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근황의 변입니다.. by 迪倫

안녕들 하십니까.

사실상 폐쇄 수준으로 이글루를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지난 봄에 아내와 결혼XX주년의 기념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특히 예수회의 아시아 선교 관련 사적, 유물을 잔뜩 보고 왔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자세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리스본에서 실물로 마침내 본 남만병풍입니다.
그리고, 여름부터는 회사일이 정말 무지하게 바빴습니다. 몇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했는데다가 월급은 안오르고 일만 늘어나는 직함을 올초에 받은 덕분에 문자대로 분골쇄신 해오고 있던 중입니다.

8월에는 간단한 수술을 했는데 아무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0월에 재수술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회사일은 계속 했습니다. ㅠㅠ

둘째 아이가 대학을 가고 이제 빈집에서 한가한 엠프티네스트가 아니라 일이 무럭 무럭 자라나는 한편 ‘다행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책들은 그 와중에 여전히 읽고 있습니다만 생각을 정리할 여유가 좀 부족하네요.

고래 시리즈는 겨울에는 마무리 지어서 해를 넘기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아무쪼록 제 블로그를 찾아주기던 분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森 - 연재 재개! by 迪倫

에도의 森, 에도의 입(口) 의 마지막 장면에서 19세기 후반 태평양 서쪽에서 거의 멸종하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몰렸던 향유고래들이 신에너지원 석유의 상용화를 축하하는 연회장 장면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원 출전은 1861년 베니티페어 잡지의 삽화입니다. 펜실베니아의 상업적 석유 생산은 1859년 처음 시작되어 1891년 피크 생산량을 보인 다음 텍사스나 캘리포니아로 바톤을 넘깁니다. 물론 중동 석유는 기본적으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17세기 이후 증가해온 상업적 포경업으로 인해 아, 고래의 수난이 그렇지 광물성 자원으로 대체되면서 마침내 끝이 보인 것이구나 하고 혹여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래의 그래프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래프는 갬벌의 1999년 포경관련 논문의 데이터를 재구성한 것인데, 양키 포경선이 등장하던 1860년부터 2000년대까지 "공식적"으로 보고된 포경개체수를 도표화한 것입니다. 왼쪽의 y축의 숫자는 단위가 천입니다. 그러니까 1900년대 이전에는 비공식적 포경개체수를 감안하더라도 몇천 마리 단위였는데, 20세기로 넘어가는 순간 만, 2만, 3만, 무려 연간 7만 마리까지 폭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20세기 후반 80년대 즈음부터 급속히 줄어든 것은 실은 국제적인 포경업에 대한 금지 여론과 뒤이은 협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닝겐들이 서로 죽이느라 여념이 없었던 1차 2차 세계대전 동안 고래는 숨을 돌릴 수 있었군요.

아니, 석유가 나왔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그 이후에 정작 스케일 자체가 다른 '학살'의 규모로 증가한 것일까요?

물론 미국의 양키 포경선들은 거의 1870년대까지는 산업의 소멸단계까지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란 자원을 보다 다양하게 추출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19세기 후반 서양은 본격 자본주의적 소비사회로 전환되어 이전의 고급품에 대한 저렴한 공장제 대체재에 대한 요구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는 국민국가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데에도 필수적인 베이스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국가에서 군인들에게 대량으로 보급할 버터의 대체재를 개발합니다. 경화유라고 하는 화학적 제품인 이 상품은 불포화산 지방산이 많은 액상유에 수소를 반응시켜 고체화시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의 우지를 사용하다 이후 점차 값이 싸고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어유나 고래기름이 경화유의 원료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 버터의 대체재는 바로 마가린입니다. 1869년 발명되어 군용 보급품으로 일반 가정용으로 산업화된 바로 그 '버터가 아니지만 버터와 맛이 같아요' 제품입니다.

그러니까 고래기름이 산업연료로 가치가 없어지는 그 타이밍에 산업원료로서의 가치가 새로 대두된 것이라고 할까요.
이어지는 내용

에도의 森, 에도의 입(口) by 迪倫

향유고래를 따라 재팬그라운드로!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양키 포경선들은 1818년 재팬그라운드의 발견 이후 동북 아시아의 해역으로 와글 와글 모여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처음으로 일본 에도 바쿠후와 조우하게된 것은 앞의 '공중 지배자의 아들 편에서 얘기드린 1845년 봄, 선장 메르카토어 쿠퍼의 포경선 맨해튼호입니다.

메르카토어 쿠퍼 선장의 초상화입니다. 그림 속 창문 뒤의 장면을 잘보시면 그의 배 맨해튼호와 향유고래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배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의 바로 입구인 우라가 항구에까지 들어간 것은 실은 19세기 일본에 대해 조금만 알면 대단히 의외의 사실입니다. (아래 지도의 표시 지역이 가나가와현 우라가입니다. 도쿄만의 바로 입구입니다)

물론 에도 일본은 쇄국 기간에도 네덜란드와 교역을 계속해서 서양 사정에 밝았고 어쩌고는 개뿔. 실제 네덜란드 배들도 나가사키에서 대단히 엄격한 통제 속에 있었고, 그 외의 나라들은 혹시라도 기리시탄을 퍼뜨릴까 무조건 무응답 무허용 무관용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나 러시아의 접근 시도에 대해서는 파에턴호 사건이라든가 (여기 클릭 ) 레자노프의 도래(여기 클릭)를 참고하세요. 특히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 오게 된 계기인 락스만의 마쓰마에 접촉 시도의 경우를 보면 일단 무조건 나가사키로 가라고 해서 그곳에서 붙잡아두었다 거절하는 방식이 원래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한 에도 일본의 대책이었습니다.(이때만해도 조선이나 일본이나 그리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게다가 그 이전에는 다들 서양 국가의 공식적인 사절이거나 해군같은 국가 기관의 방문이었다면, 맨해튼호는 심지어 그냥 민간 부문의 접촉이었단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코 앞까지 들어오도록 허락을 한 것일까요?

메르카토어 쿠퍼 선장의 단 4일간이었지만 일본 방문은 미국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양키 포경선에 일본 근해에 접근해서 고래를 잡는 상황이 중요 미션이 되었는데, 태풍과 같은 만약의 사태와 생필품의 조달같은 문제들도 걸려있고, 그런데 그때까지 네덜란드를 제외한 그 어느 서양국가도 에도에는 그만큼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쿠퍼 선장의 경험은 1846년 4월 "China Repository"에 "Some account of Captain Mercator Cooper's visit to Japan in the whale ship Manhattan of Sag Harbor"라는 제목으로 그의 직접 육성과 함께 실렸습니다.

그가 직접 일본인들에게서 들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란색으로 하이라이트 한 부분에 에도의 거버너라고 알고 있었던 일본인 고위 관리 일행이 말하기를 "그가 에도 바다가에 머무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황제(emperor라고 되어있지만 교토의 텐노가 아니라 에도의 쇼군을 말합니다)가 그가 이방인을 구해주는 착한 마음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좋은 마음으로 대하여서 이기 때문이다"라고 전합니다만, 그러나 "다음에는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오지 마라"라고 단호한 입장을 전합니다.
이어지는 내용

1 2 3 4 5 6 7 8 9 10 다음



쿠루쿠루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