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부산 -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 by 迪倫

부산말의 애증 - 아무래도 일본어란게....에서 이어집니다.

자, 이제 시간을 달려서 근대 개항 이전의 동래부 소속 부산포와 인근의 김해로 가봅시다.

며칠 전의 이역죽지사가 19세기 개항전 조선 권력 핵심의 소위 경화사족이 알고 있던 (중국경유의) 세계와 타자에 대한 인식이라면, 여기 그 반대편에 있던 어느 불우한 사나이의 (상당히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낙하생 이학규(1770-1835)는 기호 남인 계통의 지식인으로 외가인 성호 이익 가문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다가 19세기로 막 접어들 무렵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서학쟁이로 몰려 24년간 김해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8살 위의 다산 정약용과 유배 기간에도 서로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고, 다산의 문장에 대해 일종의 화답 오마주 글들을 짓기도 하면서 오래 교류를 한 선비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거의 잊혀졌던 그를 최근에 다시 불러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해에서 오래 유배 생활을 하면서 남긴 주위의 풍경들에 대한 글들입니다. 실은 그의 글은 최근의 일본음식 스키야키를 조선시대 후기에도 먹었다는 내용의 오리지널 출전정도쯤 됩니다만, 그보다 좀더 다채로운 로컬 변화를 관찰한 모니터링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마 이 내용들을 최근에 들어보신적 있으실 겁니다만, 원문은 잘 알려져있지 않는 편입니다. 원문은 낙하생전집 因樹屋集 책 제4와 제9에 실린 가사 두편입니다. (자료를 찾다가 이학규의 글 중 '명물고'라는 글은 제목만 전할 뿐이라는데, 이를 마치 아래 내용들의 출전처럼 표기해 둔 글들을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제대로-안찾아보고-대충-베꼈지만-뭐-네가-굳이-확인해보겠냐'체의 글이란 의미겠지요…)

우선 1809년 기사년에 쓰여진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의 일부입니다. (순서대로 연결된 게 아니라 중간 중간 관련된 부분을 김성진 선생이 번역한 것을 발췌하였습니다.)

砑光摺扇端陽骨。閃色圓幮日本紋。
번쩍번쩍 빛나는 접부채는 端陽의 댓살이요
번뜩이는 빛의 둥근 베는 일본의 무늬로다

倭館牙牌三隻骰。一拋百萬未云優。
왜관의 牙牌로된 세짝의 주사위에
한번에 백만금을 던지고도 넉넉하다 하질 않네

勝歌妓臛出歌妓。勝歌妓。肉臛名。 造法先從黍齒傳
승가기 국물은 가기보다 낫다고 하는데,
만드는 법은 앞서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네
狂殺神仙酒鑪畔。神仙鑪。出日本。

南湖上日浣帬去。倭傘遮陽步屐徐
남호에서 초하루에 치마를 빨고 갈 제
일본 양산으로 햇빛 가리며 천천히 걸어가네

그로부터 2년뒤 신미년 1811년 쓰여진 초량왜관사(草梁倭館詞)의 일부입니다.

釜山雲水海門頭。百丈爭廻對馬舟。
부산의 구름낀 물가는 바닷길의 시작이라
백 길 넘는 대마도의 배들이 앞 다투어 맴돌고,
金桼箱籠紅桼傘。紙香油臭撲津樓。
금칠한 상자와 바구니, 붉은 칠한 우산에
종이향기, 기름냄새가 나룻가 누각을 뒤덮네

慰使歸時館餉廻。神仙鑪爇晩銜杯。
접위사 돌아갈 때 객관 식사 돌아보니
신선로에 불 사르고 늦게까지 술 마셨네
不愁鑪臛輸歌 妓。新覓東洋水雉來。
신선로 국물이 가기만 못함을 근심치 말고
새로 동쪽 바다에서 물꿩이 오는 것을 찾아보시게

