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조선채널 무역의 흥망: 2부 - 6

지난편 "17세기 조선과 왜관무역 (2부 - 5)"에서 조선채널의 은기준 무역의 전성기에 이어서 계속 그 배경과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이 시장이 어떻게 변동하였는지, 그래서, 그 영향은 뭔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자. 도대체 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이런 특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기본적으로 이 무역은 조선 독자적 내수의 확대로 발생한 경제현상이 아니라서, 3국 무역 특수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의 동아시아를 둘러싼 시장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VOC는 에도 바쿠후로부터 1668년 공식적으로 은 수출을 금지당한다. 이보다 좀 앞서 명청교체기에 대륙에서 후퇴해온 정성공의 반청복명 세력에게 역시 타이완을 상실하고(1661) 복건 아모이(샤먼)를 연결하는 대중국 실크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즉, 17세기 후반에 총체적으로 대일 대중국 무역라인의 양대시장의 공급이 모두 위기상황에 빠지게 된다. 결국다른 품목으로 전환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베트남 등에서 중국산보다 저급의 실크를 수매하고 대신 일본에서구리를 가져와 결제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일본에서 가져간 금은 일본 금화의 디베이스먼트로 인해 남아시아지역에서받지 않겠다고 거부해서 적자가 발생한다던지, 베트남 등 구리무역의 나카마로, 때로는 유럽에서 유행하는 도자기를 아예 중국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에 주문생산을 의뢰해서 진행한다던지 하는 좀더 복합적으로 시장 변화에 대처해 나갔다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물론 VOC의 무역이 퇴조했다던지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때 무역의 규모는 몇배나 성장한다. 대신 조선채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은 중국 실크"의 메인 시장에 플레이어가 하나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청국은 1683년 정성공의 후손들이 버티고 있던 타이완을 마침내 획득한다.그 결과로 백년만에 동지나해가 안정된다. 일본도 쇄국정책을 시작하여 후기왜구가 사라지고게다가 일본의 기리스탄 탄압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마침내 어느 정도 청에서도 일본을 인정을 하는 단계가 된다. 이에 따라 대일 민간무역이 마침내 허용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전에는 모든 대중국 무역은 불법해적이었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포르투갈이나 VOC같은 나카마가 필요했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청나라가 안정이 되면서 몇가지 경제적으로 중요한 변동을 거친다. 우선 중국의 강역이 두 배로 늘어난다. 이와 함께 한족 중국인의 인구가 급증한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구의 증가를 가능하게 해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는 스페인 은과 함께 도입된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신대륙의 농산물이 식량증산에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성장이 강희제(1661 ~ 1722)때 지정은제(1711)를 실시하고, 그 결과라고 해야할지 은의 제 2차 가치 상승을 촉발하였다.



1부에서 다룬 1차 은 가격 차익거래 기회 기간(1540~1640)에 뒤이어 보통 1700년부터 1750년까지를 중국의 2차 은가격 상승시기로 간주한다. 이때의 중국의 금은 교환비율은 1:10~1:11, 유럽은 대략 1:15의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보다시피 16세기의 1차 시기보다는 스프레드가 적다. 대체로 이 시기의 금은 교환비율은 16세기에는 차익마진이 100%였다면 이번 2차시기는 차익마진50%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 유럽-아시아 무역도 더 발달하여서 이제는 유럽-인도-중국-일본을 잇는 무역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정례화되었고, 또 나중에 다시 보려는 금융시스템이 네덜란드,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해 이전같으면 실제 이익이 그리 크지않을 이 금은간 스프레드를 100% 활용하여 이 차익거래 기회로 최대 수익률을 올리게 된다.

