원하기 이전이어서 아직 본 적이 없는데 나가사키의 데지마 복원지도 아마 흥미로우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재미있으시겠네요. 부럽습니다^^ 부산에서부터는 이미 "남국"이랍니다.

    자주 들러서 대화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행 준비 잘하셔서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니잊 2012/01/14 00:03 # 답글

    <금관죽지사>로 검색하다가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 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짓기에 끌려 일련의 포스팅 서넛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이학규 산문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인지도 낮은 우리 학규씨가 이렇게 인용되고 있다니 그저 너무 반갑습니다...흑흑.

    이학규는 김해의 풍습을 기록하며 '여자들이 머리를 땋거나 비녀를 꼽지 않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닌다'고 전하고 있는데, 저는 이게 이학규의 '오바'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어보니 '왜색'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퍼뜩 듭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이지 더이상의 증거는 없지만요.

    그런데, 본 포스트의 첫번째 문단 말미에, '이학규가 해배 후에도 다시 김해에 돌아와서 산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고 하셨는데, 이 부분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나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 덧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이학규가 24년만에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학규 집안의 경제적 근거가 완전히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부인과 어머니가 이미 진작에 사망했던 데다, 서울에 남아있는 친척이나 친구들도 거의 없었구요. 그래서 '김해로 돌아갔다' 라기보다 '(정치적으로도 불편하고 비빌 언덕도 없는)서울에 있을 수가 없었다' 가 좀 더 온당한 해석이 아닐까 합니다. 해배 직후에는 김해와 서울을 오갔지만, 후에는 충주에 우거했구요...


    탁월하게 풀어내신 글에 제가 괜히 난입하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이만 너무 긴 댓글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재밌는 글 정말 감사합니다. 김해에 대해서 좀 더 다르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 迪倫 2012/01/14 14:39 #

    안녕하세요, 니잊님.
    찾아주시고 덧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지적해주신 부분은 저는 자세한 사정을 몰랐었습니다. 제가 본 논문에 아무튼 나중에 김해로 내려온 것에 대해 언급이 없이 김해의 당시 풍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않았는데) 하여서 추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말씀하신대로 해배 후에 서울에 달리 기반이 남아있기 어려운 상황이었겠다 싶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어슬피 설레발이 치다 정작 제대로 전공하시고 연구하시는 분에게 딱 걸렸구나 싶은 느낌이라.... -_-;;

    이 블로그는 재미를 추구하는 곳이라서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그점 양해 미리 바랍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서 대화 나눠주시기 부탁드려도 될까요? 한문 해석이 약해 엉터리 얘기를 늘어놓을때가 많은데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이학규의 글들은 제가 조금 본 것들은 거의 블로그 수준이라고 생각이 들어 상당히 흥미있었습니다. 좀더 조명을 받으면 좋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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