김성진 선생의 "19세기초 김해인의 생활을 침식한 왜풍"(경남지역문학연구회발행 지역문학연구 3, 1998.9) 이라는 논문에 실린 번역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좀더 이학규의 낙하생전집에 등장하는 초량, 김해일대의 왜풍 문화에 대해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실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해보니 현재까지 대부분의 인터넷이나 그외 책에 언급된 당시 왜풍의 사례가 이 논문으로 귀결되던 군요. 게다가 원래 논문을 확인하지않고 옮기고 옮기고 하면서 생긴 오류가 제법 이름난 글에도 포함된 것을 보았습니다. 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 중에 또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前浦行"이라는 글에서는 蜜柑雙盒澯霜膚라는 구절도 있고, 馬主條麵薩州鑪 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각각 "밀감 두 그릇이 살결을 반질거리고 희게 하는도다"와 "대마도의 가락면과 薩州의 신선로"라는 의미입니다. (김성진 선생의 논문 속의 번역입니다.) 게다가 이 구절들은 '蘆花屋에서 밤에 술마실때의 일을 서술한 것'이라고 이학규가 주를 달아두었습니다. 밀감에 소면, 전골료리가 이자카야같은 이름의 장소에서 밤늦게 술마실면서 접한 것들입니다.

음식뿐일까요? 感事三十四章이라는 글에는 "玻瓈風外磬。檐馬。皆用五色玻瓈。出日本"라는 풍경을 묘사한 것도 있습니다. 風鈴 (ふうりん)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파려(玻瓈)는 유리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글 중에 "倭幮凉不歇。暑月。施日本蚊幮。"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일본 모기장을 치니 서늘하기 그지없네. 더운 달에는 일본 모기장을 친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뭐 일본도 차고 다니는 게 유행이더라는 얘기는 잘알려져있는 데, 다시로 가즈이 선생의 "왜관"에도 왜관에서 도난당한 칼이 흘러나가 조선측 군관이 차고 있는게 들켜 소동을 일으켰다는 예도 있고, 이학규도 일본도 차는 것을 快事라고 표현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상당히 기묘한 풍경이지요. 어떻습니다까? 그런데 지난번 70년대말 80년대 초반의 부산의 풍경에 비교해서 보면 뭔가 공통점이랄지 영속성이 보이시지 않는지요.

논문을 쓴 김성진 선생은 "이학규가 그리고 있는 이러한 습속에는 일본것에 대한 적개심도 경계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 시기 통신사의 使行詩文에 여전히 남아있었던 문화적 우월감도 찾아볼 길 없다. 그냥 편리하고 좋아보이면 비싸더라도 구매해서 쓰겠다는 소비심리만이 엿보일 뿐이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흐음.....그렇군요. 탈역사적 소비심리라....

임진왜란이 지나고 17세기부터 두모포와 초량을 중심으로 오늘날 부산광역시의 부산진구와 중구 지역을 중심으로 협의의 '부산'이 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왜관을 중심으로 한 일반 조선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지역이긴 했습니다만, 사람 사는게 중앙정부의 통제처럼 되는 게 아니죠.

왜관에 대해서는 최근 여러가지 연구와 책들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왜관에 대해서 여러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관에 대해 자세히 아시고 싶으시면 우선 다시로 가즈이 선생의 "왜관 - 조선은 왜 일본사람을 가두었을까" (논형, 2005)을 반드시 일독하시기 추천합니다. 아무튼 뭐 그래서 굳이 왜관에 대해 자세히 쓰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번 포스팅에서는 몇가지 왜관을 둘러싼 조선쪽의 사정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관, 특히 후기의 초량왜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요즘의 용두산 공원 일대의 11만평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 왜관 자리를 개항 후 일본이 그대로 이어받아 일본인 구역으로 사용하였으니 단순히 나가사키의 VOC의 데시마와는 규모나 인터액션이 비교하기 힘들게 큽니다. 데시마의 규모는 15395 평방미터라고 하니 대략 4700평이 채 못됩니다. (1평 = 3.3056 평방미터) 통제라는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조일교류사는 중앙정부의 정치적 입장에서 조명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통신사들을 통해 행해진 교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왜관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서로 매일 매일 인터액션을 하고 있었던 것은 종종 간과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통신사 행차는 조선 후기 몇차례나 있었을까요?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있었습니다. 2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12회입니다.