 

은이 다시 중국으로 대량으로 유입된다. 물론 1640년 이후 은의 유입이 중단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규모나 물량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18세기로 진입하며서 대중국 무역에서 다른 상품들보다 "은"의 값어치가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인도를 돌아 오는 공급선과 어느 정도 정례화된 스페인의 태평양 노선으로 마닐라-광동성 광저우 노선을 통해 스페인 멕시코 은의 유입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차 은 시기에서 주 공급원이었던 페루 포토시의 은을 추월하여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된다. 이때 유입된 은은 모두 멕시코 민트에서 주조한 스페니시 페소 8레알짜리 은화였다. 주조된 시기에 따라 Dos Mundos와 Bustos라고 각각 불리었는데, 그야말로 유럽에서 중국까지 심지어 일본까지 글로벌 기축통화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얼굴이 있어서  중국에서는 '부처얼굴 은화'이라는 의미로 푸터우인(佛頭銀) 또는 푸몐인(佛面銀)이라고 불렀었고,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중국에서 이 스페니시 페소만 받으니 가짜 스페인왕의 얼굴을 자기들의 은화에 찍어서 중국에 공급했다는 후덜덜한 얘기도 전한다...아무튼 이 스페니시 페소화는 전세계의 기축통화로 19세기까지 계속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며 사용되었다. 그런데, 16세기의 스페인은 페루 포토시의 은으로 스페인제국의 재정을 뒷받침했었는데, 18세기 초의 부로는 실제 다시 제국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이런 유럽 사정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조선을 경유한 3국무역의 활황도 이런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18세기 전반의 2차 은 사이클을 넘어가는 동안  호황을 맞이한 스페인 은시장말고 일본 은시장은 大變 변화에 직면한다.

 

한편 동아시아에는 스페인 페소와 같았던 무역통화로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일본 은화였었다. 대부분의 일본 은은 정은의 형태로보다 일본 은화의 형태로 조선이나 중국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중 17세기를 통틀어 신용의 기준 은화로 사용된 것은 1601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한 경장정은(慶長丁銀)이었다.경장정은은 '은 함유량 80%에 동 20%'의양화로 조선에서는 개혓바닥같이 생겼다고 '개설은' '개서은'은로 불렸다고 한다.

한편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은의 산출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바쿠후에는 상당한 재정적자가 누적된다. 이 당시 재정을 맡았던 간조부교 오기와라 시게히데(荻原重秀)는 요즘식으로 치면 신용파생주의자 같은 정책을 사용하여 재정적자를 타개하려든다. (그가 남긴 말이라고 하면서 다음의 말이 전해온다: "貨幣は家が造る所、瓦礫を以ってこれに代えるといえども、まさに行うべし。今、するところの銅薄といえどもなお、紙鈔に勝る。これ遂行すべし。"  뭐 대략 '국가가 만들어서 신용을 실으면 기와조각도 돈으로 굴러간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엄청난 사고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즉 겐로쿠정은(元祿丁銀)1695)이라고 하는 은 함량을 이전의 80%에서 "64%"로 낮춘 화폐개주 즉 디베이스먼트를 실시한다. (디베이스먼트에 대해서는 이전의포스팅"대항해 시대의 은행가 2편"을 참고하세요) 덕분에 통화량이 늘어나고 바쿠후의 재정 세입이 증대하게 된다. 한번 재정적자에서 벗어나는 세입의 증가에 한번 맛을 들여서 이후 18세기 초입에 4번의 디베이스먼트가 더 일어난다. 은 함유량은 점점 줄어들어 50%, 40%,32%에서 마지막 1711년 때는 무려 은함유량 20%짜리가 나오게 된다. 디베이스먼트의 영향은 초기에는 재정확대와 통화량의 증가로 완만한 인플레이션을촉발하여 상업계층에 상당한 이익을 누리게 해줬다. 그러나 18세기 초반보에이(寶永)개주라고 부르는 은화의 품위저하가 급격하게 진행되자 인플레이션이 보다 심각하게 발생하고 무엇보다 쌀을 녹봉으로 받는 사족들에게 전체적인 불이익을가져왔다. 사무라이 계층은 쌀을 녹봉으로 받아 생활하는데, 급격한 인플레로다른 물품의 가격은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쌀의 가치는 떨어지자 이들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이제는 재정적 문제에사회적 문제가 겹쳐 18세기 초반의 일본사회가 만만치 않아진다.

