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의 하란국 조공사절단-한 세계가 끝나갈즈음 by 迪倫

아스트로라브 이야기를 하던 도중 마침 이웃의 남중생님이 [네덜란드 풍설서] 항해 전에 바타비아에서 미리 써서 갔을까?라는 재미있는 포스팅을 올리셨는데, 이삭 티칭이라는 VOC 인물에 대해 그동안 제가 썼던 글들을 링크를 해주셨었습니다. 이삭 티칭(Isaac Titsingh, 1745-1812)은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유럽과 동아시아 중간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궤적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잠깐 관련 이야기 하나 먼저 하고 다시 시리즈로 돌아가겠습니다. (실은 아스트로라브 다음편 반쯤 썼는데 정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튼 양해바랍니다)

남중생님은 포스팅에서 마츠카타 후유코(松方冬子)의 "オランダ風説書"(오란다 풍설서)를 일부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 제목은 中公新書: オランダ風説書―「鎖国」日本に語られた「世界」 오란다 풍설서 쇄국 일본에 말해진 세계, 中央公論新社,2010 이 니다) 오란다 풍설서라는 것은 데지마의 VOC상관에서 매년 새로 입항한 상관장이 에도 바쿠후에 바깥 세상의 정세에 대해 보고서를 올린 것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남중생님의 번역을 보면 실제 데지마 상관장이 나가사키의 통사에게 전한 얘기가 다시 일본어로 정리되는 과정에 누락 편집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개해주신 1795년 풍설서의 아마도 통사의 상관장 인터뷰 원고와 실제 바쿠후에 제출된 보고서 간의 차이가 나는 누락된 내용 중에 "티칭 각하는 황제폐하(건륭제)께 대사(大使)로 부임해 중국에서 특별한 후대를 받았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삭 티칭은 1779-17980년과 1781-1783년, 그리고, 1784년의 반년간 총 3회의 상관장으로 부임을 하여 풍설서 작성 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나가사키와 에도에 많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의 청나라 사절단 얘기가 누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데지마 임기를 마치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던 티칭은 이후 1794-1795년 청 건륭제 즉위 60주년 네덜란드 VOC 사절단의 단장으로 베이징을 다녀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실은 미국인(?) 한명이 일의 처음부터 끼어있습니다. 아, 실은 원래 네덜란드 사람인데, 미국 건국 혁명에 공감하여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국 시민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안드레아스 에버라두스 판 브람 하우크헤이스트(Andreas Everardus van Braam Houckgeest, 1739 - 1801)입니다. 원래 네덜란드 수병으로 시작해서 VOC에 들어가 광저우와 마카오 상관에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그러던 1783년 말씀드린대로 미국 건국에 공감하여 미국으로 이민가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자리를 잡고 무역업과 쌀 농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가족에 관련된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고 미국을 떠나 VOC 광저우 상관장직을 맡기로 하고 1790년에 부임합니다.

광저우는 청나라가 이미 17세기부터 마닐라의 스페인과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게 개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영국 동인도회사, 프랑스 동인도회사,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프러시아 등등 유럽국가들이 상선을 정기적으로 보내기 시작하자, 18세기 중반 1757년 캔톤시스템(광동체제)이라고 하여 광저우에 승인받은 유럽국가 상관의 주재와 허가받은 중국 에이전트 시스템이 아편전쟁때까지 운영됩니다. VOC는 네덜란드 국가를 대신하여 이른 시기인 1729년에 상관이 설립이 되었습니다. 브람 하우크헤이스트는 1758년부터 1773년 기간 동안 그의 커리어의 초반기 15년과 1790년부터 1795년의 후반기 커리어의 정점을 광저우에서 보냈었습니다.

브람 하우크헤이스트가 상관장으로 있을 당시 아마도 자기를 모델로 주문한 광저우에서 만들어진 채색자기 피규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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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로라브의 여신들 by 迪倫

마라게 천문대의 밤의 뒷부분 원사(元史)에서 인용한 올속도아랄부 즉 아스트로라브의 기사를 다시 설명드립니다.
兀速都兒剌不,定漢言,晝夜時刻之器。其制以銅如圓鏡而可掛,面刻十二辰位、晝夜時刻,上加銅條綴其中,可以圓轉。銅條兩端,各屈其首為二竅以對望,晝則視日影,夜則窺星辰,以定時刻,以測休咎。背嵌鏡片,三面刻其圖凡七,以辨東西南北日影長短之不同、星辰向背之有異,故各異其圖,以畫天地之變焉。
아스트로라브, 중국어로 하면 주야시각장치. 구리로 둥근 거울처럼 만들어 걸게 되어있다. 표면에는 12 별자리, 주야의 시각을 세기고, 위에 구리제의 막대를 더하여 가운데 꿰어 원을 돌릴 수 있게 되어있다. 구리제 막대는 양쪽 끝에 각각 구부러져서 그 머리에 두 끝을 맞춰 멀리 보는 조준을 할 수 있으며, 낮에는 해 그림자를 볼 수 있게 되어있고 밤에는 별을 관측할 수 있다. 시각을 알 수 있어서 흉하고 길한 것을 잴 수 있다. 뒷면에는 거울조각을 끼워넣었고 3면각에 그림 모두 7개를 새겨넣었으며, 동서남북 해그림자의 같지않음과 별들의 방위가 다름이 있음을 분별함으로써 그래서 그 그림을 각각 다르게 하여 천지의 변화를 구분한다.