왜관의 개시는 개시대청에서 3, 8일 정기장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문위행(問慰行)이라고 하여 왜학역관을 정사로 삼아 대마도 번주가 에도참부를 다녀오거나 왜국에 경조사가 있으면 대마도로 파견되어 막부의 동정과 정책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위행은 1632년부터 1860년까지 54회나 실시되었고 거의 4-5년에 한번씩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왜학역관은 부연역관 즉 중국어 역관들과 달리 거의 동래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정치외교적 통역업무뿐 아니라, 통상 무역을 감독 및 실제 참여하면서 일본측과 실제 거의 상시적인 인터액션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10년에 한번 가는 통신사와는 기본적으로 교류의 포인트가 달랐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기간은 이전의 실버 트레이딩 포스팅에서 설명한 것처럼 조일청 삼각무역이 최대의 피크에 이르렀을 때이고 동래상인과 왜학역관들의 클러스터가 새로운 패턴의 경제활동을 조선에 도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무역으로 인한 상업자본의 형성입니다.

기존의 연구는 왜관 무역을 주도한 계층으로 유럽의 차터 컴퍼니와 같은 독점면허의 동래상고(東萊商賈) 즉 동래상인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17세기 후반 2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나서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과 연결된 3국무역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 동래상인은 개성상인의 에이전시 정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왜관에서의 개시무역 내용을 좀 더 들여다 보면 동래상인들과는 별도로 왜학역관의 역할 좀더 무리해서 나가자면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형성에까지도 이런 측면에 상당히 솔깃하게 됩니다.

왜관에는 대마도번에서 보낸 관수와 이하 인원이 500명 가량 상주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다시로 가즈이의 책에 자세합니다. 한편 이들의 카운터파트로 왜학역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조정에서 보낸 훈도, 별차 들로 구성되어있고, 하급 역관으로 30명 가량의 소통사까지 있습니다. 그외에 일본 사신의 예단을 맡거나 왜관 수리를 맡은 단기 임기의 역관들도 있었습니다.

원래는 외교적 실무와 공무역 감독 담당이었지만 점차 교역량이 늘어나자 이들 스스로 상인으로 성장하고 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잠상으로 불린 밀무역도 이들의 소행이지요. 물론 잠상이라고 해도 종류가 있어서 그 중에서 무기와 유황 같은 방위산업 품목의 잠상은 나라로부터 거의 공개적으로 장려되는 겉으로만 아웅 밀무역이었고, 대신 은이나 인삼은 상당히 사형으로 가는 가중처벌의 죄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몬스터의 특징은 이윤이 있으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서라도 리스크를 테이크한다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점차 재산을 불리게 되자 아예 동래, 초량, 그리고 밀양 등지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다시 늘린 재산을 재투자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밀양이 좀 중요합니다. 밀양은 바로 창고가 있던 곳입니다. 낙동강을 타고 내려온 일본으로 나갈 물품이 하적되고 일본에서 수입된 물품과 교환되는 장소였습니다. 조선시대라고 해도 사람들이 하는 일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 이런 거래에 또하나 새로운 패턴의 국제금융이 등장합니다. 일본에서 포르투갈의 퇴출에 큰 역할을 했던 고리대금의 크레딧 상품 Respondencia(또는 なげがね)를 기억하시는 지요. 유사한 형태의 크레딧 트랜잭션이 피집(被執)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몇가지 엇갈리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피집은 나가사키와는 반대로 조선측이 일본측에 외상거래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인삼이나 중국산 생사와 견직물을 먼저 물품을 인도하고 은으로 대금을 나중에 결제하는 방식입니다. 결제는 대부분 분할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이 피집이 성행하게 된 것은 18세기 빈번해진 일본 은의 함량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고 원래 판매대금을 제대로 쳐서 받기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청 인삼무역은 후기로 가면 판매를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지만, 왜관을 경유로 하는 대일 인삼무역은 안정된 판매처와 결제시스템으로 좀더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피집 행위에 상당수의 상역들이 개입되어있었고, 피집 자체는 당연히 발각되면 경을 칠만한 불법행위입니다. 하긴 그러니 당연히 성행합니다. 바로 벌써 오늘만도 여러 번 등장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죠. 하이어 리스크 하이어 리턴.
이런 상업세력이 형성되자 부산포를 중심으로 심지어 김해에까지 삼각무역이 꺾어지기 시작한 19세기 초엽에도 이 여파가 흥청망청 퍼져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류층(아니면 적어도 부산의 동네유지들)만의 영향이었을까요? 한자락 아래를 다시 들여다 봅니다.

