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 던지는 질문, "주의자" by 迪倫

1923년 여름의 베이스볼의 마지막을 1923년 9월의 간토대지진을 언급하면서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약간 시간을 앞으로 돌려 3.1 독립만세운동의 파장이 아직 채 수습되지않은 1919년 늦가을로 가겠습니다.

1919년 11월 14일 여운형은 임정의 최근우, 신상완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8일 도쿄에 도착합니다. 이 여운형의 일본 방문은 그 처음부터 정작 일을 추진한 일본쪽에서뿐만 아니라 수용을 둘러싸고 임정 및 각지의 독립운동계에 논란이 대단히 많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대담하게 일본제국의 한복판에서 독립주장을 펼쳤고 이로 인해 일본 조야에 여러가지 파장을 남겼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 관련해서 제가 주목한 것은 여운형의 일정 중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를 따르는 학생단체 "신인회(新人會)"라는 모임의 환영회 초청입니다. 이날 일본 사회주의 운동가, 아나키스트 100여명과 김준연 등의 조선인 학생들, 중국인 학생들, 그리고, 도쿄제국대학생 수백명이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여운형 평전에 의하면 "환영회 석상에서 여운형은 “조선독립운동은 조선인의 일시적인 감정 폭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조선인의 영구적 자유와 발전을 위해서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이다” 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하였다.
이에 대해 사회를 맡고 있던 미야자끼 유노스께는 “여 선생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안심이 된다. 조선독립이 민족적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조선과 일본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 선생의 말과 같이 조선독립이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임으로 해서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행사 도중 참석자 중의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참석자 다수가 합창하는 돌발적인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전: 몽양 여운형 평전,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삼웅, 채륜, 2015)

여기서 요시노 사쿠조오스기 사카에라는 두명의 인물을 잠시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명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두개의 정신(二つの精神)"이라는 표현도 보았을 정도입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본 역사의 용어가 있습니다. 위키백과를 참고하면 "日本で1910年代から1920年代にかけて(概ね大正年間)に起こった、政治・社会・文化の各方面における民主主義の発展、自由主義的な運動、風潮、思潮の総称である。"(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걸쳐 일어난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의 민주주의 발전, 자유주의적 운동 풍조 사조의 총칭)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식민지가 된 조선은 동 시기에 무단정치 하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민족'으로서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길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

으아아아아! by 迪倫

한참쓰던 글을 그만 버튼을 하나 잘못 눌러 모두 날아가 버렸.....다음편은 아무래도 다시 시간을 낼때까지 좀 기다려주십시오..흑흑...

1923년 여름의 베이스볼 by 迪倫

별편: 도련님의 친구들에서 바로 앞의 포스팅 모던 만주, 모던 베-스보-루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1923년 8월 17일 아직 고시엔(갑자원) 구장으로 옮기기전 마지막해 나루오(鳴尾) 구장, 만주 대표 강호 다롄상업학교는 이해 처음으로 출장한 학교와 2회전에서 제9회 전국중등학교 우승대회의 첫 경기를 가졌습니다. 다롄상업의 에이스 투수 이시하라 선수에 대항한 상대팀의 투수는 김종세 선수. 예, 바로 전무후무 전부 조선인으로 구성된 휘문고등보통학교 야구팀이었습니다.

원래 다롄상업은 2년전인 1921년 전국대회 초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준결승까지 진출한 팀입니다. 게다가 이듬해 1924년과 1925년 연달아 전국대회 준결승 진출, 1926년에는 무려 결승까지 진출한 20년대 초중반 일본 중등학교 야구계의 강팀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회 전후반 양팀 모두 무실점으로 시작하였지만 2회초 다롄상이 먼저 2점을 내자 2회말 휘문고보가 바로 4점을 내며 승세를 잡고 이어서 3회말과 5회말 각각 1점씩을 보태며 6-2로 경기를 리드하기 시작합니다. 분발한 다롄상은 6회초와 7회초 각각 1점을 추가하며 추격에 나섭니다만, 7회말 휘문고보는 바로 3점을 내어 간격을 벌이고, 결국 휘문고보가 안타 12개를 치는 동안 다롄상은 무력하게 안타 3개에 그치며 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이튿날 8월 18일 준준결승 8강에 올라간 휘문고보는 교토의 리쓰메이칸 중학교와 맞붙습니다. 리쓰메이칸 중학(지금의 리쓰메이칸 고등학교)은 지금은 역사에 비해 전국대회 강팀은 아니지만 바로 그 전해 1922년 준결승 4강에 올라간 강팀이었습니다. 투수 야스다 선수에 맞서는 휘문측 투수는 역시 김종세 선수. 하지만 3번타자 포수 김정식 선수가 어제 다롄상과의 경기에서 도루를 하다 부상을 당해 결장. 그때문에 아무래도 전력의 손실이 컸습니다.

1회초와 3회초 각각 1점과 2점을 내며 앞서는 리쓰메이칸 중학을 3회말과 4회말 각각 1점씩을 추가하며 추격하던 휘문은 6회초 리쓰메이칸이 1점을 다시 추가하자 6회말 분발하여 2점을 추가하며 동점으로 만들어 냅니다. 어제에 이어 오사카 인근의 조선인 동포들이 모두 몰려들어 열렬히 응원하는 가운데 7회와 8회 팽팽하게 둘다 득점없이 팽팽하게 이어가다 9회초 리쓰메이칸이 먼저 3점을 내자 비록 9회말에 1점을 더 추가하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7-5로 분패하고 말았습니다.

휘문을 꺾고 준결승에 올라간 리쓰메이칸은 역시 초출장의 고요중학교에 13-5로 대패하고 탈락, 고요중학교는 이 기세로 승승장구 결승전에서 전국대회 3연승을 노리던 강호 와카야마 중학교를 5-2로 파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제9회 대회의 화제는 단연 전 조선인 팀의 초출장과 선방이었습니다.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야구부 단체 사진입니다. 아마도 제 추측으로는 조선대표 선발 후 기념사진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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