 

오기와라를 뒤이어 책임을 맡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714년 일단 은화를 반대로 인헨스먼트를 시행한다. 이를 교호(亨保)정은 또는쇼토구(正德)정은이라고 부르는데, 일단 은 함유량을 다시 80%로 높인다.이렇게 함으로써 반대로 통화량을 줄이고 물가를 잡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함께이듬해 1715 "해박호시신례"를 발표하여 무역 전반에 걸쳐 상한선을 설치하고 통제를 가한다. 아라이는 기본적으로 금속본위주의자로간주되는데, 해박호시신례에서 일본의 금은동 귀금속 유출규모를 들어 전반적인 통제를 실시한다.하지만 이미 얘기했듯이 금과 은은 이미 더 이상 일본에서 유출되는 양이 이전에 비해서 미미한 양이 되고 난 다음이었다.게다가 국내적으로는 전반적으로 통화량을 줄여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던 시기여서 실제 금과 은은 이미 더 이상 중요한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18세기 초반의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은 바로구리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청나라라는 또 다른 요인이 관련되어있었다.1700년경부터 청의 은 수요증가는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만, 이와 함께 구리의 수요또한 상당히 증가하였다. 게다가 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주화용 구리수요가 늘어나 역내 무역을 활발하게 촉진하고있었다. 18세기 초반 역내 구리의 주 공급원은 일본이었다. VOC에서는나가사키에서 선적한 구리를 아예 배의 무게를 잡는 발라스트로 사용하여 말라카를 거쳐 인도와 남아시아로 실어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1670년대 후반에는 이미 최대 플레이어는 VOC보다도 민간무역이 허용된 청국 상인들이었다


청 조정에서는 여러가지 시책으로 주화용 구리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주 원천은 역시 일본 구리였다. 그런데, 해박호시신례는 구리의 수출을 규제할 뿐 아니라나가사키의 청국상인들에게 신패(信牌)라고 하는 일종의 라이센스를 발급하기시작했다. 그런데, 청국에서는 이로 인해 대소동이 일어난다.이제는 일본과의 무역이 더 이상 불법이 아닌 민간무역으로 허용이 되고 나자 그동안 불법 무역의 주역이었던 복건성의 무역상들대신 본격적으로 중국실크제품의 주 생산지인 절강 강소의 상인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신패가 게다가대부분 절강 강소의 무역상들 위주로 발급이 되자 크게 불이익을 당하게 된 복건성의 무역상들이 청 조정에 절강 강소의 신패 수령 무역상인들을 고발을하는 일이 생긴다. 신패에는 일본의 당시 연호인 쇼도쿠(正德)이 적혀있었는데, 외국의 연호가 적힌 문서를 받았으니 반역죄라고 고발을 하였던 것이다.명나라때만 해도 충분히 먹혀 들어갈 만한 중차대한 문제였지만 이때는 이미 청나라때 게다가 강희제는 심복을 이전에 나가사키에밀파해서 일본의 사정을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좀 흐르면서 기각과 항소를 몇번 거친 끝에강희제의 최종 결론으로 "노 프라블럼"으로 결론이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그동안 중국 무역을 끌어오던 복건 상인은 거의 역사에서 후퇴하고, 절강 강소의 실크산업이 자체 무역의 역량을 키울 수 있게 된다.

 