한편 왜관의 설문設門 즉 조선으로 나가는 출입문 바로 밖에는 초량촌이 있었습니다. 하급역관이었던 소통사들이 많이 거주했고, 또한 촌락민들도 왜관과 일상적 상거래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설문 밖에 아침 장이 섰습니다. 이 장은 왜관 개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부식류를 사들이는 그야말로 동네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작용도 많았지요. 젊은 여성이 가져간 물건은 누구보다 일찍 팔려서 풍기가 문란해지니 아침장에 젊은 여성을 배제하려한 기록도 있고, 왜관에 체류하는 일본인들과 바느질감들을 단골로 처리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대부분의 소개글들이 동래부나 왜학역관들 중 고위급이 일본 문물에 접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소통사들이 그리 고위급도 아니고 그들이 많이 사는 초량촌 자체가 뭐 당대 조선기준으로 치면 주요 지역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이 200년간 매일 매일 새로운 외국 문화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대마도번에서는 역관들에게 일종의 뇌물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훈도나 별차같은 대통사들뿐 아니라 소통사, 심지어 아전이나 동래부 관노비에게까지 지급합니다. 굳이 일본 문물이 상류층에만 제공되었다고 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입니다. 이학규가 묘사한 김해는 심지어 그로부터 한발짝 떨어지기까지 한 동네입니다.

이들 하급 역관들이 일본인들과 접촉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랄지 상호 이해의 폭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실례가 하나 있습니다. 1774년 소통사들이 세운 동래부사 이택수 선정비가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왜관은 화관(和館)으로 새겨두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한문 표현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는지 특정 글자를 피하는 피휘 같은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왜관을 화관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글자 한자의 차이가 그야말로 큰 한발자국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대략 생각을 마무리합니다.
글이 길어져서 2편으로 넘기겠습니다. 제가 왜 제목을 도발적으로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으로 붙였는지, 그리고 이 200년간 진행된 특이한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제 의견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참, 스끼야끼에 대해서 좀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참고한 논문 자료는 다음 편에 마무리 하면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 주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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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校獸님ㄳ 2010/05/24 13:16 # 답글

    링크한지는 몇주 되었는데, 굉장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희 친가가 부산 근처고, 제 전공이 경제학이라 매번 흥미롭네요.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迪倫 2010/05/25 10:04 #

    반갑습니다. 저도 링크를 하겠습니다.
    자주 덧글 남겨서 대화에 참여해주세요. 제 글보다 찾아주셔서 얘기 나누시는 분들이 더 영양가 있답니다!! ^^
  • 헤르모드 2010/05/24 15:17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다음 편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迪倫 2010/05/25 10:05 #

    감사합니다. 그보다 얘기에 무리는 없는지 질책도 부탁을 드립니다!!
  • 에로거북이 2010/05/24 20:08 # 답글

    와 정말 흥미진진 합니다. 뉴욕에서 이런 연구를 하실 수 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 迪倫 2010/05/25 10:06 #

    재미있어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달리 다른게 할게 없어서 이런 연구(?)만 하고 있다고 ㅠ.ㅠ 해야할지...(농담입니다)
    실은 연구까지는 아니고 독서 감상문정도로 해주십시오. 아무튼 감사합니다!!
  • 들꽃향기 2010/05/24 20:18 # 답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수정주의적 연구들은 사실 일본인들이 근대 이전에도 스키야키와 같은 고기류를 먹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던데, 올려주신 내용은 이러한 수정주의 연구에 주요한 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다만, 전근대시대 일본인들이 쇠고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금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인 만큼, 왜관 주변의 일본인들이 스키야키 등을 먹을 수 있는 문화적 심리는, 역시 상대적으로 고기를 먹는데 익숙한 조선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결국 왜관의 스키야키 문화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교차하는 곳에서 태어난 합동적 산물(?)이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해봅니다. ㄷㄷ

    그리고 迪倫님께서 지적해주신 "탈역사적 소비심리"가, 저 역시 눈에 번쩍!하고 띄네요...ㅎㅎ
  • 밥과술 2010/05/25 01:39 #

    점입가경입니다. 계속 기다려지네요. 다만 금관죽지사는 혹시 원문이 있으면 어디서 볼 수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좀 오역이 있는 것도 같아서요...(조심스럽습니다)

    스키야키는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杉やき라고하여 삼나무통에 생선을 넣고 익힌요리라고도 나와있고, 요즈음의 스키야키와 비슷한 것은 鋤(すき)燒き라고 해서 가래나 삽(스키)같은 것위에다가 닭고기, 오리고기, (나중에는 고래고기)같은 것을 얹어서 구워먹었다고 합니다. (야후,위키피디어 참조)