호오, 번역을 제가 엉망으로 하긴 했지만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실은 그리스에서 탄생하여 이슬람에서 꽃을 피운 망원경 이전 최고의 천체관측장치가 바로 이 아스트로라브입니다. (아스트롤라베, 아스트롤라브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저는 아스트로라브로 표기하겠니다) 원사 천문지의 설명에 의하면 시간도 재고 해달 별의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은 이것 거의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설명을 드려야 합니다.


이 이미지는 14세기 무렵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상당히 표준형의 아스트로라브입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보여드렸던 나시르 알 투시의 마라게 천문대 그림에 보면 가운데 위에 둥근 원반이 걸려있습니다.

예, 이게 바로 아스트로라브입니다.

이 장치는 다른 천문장치들처럼 대형의 고정된 장치가 아니라, 누구나 사용법을 알면 그냥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만 보면 날짜, 시간과 방위와 별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에에? 이 원반 하나로 그게 가능하다굽쇼? 잠깐만 우선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아스트로라브는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가 기원입니다. 그리스어 ἀστρολάβος (아스트로라보스)가 어원인데 별이라는 의미의 ἄστρον (아스트론)과 가지다라는 의미의 λαμβάνω (람바노)의 조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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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게 천문대의 밤 by 迪倫

1259년 여름, 엇갈리는 운명의 배경설명을 염두에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일반적으로 초창기 몽골은 무자비한 야만인의 이미지인데, 불과 얼마되지않아 초제국을 운영하는 심지어 중세의 세계답지않게 종교적 갈등조차 해소한 문명인의 이미지로 재해석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러가지이겠지만 전해오는 얘기에는 이런게 있습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이전의 요나라 거란계통의 예루추차이(Yelü Chucai )라는 학자, 관리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야율초재(耶律楚材)로 알려져있는데, 칭기스칸이 금을 치면서 여진족에게 점령당한 관계인 거란족을 회유하면서 예루추차이를 발탁합니다. 예루추차이는 칭기스칸에게 점령한 곳의 사람들을 모두 살륙하지말고 세금을 거두도록 하라는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고 점령지의 학자와 예술가를 회유하여 활용하라는 건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몽골의 점령정책이 바뀌고 대제국으로 이어졌다는 것인데, 단 한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상당히 흥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예루추차이(야율초재)는 이후 1220년 무렵부터 칭기스칸의 서아시아 원정을 수행하였는데, 이때 "지즈"(Zij)라는 페르시아 문명의 산물을 접하게 됩니다. 이게 뭐냐면 실은 첫번 포스팅에서 "일칸 천문표"(Zij -i Ilkani)라는 천문 상수표를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게 원래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지즈 이 일카니'인데, 여기서 지즈는 천문표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즈 자체는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 다른 지역에도 있었지만 중세 페르시아에서 특히 발달하면서 이름도 페르시아어로 정착되었는데, 프톨레미의 천문관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일월 5행성의 위치를 추적하는 천문계산에 적용되는 변수와 상수들을 모은 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루추차이는 페르시아에서 이 표를 구하게 되고 당시 중국의 달력이었던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에 이 지즈를 적용하여 오차를 보정하는 작업을 하게됩니다.

이렇게 몽골제국 내에서 이슬람 특히 페르시아의 천문학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자, 그 스스로도 천문학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던 몽케 카안은 제국 어디서나 통일된 달력을 적용하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1251년 카안의 자리에 오른 다음, 몽케는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천문대를 만들기로 하고 부카라 출신의 "자말 앗딘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이븐 무함마드 알 자이디 알 부하리" (일반적으로 자말 앗딘으로 부릅니다)을 발탁하여 프로젝트를 맡깁니다. 하지만 자말 앗딘만으로 이슬람 태음력 달력과 중국식 태양태음력 달력을 통합하는 엄청난 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워지자, 몽케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의 천문학자로 이름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알 하산 알 투시"(보통 나시르 알 딘 알 투시로 알려져 있습니다)를 데려오라고 서방으로 원정을 보낸 훌레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훌레구는 명령대로 니자리 이스마일파의 알라무트 요새를 함락시키고 그곳에 있던 나시르 알 딘 투시와 그리스계통의 이슬람 천문학 서적을 모두 손에 넣게 됩니다.

하지만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시대는 요동을 치고, 카라코룸의 몽케는 남송 친정을 떠났고 시리아, 이라크 지역의 훌레구 역시 전투가 지속되어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카라코룸으로 가지 못하고 훌레구의 막하에 머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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