18세기로 넘어와서 각국이 이런격변기를 거치고 있는 동안 조선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18세기 초반의 조선 무역은 의아스럽게도 전혀 영향 안받고있다. 조선에서는 원래 경장은 은화 자체를수입해서 중국으로 바로 보내오고 있었다. 겐로쿠 정은이 주조되었을 때(1695년 숙종 21) 원래 바쿠후에서는 은 함유량이 줄어든것을 공식적으로는 밝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곧 이 품위의 저하가 문제가 되자 쓰시마와 조선 사이에는 일종의협상을 한다. 즉 조선 무역은 경장은을 기준으로 적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쓰시마쪽에서는 대략 디베이스먼트 된 정도를 고려해서 25% 디스카운트 할 요량이었는데, 조선측에서 겐로쿠정은을녹여서 함량분석을 하니 은이 너무 적게 나온다고 뻗어버린 것이다. 왜관에서 쓰시마쪽이 참관한 가운데 함량분석을다시 실시하여 간신히 조정하여 27% 디스카운트 레이트를 적용하고 대충 무마하는가 싶었는데, 쓰시마번의 텐류인시대를 이끈 번주 소 요시자네 사후, 위에서 본 것처럼 은화의 디베이스먼트가 점차 조선과의 무역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결국 쓰시마는 바쿠후에 로비를 하기에 이르른다. 역시 로비의 대상은 오기와라 시게히데! 쓰시마의 전격적인 로비의 결과 기발한 안이 채택되어실시된다. 일본 에도시대의 은화의 시대별 추이를 살펴보면 은 함유량이 32%로 추락하던 보에이시대(1710) 난데없이 80% 함유량의은화가 5337(대략 20)주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름은 '인삼값용으로 옛날로 돌아간 은'정도로 해석할까 '人參代往古銀'이라고 불렸다. 이 고품위의 은화는 순전히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중요한 수입품인 조선인삼을사기 위해 왜관전용으로 주조한 특수은화"였다. 물론 인삼값은 명분이고 대조선 무역을 지속하기 위한 쓰시마의로비가 먹혀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몇 년후 아라이 하쿠세키가 재정을 맡아서 교호정은을 발행하고 엄격히 무역규제를 실시하려고 하자, 쓰시마번에서 대조선관계를 맡았던 같은 기노시타 준앙 문하의 아메노모리 호슈와 여러가지 측면에서 대립을 한다. 이들간의 대립에 대해서 대부분은 국제관계의 측면이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해석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만, 에도 vs. 쓰시마간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이들 둘의 입장차이가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고나할까? 조선과의 무역이 차질이 생기면 당장 쓰시마번은 빈한한 군소 번이 되어버리고 마는 상황이었기도 하다. (이쯤에서 양해를 구하는 것은 석고제를 근거로 아메노모리가 아라이에게 대항하였다는 내용에 대해 아직 디테일한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쯤 소략하게 넘어가는 것 양해바랍니다.)

 

하지만 18세기 초중반 이렇게 잘나가던 조선채널도 마침내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아 마감하게 된다. 1740년대 일본에서의 은 수입은 최종적으로 거의 중단된다. 구리 생산 역시 줄어들면서 전황이라고할 정도의 수출 물량 부족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은 2가지 중요한 수입 물품을 자급해내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일본에서 발간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참고하여 일본에 대한 "청령국지"라는 책을 내었는데, 이 책 중에 아란타 즉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기록하였다고한다. 이중 "나가사키에는 아란타 이외에도 타이,인도지나, 타이완, 중국의 배가 와서 무역을하는데, 일본은 조선 인삼을 자기네 토산품이라 속이면서 아란타 상인에게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고 했다는데, 일본은 이미 18세기 초에 쓰시마를 거쳐밀반입된 인삼 종묘의 재배에 성공하여 1736년부터 에도 간다(神田) "조선인삼좌"에서 자국산 인삼(お種人參: 오타네닌징)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미루어 짐작컨데 이덕무가기록한 것처럼 18세기 후반에는 이미 조선인삼을 토산품이라고 속인게 아니라 정말 일본산 인삼이었을 가능성이더 높다. (위의 이덕무 관련 인용문은 [김문식, "이덕무와 화한삼제도회"에서 인용)

또한 가장 중요하던 수입품인 실크 생사를 18세기 초반 교호시대(1710-1736) 후반부터 자급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청의 남중국해 개방으로 조선채널 수입품의 일본 내 수요도 격감하고.조선의 마지막 은수입은 기록 상으로 1753(영조 29) 수량이 알려지지 않은 오긴센 2척의 왜관 도착을 마지막으로, 개항 후 청국상인을 통해 스페인 은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중단된다.

조선은 수출입 모두 경쟁력 상실하여 1750년대에 3국간 무역이 마감을 한다. 최고의 르네상스라고 보통 평가하는 정조대에 조정에서 '영원한 제국'을 꿈꿨는지 "독살"을 했는지 따위는몰라도 조선경제는 솔직히 이미 붕괴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난전의 허용을 통해 화폐경제 또는 시장경제시스템을 확대해보려 했지만, 기본적인 경제의 펀더멘털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을거라고 본다. 그래서 화폐 경제시스템이 조선시대 시작된 것처럼 해석을 하는 화성의 건설이 그 이후 전혀 지속적으로 연결되지않고, 대신 조선은 화폐경제가 발달한 적이 없었다는 해석만 난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국제 경제의 흐름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니 인적, 물적 교류가 줄어들고 자연스레 정보가 소외되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외부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접한 노론에서 북학파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손쉬운 설명방식인 일본의 간악한 '/구리 생산고갈'을 탓하리? 어쩌면 17세기를 거치면서 생겨난 자본주의의 맹아가 18세기 후반에 이미 국제 자본시장의 변동을 따라잡지못해 사라진 거라고 보면 어떨까?