    일본 인터넷 검색해보니 삽위에다 얹어서 불위에 구워먹는 사진이 재현이 잘된건 여기입니다.(http://portal.nifty.com/cs/zatsugaku/detail/100121118253/1.htm)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완전히 육식을 엄하게 금한 적은 없었지요. 조선통신사가 가도 도중에는 멧돼지요리를 대접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서양사람들한테도 고기를 대접했으니까요. 다만 추측컨대 부산에 와서도 왜인들은 닭오리등 가금류로 해먹던 것이, 고향떠난 김에 조선사람따라 부산에서 소고기로 바꿔 먹어 보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요. 기록을 찾으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 들꽃향기 2010/05/25 07:25 #

    밥과술님// 금관죽지사가 수록된『낙하생전집』 자체는 제가 구할 수 있는 한계(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전번역원, KRPIA 고전 제공 서비스 등)에서는 온라인으로 도통 구할 수가 없더군요...=_=;;

    학교 도서관에 가면 『낙하생전집』의 인쇄본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온라인으로 곧장 구할수 있는 것은 제 선에서는 찾기 힘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_=;;

    그리고 첨언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
  • 迪倫 2010/05/25 11:23 #

    들꽃향기님// 감사합니다. 우선 다음편에 쓰려는 내용이 이 '탈역사적 소비심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조선의 니우암스테르담으로 이름을 한번 붙여볼만한 점도 있지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다음번에도 예리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원래 하려던 스키야키 얘기는 조금 다른 측면이긴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조선과 일본의 문화가 교차하는 곳의 하이브리드문화 중의 하나일 가능성도 있고 왠지 여러가지 상당히 재미있는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밥과술님// 우선 스키야키 관련 정보들 감사합니다. 연결해주신 사이트의 사진은 저도 처음봤습니다. 안그래도 스키에 다가 미소된장을 풀고 고기를 굽는다는게 영 상상이 안되었는데, 정말 알려주신 사진 잘 봤습니다. 스키야키와 스기야키에 대해서 좀더 다음에 얘기를 쓰려고 하던 참이라 여기서 더 답글을 올리면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달아주신 덧글에 대한 답글은 대신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 迪倫 2010/05/25 11:50 #

    밥과술님 그리고 들꽃향기님// 원문은 우선 한국고전번역원 DB에 있습니다. 들꽃향기님께서 아마 급히 살펴보시느라 못찾으신 것 같은데 번역본은 없고 대신 원문만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DB of Korean classics 사이트로 http://db.itkc.or.kr/에서 들어갑니다:
    낙하생집의 페이지는 아래 화면을 보시고 그 중 인수옥집 책4와 책9에 해당 글들이 있습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604&gunchaId=av010&muncheId=01&finId=003&NodeId=&setid=1557352&Pos=1&TotalCount=33&searchUrl=ok

    그런데, 이 원문DB에도 오타도 있고, 결락과 어떤 글자는 이미지로 되어있는 것도 있어 좀 후덜덜 합니다.
    안그래도 이 원문 해석에 대해서 사실 저도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밥과술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번역 부분에 좀 의아한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가지고 회사의 동료 친구 중에 중국어 번역담당자와도 같이 얘기를 좀 했는데, 아무래도 워낙 중의적인 컨텍스트와 역사적 배경이 얽혀있어서 해석이 잘 안되었습니다. 김성진 선생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님이신데, 논문 중에 좀더 자세한 번역이 있으면 좋을텐데, 안그래도 그래서 포스팅 글을 쓰느라 가능한 최대한 원문과 대조해서 해당 부분을 찾아서 적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제가 아예 어슬프게 번역을 하지않고 논문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저 사실 좀 궁금합니다. 뭔가 어색한 부분들이 있는데, 실력이 짧아서 명확하게 어디가 해석이 잘못된 것인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게다가 이 글을 옮기고 옮기고 하면서 이상하게 변형되어버린 글들을 봐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당시 김해와 부산 왜관 주위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방향이 맞는 것 같지만 소소한 디테일은 역시 번역이 좀더 정확하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두분 혹시 원문을 다시 보시게 되면 어느 부분이라도 제게 좀더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윗글 중에서:
    勝歌妓臛出歌妓。勝歌妓。肉臛名。 造法先從黍齒傳
    승가기 국물은 가기보다 낫다고 하는데,
    만드는 법은 앞서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네
    狂殺神仙酒鑪畔。神仙鑪。出日本。 중에서 논문에는 원래 "~從黍齒傳 ~전해졌네"까지이고, 대신 "狂殺神仙酒鑪畔。神仙鑪。出日本"는 원문에서 연결되는 구절을 제가 혹시해서 붙여둔 것입니다.

    아무튼 가르침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迪倫 2010/05/25 11:58 #

    원래 금관죽지사 원문 페이지는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604&gunchaId=&NodeId=&setid=4012312 입니다.
    혹시 연결이 안되면 "洛下生集"이나 "金官竹枝詞 "으로 해당 검색 페이지에서 검색을 하시면 될 겁니다.
  • 해색주 2010/05/25 01:44 # 답글

    High Risk, High Return은 경영학 만고불변의 진리(틀려~) 아니겠습니까? ^^; 역시 이윤이 남는 장사에는 상인들이 나오고 이윤이 모여 자본이 형성되고 금융업이 발생하는군요.
  • 迪倫 2010/05/25 10:11 #

    17세기부터 전지구적으로 세상에 돈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조금이라도 거쳐서 잉여가 발생하는 곳은 모두 "이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
    대부분은 부산 왜관 주위의 이런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는데, 뭐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 중인데, 다음편에 제 의견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그때 다시 의견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비아찌 2010/05/25 10:06 # 답글

    저는 그 이학규와 스키야키 이야기를 주영하 교수가 쓴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란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스키야키 이야기 어서 듣고 싶네요.
  • 迪倫 2010/05/25 10:14 #

    아, 그 책은 읽지를 못했는데, 주영하 선생이 쓴 좀 짧은 버전의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좀 의아스러운데가 있어서...다른 음식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스키야키 부분은 약간 문제가 있지않은가 추정 중입니다. 다음에 읽고 주영하 선생의 얘기와 대신 비교해봐주시기 미리 부탁드립니다.
  • 엽기당주 2010/05/25 16:00 # 답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해방후에 심화된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으로 인해 그 이전의 역사까지도 일본을 적대적으로, 그리고 일본과의 교류는 일방적인것처럼 묘사한 해석이 난무하다보니 아쉬울때가 많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적륜님의 글은 가치가 있는 좋은 글 같습니다.

    麗末鮮初 시기에 주로 있던 왜구의 활동도 순전히 약탈행위만 있었던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교역행위도 존재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들이 일본인만 있었다고 말하는거 자체가 이미 '그렇지 않다'라는게 밝혀졌지만) 이런식으로 접촉이 있었으면 교류가 있고 물자가 오가고 문화가 서로 교류하는것을 실증적으로 파보는것도 의미가 있는것 같습니다.

    역사공부하면서 느끼는거지만 민족주의는 정치논리로는 좋든 나쁘든 써먹을수 있는 기재이지만 역사쪽으로는 전혀 쓰잘데기 없는 방해물같더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迪倫 2010/05/27 11:20 #

    예, 말씀하신대로 일제시기를 거치는 바람에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다른나라와는 달리 어느정도 일방적으로 굳어져 있는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요즘의 식민지근대화론적 접근이 아니라도 좀더 다양한 해석과 시각이 가능할텐데, 종종 18세기 또는 그 이전의 교류라는 것을 자꾸 19세기말 20세기의 경험을 통해서만 보면 말씀대로 민족주의가 참...말하기 곤란한 장애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탈민족적 식민빠로 몰기도 하고...참....역사를 역사로 보는 것도 좀 가르치면 좋을텐데요...)

    일본과의 교류는 물론 나쁜 경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규정짓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다양한 시간과 사람들의 인터액션이 있었다는게 책을 읽으면서 점점 느끼는 점입니다. 그래서 참 어려운게 아닌가 싶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 빛의제일 2015/09/20 21:53 # 답글

    제가 2학년까지 초량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화교촌 쪽에 살아서 그런지 '고관입구'라고 불렀던, 왜관 부근 현재 아마도 영사관 쪽은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그 쪽에 가면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왜관이 <화관>으로 기록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연이 새삼 와닿습니다. 말씀해주신대로 모기장도 큰 역할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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