이후 19세기 조선의 폐쇄성이란 무엇인가? 무역의 경쟁력 상실과 18세기 국제시장의 변동, 수입 구리의 부족 등이, 익히 알려진 대로, 생겨나려던 화폐시스템 붕괴, 사망률의 증가로 인한 인구감소에도 불가하고 소득의 증가로 연결이 안되고, 생산력의 저하로, 오랜 기간 경제적 정체의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이런 경제적 침체는 결국 회계감사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하고 연이어 삼정의 문란과 매관매직 등등 우리가 익히 잘알고 혀를 차는 19세기적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잘알려진 주장들처럼 봐야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해석들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솔직히 19세기로 이어가는 18세기의 경제적 현상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이 아직 명확하게 내 나름대로 이해가 안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경제가 쇠락하니 반동적으로 수구적 이데올로기가 더욱 타협을 거부하는 도그마가 되어 내부 방향으로 치닫게된다는 것만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의 제 글이 좀 무리하게 쓰느라 엉성하게 적혀 뭐랄까 다시 수정을 좀 하였고, 관련된 제 입장을 간단하게라도 얘기를 하는게 좋을 것 같아 별도로 짧은 변명을 덧붙였습니다. 읽어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절두산의 척화비...

그런데,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인구 감소의 반등이 식민지시대가 아니라 개항시기부터이며미가 급등의 시기 역시 식민지시기가 아니라 개항시기라는 점이다. 원수부 관전장교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는 사회적 모빌리티도 개항시기부터 다시 등장한다. (물론 이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조선채널은 여기서 마감하고 다시 17세기로 돌아가자.19세기로 넘어가는 것은 지금 내가 다룰 수 있는 능력도 넘어서고 주제도 벗어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보다 복합적이고 논쟁적인 주제도 좀 있어서 모쪼록 피하려고 한다. 

대신 17세기의 VOC로 다시 돌아가서 VOC가 지금까지 본대로 결코 쉽지 않았던 여건 속에서 당대 지구 최고의 수익률을 올리면서 국제 네크워크를 만들 수 있었던 펀더멘털한 요인을 살펴보려고 한다. (글이 길어졌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y 迪倫 | 2009/11/03 11:37 | 2부: 17세기 - 경제사잡담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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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에로거북이 at 2009/11/03 11:48
잘 읽었습니다. ( 오늘은 1빠를 장식하네요 )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인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08:58
감사합니다. 1빠라고 하시니 왠지 메이저가 된듯한 착가에 잠시...-_-;;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않고 쓴 글이라 걸러서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我幸行 at 2009/11/03 12:05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08:58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함부르거 at 2009/11/03 16:24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대외무역에 성쇠가 갈리는 것이 이 나라의 운명인가 하는 생각까지 드네요.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09:01
흔하게 하는 얘기이지만 자원이 부족한 중형 사이즈의 국가들은 대부분 겪게되는 일들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네덜란드도 17세기를 넘기고 나니 18세기에는 참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던 역사가 있으니까요...
개방으로 인한 사회 마이너리티의 고통을 최대한 줄이면서 문호를 계속 열어두는 지혜라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Nara at 2009/11/03 16:57
오... 이런 관점도 있군요.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09:04
반갑습니다. 예, 이런 관점도 있다는 정도로 읽어주시기 바라고 있는 중입니다. 전체를 다 설명할 수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한 단면을 보여드릴려는 것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zert at 2009/11/03 17:46
어떻게 요즘 경제사도 아닌 조선시대 경제사를 공부하시는지 정말 대단하시군요;;;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09:05
대단하다고 이렇게 적어두면 정말 그런 줄 믿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내용들 걸러서 읽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명량대첩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워낙 아는게 없어 덧글을 남기기 미안해서 여기다 잘 읽었다는 말씀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4 15:53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어제 포스팅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자꾸 익플오류가 뜨더군요...ㅠ

일본의 은정의 함유율이 30%수준까지 떨어진다는 것은 처음 알았군요....;; 국가가 신용을 부여하면 기와조각이라도 통용된다...라..=_= 역시 저 시대에도 용자는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당시 대일교역에서의 이익감소 뿐만이 아니라, 대청교역에서의 수요는 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는 점도 당시 조선의 경제난을 가중시킨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 역시도 중국산 비단에 대한 수요는 일본 못지 않았고, 더욱이 18세기 이후로는 모피모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모자교역을 통한 수입 증가도 주목할 만하니깐요.

이러한 문제는 국제교역시장에서의 지불능력의 퇴화라는 점과 지출수요의 증가가 맞물려서 일어난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견이 있네요.


다만 뱀다리처럼 이견(?)이 있다면...지가추세를 통한 생산량 감소라는 측면은 '수량경제사로 보는 조선후기'에서 이영훈 선생님도 지적한 바이지만, 그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일단 밭을 논으로 바꾸는 비용이 들어가 싸게 팔 수밖에 없는 '환퇴답(還退畓)'의 문제나, '거래'를 빙자한 '봉사조로서의 양여'인 친족거래 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전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지가의 하락이라는 점 등이 보다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4 23:08
감사합니다.

일본 은화의 은함유량은 사실 아라이 하쿠세키의 개혁 이전에 최고(가 아니라 최저) 20%짜리까지 나왔습니다. 책에서는 은화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까지 표현해뒀더군요, ㅎㅎㅎ

오기와라 시게히데는 당시에는 재정을 말아먹은 이로 심각한 공격을 받아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이런 경우 개인적인 부정부패의 꼬리도 붙어다니고요. 하지만 최근의 일본에서는 근대인의 선구자처럼 고려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좀 특이한 인물이죠.

대청교역의 수요증가 부분의 사견이라고 하신 부분은 저도 그렇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회 전반에 경제활동이 증가하면 쉽사리 버블이 생기고, 경제상황이 급자기 나빠진다고 해서 쉽게 한번 생긴 버블이 꺼지지 않는 경향이 확실히 있는데다가, 말씀하신대로 18세기 후반 조선은 확실히 약간 실제 펀더멘털을 넘어선 소비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큰 것 같습니다.

이견이라고 하신 부분은 사실 솔직히 이견은 아닌 것 같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로 연결되는 조선 국내 경제부분은 아직 제가 뭐라고 정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도 그래서 솔직히 좀 결론으로 제 주장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지가추세에 대해서 이견이 잇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이런 무역 경쟁력의 상실이 이런 여러가지 이후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들의 원인이 된것이라고 해야할지"라고 얼머무린 것입니다. (바로 들켜버렸군요 -_-;;)
19세기에 디플레이션 상태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전황으로 인한 대안으로 여러형태의 바터 거래가 증가한 것으로 본다면 실제 어느정도 디플레이션인지 분명히 측정하기가 무리인점이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영훈 선생의 글에서도 이부분에 약간 논리적 점프가 있지않았던가 싶은데, 예, 실제 말씀하신 여러 형태의 비정규, 비화폐경제적 현상들을 모두 고려해서 살펴봐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듭니다.
이에 대해 대조적으로 일본의 경우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교호개주로 디플레이션이 너무 심하게 발생하여 다시 디베이스먼트를 몇차례 실시하여 사실 다시 개항할때까지 인플레이션의 상태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어쩌면 19세기 개방의 30년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제 포스팅은 조선의 무역에만 촛점을 맞추고 (얼렁뚱땅 잘모르는 것은 넘어가면서) 이 부분은 척화비처럼 이후 수구 이데올로기의 도그마화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했던 점 이해해주십시오. 18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는 조선뿐 아니라 청나라의 경제도 극도의 반대되는 견해들이 있어서 쉽게 정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리한 코멘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네비아찌 at 2009/11/05 11:06
19세기 조선 경제의 붕괴가 국제 무역 네트워크의 변화에도 기인하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링크 걸어서 계속 읽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ed by 迪倫 at 2009/11/05 11:51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번 밝히지만 이것으로 전체를 다 설명한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이런 측면이 있었다는 정도로 걸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네비아찌님 링크 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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